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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李義旼]

피바람을 일으켜 욕망을 채우다

미상 ~ 1196년(명종 26)

1 개요

이의민(李義旼)은 고려 무신정권기에 살았던 무신으로, 대표적인 무신집권자 중 한 사람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하였다.

2 방황하던 불량소년, 무예로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되다

이의민의 고향은 경주(慶州)였다.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일을 했고 어머니는 연일현(延日縣)에 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신분의 구별이 있었던 당시 사회에서 이의민은 가장 밑바닥에 가까운 처지로 태어났던 것이다. 장성하며 8척이 넘는 기골에 남다른 완력을 갖게 된 이의민은 같은 처지의 두 형과 더불어 마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들은 온갖 횡포를 부리며 동네 불량배 취급을 받았다. 이의민 3형제는 결국 안렴사(按廉使) 김자양(金子陽)의 명령으로 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곳에서 두 형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의민은 김자양의 명령으로 경군(京軍)으로 보내졌다. 아마도 동네에 계속 있어봐야 계속 말썽거리가 될 테니, 멀리 개경으로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아내를 데리고 개경으로 올라와 군인이 된 이의민. 그는 몰랐겠지만, 이 일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시작이 되었다. 건장한 체격에 힘이 세고, 더구나 무예인 수박(手搏)에 능했던 이의민은 어느 날 국왕 의종(毅宗)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의종이 그를 총애하여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라고 하였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동네 불량배로 자랐던 이의민이 이제 국왕의 총애를 받는 어엿한 장교가 된 것이다.

3 뒤집어진 세상, 앞장서서 피바람을 일으키다

1170년(의종 24) 8월에 발생한 무신정변을 계기로 이의민의 인생은 더욱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무신정변은 왕실 호위부대의 책임자와 장교들이었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문치(文治)를 지향하고 문신을 우대했던 고려 조정의 오랜 지향이 낳은 불평등과 갈등의 산물이었다. 국왕 의종은 폐위되어 유배되었고, 이제 무신들이 고려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는 피바람이 불었다. 이의민은 이 때 적극적으로 정변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록에는 “정중부의 난에 이의민이 많은 사람을 죽여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가, 곧이어 장군(將軍)으로 승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의민이 정중부 등 무신정변 주동자의 편에서 문신들과 국왕 측근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1173년(명종 3) 8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가 있던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무신정권에 대한 역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거제도로 유배된 의종을 구출하여 경주로 모셔왔다. 이에 정중부 등은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의종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의종은 천한 출신인 이의민을 눈여겨보고 총애하여 높은 지위에 올려준 은인이었지만, 이의민은 잔혹한 방법으로 의종을 죽였다. 그는 곤원사(坤元寺) 북쪽의 연못으로 데려가 술을 몇 잔 마시게 한 뒤, 의종을 때려죽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등뼈를 부러뜨렸는데, 손놀림에 따라 소리가 나니 〈이의민은〉 곧 크게 웃었다.”라고 하였다. 의종의 시신은 이의민과 함께 경주로 파견된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가 이불에 싸서 가마솥 두 개 사이에 넣고 연못에 던져버렸다. 이에 헤엄을 잘 치던 절의 승려가 연못에 들어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그대로 방기해서 며칠 동안 연못 위에 의종의 시체가 떠 있었다고 한다. 이의민과 박존위는 이 일을 공으로 내세우고 다녔다. 이 공으로 이의민은 무려 대장군(大將軍)에 임명이 되었다.

4 노비의 아들, 고려의 정점에 서다

의종을 시해한 이후로 이의민은 승승장구하였다. 1174년(명종 4)부터 1176년(명종 6)까지 서북 지방을 뒤흔들었던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무신정권에 대한 역쿠데타를 진압하는 데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맞고서도 진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는 일화마저 전해진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할 때 세운 공으로 이의민은 고려 무반의 최고봉인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최고의 무신권력자 중 한 사람으로 등극한 것이다.

당시는 정중부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였다. 이의민은 1177년(명종 7)에도 조위총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전공을 쌓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이의민에게 제동이 걸린 것은 1179년(명종 9) 9월, 경대승(慶大升)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경대승은 당시 정권을 농단하던 정중부를 습격하여 목을 베고 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런데 경대승은 이를 축하하는 관료들에게 “임금을 죽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이의민을 지목한 발언이었다. 경대승은 자신도 무신이었으나,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할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라고 『고려사절요』에서 평가되었다.

