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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李穀]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끝없는 노력

1298년(충렬왕 24) ~ 1351년(충정왕 2)

이곡 대표 이미지

가정목은선생문집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곡(李穀, 1298~1351)은 13세기 말~14세기 중반에 고려와 원을 오가며 정치 활동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고려와 원의 과거에 모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고, 양국을 오가며 중요한 현안들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루어 고려말의 문학적·사상적 전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젊은 날의 절차탁마와 출세의 한계

이곡은 1298년(충렬왕 24) 7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산군(韓山郡)의 향리인 이자성(李自成)이었고, 어머니는 흥례부(興禮府) 이춘년(李椿年)의 딸이었다. 처음 이름은 이운백(李芸白)이었으나 나중에 이곡으로 고쳤다. 자는 중보(中父)이다. 3형제 중 막내였다.

이곡이 불과 13세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때부터 이곡 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외가가 있었던 흥례부와 가까운 영해(寧海) 지역을 오갔는데, 그곳에서 이곡의 사람됨을 좋게 본 김택(金澤)이 사위로 삼았다. 이 무렵 영해에 관리로 부임했던 당대의 학자 우탁(禹倬)을 만났던 것이 이곡의 문집을 통해 확인된다. 어린 이곡이 우탁에게 학문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겠다.

10대의 이곡은 개경(開京)으로 올라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서리(胥吏)로 취직하였다. 그리고 1317년(충숙왕 4)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이어 1320년(충숙왕 7)에는 예부시(禮部試)에도 2등으로 급제하여 어엿한 관리로서의 자격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복주(福州)의 사록참군(司錄叅軍)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국자감시 합격 당시부터 사람들이 그에게 경전과 역사에 대해 배울 바가 많았다고 하니, 학문적 성취도가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급제 이후 그의 관직 생활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1327년(충숙왕 14)에 그는 과거 동년 급제자 두 사람에게 글을 보내 벼슬자리를 구하는 청을 하였다. “한미한 가문에 궁벽한 마을 출신의 선비는 원래 자기 힘만으로는 출세할 수가 없는 법이지. 반드시 청운(靑雲)의 귀한 신분에 오른 지기(知己)가 있어서 그를 끌어당겨 주어야만 굽히고 있다가 펼 수 있고 움츠리고 있다가 움직일 수 있다네.”라는 내용이 담긴 글을 급제 동기에게 보내는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당시의 정치 상황은 인사 행정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보다는 권세가의 실력 행사에 따라 흘러가는 경향이 강했다. 학문이 뛰어난 이곡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실을 타개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는 것으로 뚫어보려 노력하였다. 당시는 이른바 원간섭기로, 원은 고려인들에게도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곡은 1326년(충숙왕 13)에 예비고시라 할 수 있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鄕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327년(충숙왕 14)에 원의 수도로 가서 치른 회시(會試), 즉 본고시에서는 급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곡은 좌절에 빠져 포기하지 않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에는 자신이 과거에 급제할 때의 시험 총괄, 즉 좌주(座主)였던 이제현(李齊賢)에게 글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였다. 그 덕분인지 이듬해에는 조정으로 들어와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승진할 수 있었다.

3 화려한 제과(制科) 급제로 꽃피운 관직 생활

1332년(충숙왕 후원년), 그는 다시 정동행성의 향시에 응시하여 1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원으로 가서 회시에 급제하고,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당당히 제2갑(第二甲)으로 선발되었다. 이제 이곡 인생의 제2막이 화려하게 펼쳐지려 하였다. 원은 그를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에 대하여 “이보다 전에 고려인은 비록 제과에 급제해도 대개 석차가 낮았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독권관(讀卷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아 제2갑에 선발되었다. 재상(宰相)이 〈황제에게〉 아뢰어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으로 임명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제 이곡은 원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문필을 다루는 한림원의 관리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 때부터 그는 원의 문사(文士)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문장을 갈고 닦았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원간섭기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팍스 몽골리카’라는 말로 묘사될 정도로 몽골의 유라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강력했다. 정치적으로 부당한 압력이 행사되기도 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고려인들이 고려의 영역을 넘어 원의 판도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면도 있었다. 당시 많은 고려인들이 고려와 중국 대륙을 오가며 장사를 하거나 관직에 올라 활동하였다. 물론 그 중에서도 이곡처럼 원의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관리 생활을 하는 경우는 특별했다.

