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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李崇仁]

천하제일의 글재주를 품었으나 매질을 당해 죽다

1347년(충목왕 3) ~ 1392년(공양왕 3)

이숭인 대표 이미지

성주이씨 영정(이숭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14세기 중엽부터 말기까지 살았던 고려 시대의 정치가였다.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외교 문서를 잘 작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기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곤욕을 치르다가, 조선 개국 초기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2 영민한 소년, 두각을 드러내다

이숭인은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났다. 지금의 성주(星州) 일대인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아버지는 이원구(李元具)이며, 어머니는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를 지낸 김경덕(金敬德)의 딸이었다. 자(字)는 자안(子安)이며, 호(號)는 도은(陶隱)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숭인은 학문에 두각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글을 읽으면 바로 외웠다고 한다. 겨우 14세였던 1360년(공민왕 9)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고, 2년 뒤인 1362년(공민왕 11)에는 예부시(禮部試)에 병과(丙科) 2인으로 당당히 급제하였다.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받고, 이후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옮겨 진덕박사(進德博士)를 겸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린 그의 졸기에서는 그가 20세도 되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았다고 기록하였다.

1367년(공민왕 16)에 공민왕은 국학(國學)을 크게 확장하여 새로 지었다. 당대의 명유(名儒)이자 관리였던 이색(李穡)을 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으로 삼고, 경학(經學)과 글짓기에 뛰어난 관리들을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았다. 그런데 불과 21세의 이숭인이 여기에 선발되었다. 이 때 함께 선발된 학관들은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었다. 모두 당대의 젊은 신진 명사들이었다. 하지만 젊다고는 해도 대개 이숭인보다 십여 세 정도 많았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이숭인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이숭인이 더욱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1370년(공민왕 19)의 일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의 과거에 응시하러 보낼 공사(貢士)를 선발하였는데, 이 때 이숭인과 권근(權近) 등이 우수하다고 뽑혔다. 이색이 주관한 이 발탁에서 이숭인은 1등을 차지하였다. 최고의 젊은 인재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숭인과 권근이 아직 25세도 되지 않았다 하여 보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 파견하였다. 3년 뒤에 공민왕은 모니노(牟尼奴), 즉 훗날 우왕(禑王)이 되는 자신의 후사를 가르칠 스승으로 이숭인을 택하려 하였다. 공민왕이 이숭인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숭인은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禮儀散郞 藝文應敎 門下舍人)을 지내며 안정적인 관직 생활을 해나갔다. 아마도 공민왕대가 이숭인에게는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3 격변하는 시대 흐름에 휘말리다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고려 정계는 큰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몇 개의 정파로 나뉘어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원이 쇠퇴하고 명이 새로 대두하던 국제 정세의 변화도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다. 이미 공민왕대부터 고려 정계는 원과 명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큰 갈등을 빚었다. 1368년(공민왕 17), 원은 수도를 포기하고 북쪽 초원으로 패주하였다. 이제 대륙은 명의 차지가 되었고, 몽골은 ‘북원(北元)’이라 불리며 초원으로 물러났다. 공민왕대에는 친명정책이 대체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우왕대에는 권력을 쥔 이인임 등이 친원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급기야 이들이 북원의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이숭인은 김구용·정도전·권근 등과 함께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공민왕대에 양성된 신진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만약 이들 사신을 맞아들이면 일국의 신민이 모두 난적(亂賊)의 죄에 빠질 것이니, 언젠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있는 현릉(玄陵, 공민왕)을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반발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인임 등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하며 강경하게 나섰다. 이숭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1375년(우왕 원년), 그의 삶에서 처음 맛본 쓰라린 좌절이었다.

