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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毅宗]

놀이와 환락에 빠진 국왕, 무신에게 제거되다

1127년(인종 5) ~ 1173년(명종 3)

의종 대표 이미지

거제 둔덕기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즉위와 성품

의종은 고려의 18대국왕으로, 1127년(인종 5)에 태어나 1173(명종 3)에 사망하엿다. 왕. 재위기간은 1146(의종 즉위년)~1170년(의종 24)이다. 초명은 철(徹)이었으나 나중에 현(晛)으로 고쳤다. 자는 일승(日升)이다. 인종[고려](仁宗)과 공예태후(恭睿太后)사이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인 장경왕후(莊敬王后)이며, 이후 참정(參政)을 지낸 최단(崔端)의 딸을 다시 맞이하여 장선왕후(莊宣王后)로 삼았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시호는 장효(莊孝)이며, 능은 희릉(禧陵)이다.

왕철은 1143년(인종 21)에 태자가 되었다. 그는 “성품이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였고, 여러 소인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인 공예태후는 둘째아들인 대령후(大寧侯)을 태자로 대신 세우려고 하였던 일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의종이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그래서인지 대령후 경은 끝내 1157년(의종 11)에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천안으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의종은 도량이 좁고 질투가 심했으며, 어린 시절에 태자에서 폐위될 뻔한 경험 때문인지 자격지심도 갖고 있었다.

2 국정의 어려움

의종은 즉위한 초반에는 김부식(金富軾)과 임원애(任元敱), 태자시절부터 스승이었던 정습명(鄭襲明) 등을 중심으로 인종대의 정치질서를 이어가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미 인종대부터 왕권이 실추된 상태였으므로 국왕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의종은 측근을 육성하여 이들을 통해 정국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의종의 측근이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이었다. 김존중은 의종의 태자시절에 춘방시학(春坊侍學)과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를 지내면서 의종의 총애를 받게 된 이였고, 정함은 의종이 어릴 때부터 돌봐준 환관이었다. 의종을 이들을 중심으로 내시와 환관 세력을 확대, 강화하였다. 이들은 대간을 비롯한 관료들과 대립을 하다가 김부식, 정습명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내시, 환관의 측근들 외에 소장 관료들도 의종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대신들도 의종의 측근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의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 귀족 출신의 관료들과 다소 한미하거나 신진 관료들 사이의 경쟁이 벌어지고 했다. 내시의 左右番이 저마다 다투어 가면서 왕에게 진기한 물품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우번에는 부유한 자제[紈袴子弟]가 많아서 宦者들을 통해 (왕의) 聖旨를 빌려 公私에 보관하고 있던 진귀한 물품과 서화 등을 많이 찾고 또 綵棚을 만들어 여러 놀이꾼을 태워서 외국 사람이 공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꾸며 붉고 푸른 일산 2개와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좌번은 모두 儒士들로, 여러 가지 기예에 익숙하지 못하고 (왕에게) 바치는 물품도 (우번의 것에) 백에 하나만도 못하였다. (좌번의 유사들은) 우번만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남의 좋은 말 5필을 빌려서 바쳤다. 왕이 (좌우번에서 바친 물품들을) 모두 받고는, 좌번에 은 10근과 丹絲 65근을, 우번에 은 10근과 단사 95근을 내려주었다. 그 후 좌번이 말값을 갚지 못해서 날마다 빚에 시달려서 당시 사람들이 비웃었던 일이 있을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 의종은 격구 등의 무예를 즐겼고 보현원 등 개경 주위의 사찰 등으로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자연스레 국왕의 호위를 담당한 무신들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국왕의 시위 조직인 내순검군을 새로 창설하여 자신의 호위를 강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에 따라 국왕 가까이에서 실제 호위 임무를 담당하던 하급 무인들도 국왕 측근의 한 부류를 형성했다. 또 의종은 수명의 연장 등 미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점술 등을 맡았던 이들도 여럿 있었다.

의종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태조와 세조의 능을 참배하거나, 절이나 별궁을 지으며 그 이름을 ‘중흥(重興)’이라 붙이곤 한 모습이 보인다. 다만 그러한 노력들이 음양설, 도참설 등 종교적인 부분에 그치고 정작 실질적인 정치력으로 행사되지 않은 점에서 한계가 뚜렷했다.

의종은 다양한 성분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자주 놀러 다니면서, 기도를 위한 각종 기복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를 대간들이 여러 차례 간쟁하며 그만 둘 것을 요청하였지만 의종은 듣지 않았다. 그 결과 향락이 심해지면서 정치 기강은 문란해졌다. 여기에 더해서 측근세력 사이에서도 측근 문신과 무신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기면서, 측근 세력의 분열도 심화되어 갔다. 특히 젋은 측근 중의 한 명이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린 아래의 사건은 의종 측근의 방종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정축일에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을 불러서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취하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장하도다, 이곳은 군병을 연습시킬 만하도다.”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뢰는 무신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맞잡고 치다가 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그 뺨을 쳐서 즉시 뜰 아래로 떨어뜨렸다. 왕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임종식·이복기도 또한 소응을 꾸짖고 욕하였다. 이에 정중부·김광미(金光美)·양숙(梁肅)·진준(陳俊) 등이 안색을 변하며 서로 눈짓하였다. 중부가 소리를 높여 한뢰를 꾸짖기를, “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느냐.” 하니, 왕이 중부의 손을 잡아 위안하고 화해시켰다.

3 정변과 죽음

1170년(의종 24)에는 서경으로 행차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면서 개혁의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으나, 불교·음양설·선풍(仙風) 등 종교적 행사를 중요시하였을 뿐 정치질서의 확립이나 회복에 대한 비중은 매우 적었다. 또 국왕의 유흥이나 음양도참설 등에 따른 이궁, 별궁 및 놀이 시설의 건설 등으로 토목 공사가 많아서 백성들이 많은 공사 동원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연이어 개최되는 재초 등 도교식 종교행사 등으로 그 비용도 많이 들었다.

결국 1170년(의종 24) 보현원[장단](普賢院)에 행차했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의 측근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서 의종을 왕위에서 쫓아내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이다. 의종은 거제(巨濟)로 유배가게 되었고, 의종을 대신하여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호(晧)가 옹립되니, 그가 곧 명종[고려](明宗)이다.

거제로 유배가 있던 의종은 1173년(명종 3)에 김보당의 난(金甫當-亂)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다. 김보당(金甫當)의 이 거병은 의종의 복위와 무신정권의 진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거제로 보내 의종으로 모시고 나와 일단 경주(慶州)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은 실패했고, 이의민(李義旼)이 이끈 부대는 계림으로 와서 의종을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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