경대승의 기세에 이의민은 몸을 사렸다. 이의민은 자신의 집에 정예 병력을 모아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경대승도 자신의 무력 기반으로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백 수십 명의 용사를 기르고 있었다. 도방에서 이의민 세력을 노린다는 소문에 이의민은 자신의 마을에 큰 문을 세우고 경계병을 세웠다. 양측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아무리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이라고 해도 이의민을 마음대로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기반이 취약했고, 경대승의 복고적 정책에 반기를 드는 무신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1181년(명종 11)에 형부상서 상장군(刑部尙書 上將軍)을 제수 받고 변경에 병마사로 출진하였다. 이 때, 경대승이 자신의 측근이었던 허승(許升)을 제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공을 믿고 방자하게 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경대승이 살해되었다.’라고 잘못 이의민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를 들은 이의민은 “내가 경대승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누가 모의를 하였을까? 나보다 먼저 손을 썼구나.”라고 기뻐했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 이 말은 그대로 경대승의 귀에 들어갔고, 이의민은 겁을 먹고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갔다. 일생일대의 큰 위기였다.

그러나 1183년(명종 13) 7월, 서른 살에 불과했던 경대승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이에 국왕은 이의민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이의민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1190년(명종 20), 이의민은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의 지위에 올랐다. 노비의 아들이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신분제가 존재했던 전근대에 이의민의 입신양명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차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특수한 경우였다.

5 끝없는 욕망의 폭주와 일탈

이의민의 일생은 미담이 될 수는 없었다.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 보였던 이의민의 잔혹성은 권력을 쥔 이후 더욱 심각해졌다. 인사권을 장악하고 뇌물을 받는다든지, 백성들의 집과 땅을 빼앗는 행태가 이어졌다. 양가집의 예쁜 여자들을 데려와 결혼했다가 버리는 일도 반복하였다. 조정의 관료들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의민의 처는 집의 여종을 질투하여 때려죽일 만큼 사나웠고, 남자 종과 간통하였다가 이의민에게 쫓겨났다. 여러 아들들도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이지영(李至榮)과 이지광(李至光)은 특히 그 행패가 심해서 세간에서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지영은 마음에 거슬리면 자신보다 높은 관리도 때려죽이려 들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강제로 간음하는 등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 이의민의 딸도 음탕하여 남편과 소원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이의민의 외손자 역시 별장(別將)을 제수받았는데 사납고 간교하였다고 한다.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의 난이 남쪽 지방에서 터졌을 때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된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李至純)은 오히려 적과 내통하며 재물을 쌓기에 열을 올렸다. 당시 이의민은 “용의 자손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라는 말을 믿었으며,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김사미 등과 내통하였다는 것이다. 총 지휘관이었던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은 이런 상황에 울분이 터져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6 칼로 흥한 자, 칼로 스러지리니…

이러한 일가족의 행패는 결국 이의민의 파멸을 불러왔다. 아들 이지영이 다른 무신이었던 최충수(崔忠粹)의 비둘기를 빼앗았고, 이에 앙심을 품은 최충수가 형인 최충헌(崔忠獻)과 함께 이의민 부자를 죽이기로 계획을 짠 것이다. 이처럼 비둘기 한 마리에서 시작된 별 것 아닌 사건이 오랫동안 쌓인 권력 갈등과 뒤엉키며 무신정권의 판세를 바꾸는 도화선이 되었다.

1196년(명종 26) 4월, 명종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이의민은 병을 핑계로 호종하지 않고 미타산(彌陀山)의 별장으로 향했다. 최충헌 형제와 그 측근들은 그 밖에 숨어 있다가, 별장에서 나오는 이의민을 습격하여 목을 베었다. 이의민의 목은 저자에 효시되었다. 이지순과 이지광 등은 시가전을 벌이다가 도망쳤고, 결국 항복하였으나 목이 잘렸다. 다른 지역에 나가있던 이지영 역시 살해되었다. 최충헌은 국왕에게 요청하여 이의민의 3족을 멸하고 그 세력을 척살하였다. 한 순간에 이의민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살벌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그렇게 살벌하게 만든 주역 중 한 사람은 바로 이의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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