4 필력을 발휘하여 외교 일선에 서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난 이숭인은 1378년(우왕 4)에 다시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요동치는 정국의 덕분이기도 했다. 정계로 복귀한 그는 성균사성(成均司成)을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동료들과 함께 올린 시정 개혁에 대한 상소가 유명하다. 이 상소에서 이숭인 등은 국왕에게 중신들과 학문과 정치를 공부하여 바른 정치를 펼 것, 지방관을 적임자로 선정하여 보낼 것, 지방 군사 동원 방식을 정돈할 것, 부당하게 토지를 하사받은 사람들을 조사할 것 등 여러 사안을 거론하였다. 국정 전반의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상소였다. 아쉽게도 당시의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이것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복귀한 이숭인이 가장 많이 활약한 분야는 바로 외교였다. 외교는 문서로 이루어지는데, 외교문서는 작성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사안에 대한 정밀한 논리 전개는 물론이고, 역사 속의 여러 옛 일들, 고사에 담긴 의미를 함축한 표현 등 많은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 작업이다. 이는 단순히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이숭인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명에 공민왕의 시호를 청하는 표문을 올리는 일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서를 작성했고, 그 중 스무 편 정도가 현재 문집에 실려 전한다. 당시 고려와 명의 외교 관계는 많은 갈등 속에 있었기에, 그의 역할은 막중했다. 때로는 직접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인임이 정계에서 축출될 때 그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잠시 벼슬에서 내몰리기도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다. 창왕(昌王)이 즉위한 뒤인 1388년(창왕 즉위년) 10월, 이숭인은 이색·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펼쳤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5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그리고 이숭인의 비극적 죽음

그 직후, 이숭인은 다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었으나, 그 뒤에 새로 누구를 왕으로 올릴 것인가를 두고 고려 정계는 크게 조민수(曺敏修) 세력과 이성계 세력으로 나뉘었다. 일단은 조민수 측에서 기세를 잡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즉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이 엇갈렸던 이색도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와 가까웠던 이숭인도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이숭인을 치명적으로 몰아세운 사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1389년(창왕 원년) 9월,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 사건과 관련하여 탄핵을 받았다. 당시 실종되었던 왕족인 영흥군을 그 부인이 사람을 풀어 수색 끝에 찾아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실제로 영흥군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숭인은 그가 가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흥군의 가족들이 진짜라고 하여, 이숭인은 무고죄로 탄핵되었다. 이숭인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옥졸들이 아들 이차약(李次若)을 매질하며 끌고 다니면서 그를 수색하였다. 이는 이성계가 개입하여 겨우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달인 10월에 이숭인은 다시 탄핵당했다. 이번에는 앞의 일에 더하여 두 가지 사유가 더 붙었다. 하나는 예전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을 무리하게 맡은 일이 문제였다. 또 하나는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사무역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이 일로 이숭인은 경산부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끝으로 이른바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가 되었다. 이는 윤이와 이초가 공양왕의 정통성에 대해 문제삼고 이성계 세력을 모함하는 상소를 명에 올렸다는 사건이었다. 대체로 이성계 세력이 이색 세력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탄핵들이었다.

그러나 위의 사건이 무고였다는 점이 밝혀졌고, 1391년(공양왕 3) 1월에 이숭인은 겨우 사면받을 수 있었다. 이어 당시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던 정몽주는 이숭인을 다시 불러 관직을 받게 하고 실록 편수에 참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되면서, 정몽주의 세력에 속했던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숭인도 결국 다시 귀양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8월, 이성계는 이숭인 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당시 이성계는 이숭인 등에게 장(杖) 100대를 치고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내렸다. 그런데 매질을 당한 이숭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강경파였던 정도전이 주도한 일이었다. 실록에서는 이성계는 이들을 살리려고 의도했었기에 이 상황에 대하여 크게 화를 냈다고 하였다.

이숭인의 글은 『도은집(陶隱集)』에 실려 전해진다. 당시 명을 세운 주원장도 이숭인의 외교문서를 보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고, 이색도 동방(東方)의 역대 문장가 중에 이숭인만한 사람이 없다고 평을 하였다. 실록의 졸기에서는 그가 성리학에도 정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은 이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격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역사 속 하나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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