1334년(충숙왕 후3), 이곡은 고려의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원의 조서를 받들고 고려로 파견되었다. 금의환향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한반도의 역대 국가에서 중국 대륙의 국가에 사람을 보내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 급제한 사람은 이곡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곡만큼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이곡은 조서를 고려에 전하고 각지를 돌며 학교들을 둘러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해부(金海府)의 향교 중수에 대해 남긴 글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이 뒤로 이곡은 원에서 정동행성의 관직을 제수받아 고려에 파견되기도 하고, 고려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관리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시기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곡의 중요한 정치활동으로 주목받는 것은 우선 1335년(충숙왕 후4)에 원의 공녀(貢女) 요구에 대하여 이를 중단해 줄 것을 호소한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의 어린 여자를 공녀로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참상도 많았다. 이곡은 원에 상소를 올려 그 폐단을 호소하고, 특히 고려에서는 딸과 부모의 관계가 각별하니 이를 감안하여 달라고 간절한 글을 올렸다. 원의 황제는 이를 보고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뒤로도 이 말은 잘 지켜지지 않고 공녀 요구가 계속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이곡은 충숙왕(忠肅王)의 신임을 받으며 고려와 원 사이에서 문한(文翰)의 일을 맡으며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어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여 폭정을 자행하자 고려를 떠나 원에서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몇 해 후 충혜왕이 폐위되고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이곡은 적극적으로 고려의 내정 개혁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도 이제현 등이 주도하여 개혁이 추진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곡은 다시 고려로 돌아와 관직을 맡았다. 이 시기의 이곡은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승진을 거듭했고, 중대광 한산군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重大匡 韓山君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에 올랐다. 또 이제현 등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347년(충목왕 3)에는 허백(許伯)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영예도 안았다.

그러나 이때의 과거 시험에서 허백과 이곡이 공정하지 않게 실력이 모자란 권세가의 자제들을 선발하였다는 탄핵이 올라왔다. 결국 이 시험에서는 급제자가 배출되지 못하였다.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곡에게 치욕적인 과오였을 것이다. 이곡은 잠시 다시 원으로 돌아가 관직생활을 하다가 1348년(충목왕 4)에 돌아왔다. 이 때 그는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都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에 임명되어, 관직 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다시 한 번 고려의 정치계에서 뜻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4 만년의 유람과 후세에 남긴 문명(文名)

충목왕 이후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면서, 충정왕이 아닌 훗날의 공민왕(恭愍王)을 차기 국왕으로 지지했던 이곡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결국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관동(關東) 지역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다음해에 원에서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1351년(충정왕 3) 정월에 이곡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4세였다. 가슴에 품은 뜻을 제대로 다 펴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곡의 삶에 대한 『고려사』의 내용은 열전이라는 특성상 분량의 한계가 있다. 다행히 그가 남긴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을 통해 우리는 이곡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도 많은 점을 알 수 있다. 문학사에서도 고려 후기 문인의 저작집으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곡의 아들인 이색(李穡)도 원의 제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고려말의 정치계에서 거목으로 자리잡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후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여말선초 시기 정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이곡의 삶에서 흔히 ‘원 제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라는 점이 부각되곤 한다. 물론 이 점이 가장 눈부신 부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이곡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학문을 연마하고 새로운 길을 두드렸던 노력에도 눈길이 간다. 또한 여러모로 난맥에 빠져 있던 고려 정계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 모색했던 점도 중요하다. 현실의 벽이 거듭 이곡을 막아섰지만, 굴하지 않고 늘 이를 넘어서려 노력했던 모습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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