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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李義方]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다

미상 ~ 1174년(명종 4)

이의방 대표 이미지

고려사 권128 열전 이의방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이의방(李義方, ?~1174)은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1174년(명종 4)에 살해당하였다. 정변 직후 가장 위세를 부렸던 인물 중 하나였으나, 권력에 집착하고 이에 도취되어 행패를 부리다가 다른 무신(武臣)에게 살해당하였다.

2 국왕 호위 부대의 장교, 주군에게 칼을 겨누다

1170년(의종 24) 8월, 쿠데타가 터졌다. 그 주역은 국왕 의종(毅宗)을 지키던 호위부대의 장수들이었다. 장수들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주군에게 칼끝을 돌려 들이댄 이 사건은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라 하여 ‘무신정변’, 혹은 ‘무신의 난’이라 불린다. 이날의 정변을 누가 언제부터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일단 사료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정변의 주역은 정중부(鄭仲夫)와 이고(李固), 그리고 이의방이었다.

이의방은 본관이 전주(全州)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신정변이 터질 즈음에 그는 정8품 산원(散員)으로 국왕을 호위하는 견룡군(牽龍軍)의 장교인 견룡행수(牽龍行首)로 배속되어 있었다. 그 이전의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고려 조정의 두 축인 문신(文臣)과 무신들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조정의 관직 서열에서 문신과 무신 모두 3품까지는 똑같이 품계가 설정되어 있었으나, 그 위의 최고위 관료인 재추(宰樞), 즉 재상은 문신들의 자리였다. 사회적인 대우도 문신, 특히 과거 급제자 출신의 문신들이 압도적으로 높게 받고 있었다. 문치(文治)를 추구했던 고려에서 문신이 우대를 받았던 것, 그리고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의 지위에 군인을 올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부 문신들이 무신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고, 의종이 측근 문신들과 향락에 빠지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심해졌다. 일반 군졸들의 삶은 더욱 곤궁하였다. 무신정변이 터진 데에는 이러한 당시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되고 있다.

다시 무신정변이 터지던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정확한 시점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정변 이전에 이의방과 이고가 다른 무신에게도 접근하여 난을 꾸몄던 일화가 전해진다. 이로 보아 가장 초기부터 난을 도모한 것은 이 두 사람이었던 듯하다. 1170년(의종 24) 8월, 의종이 밖으로 행차하여 문신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돌아갈 때를 잊고 즐기니, 호종하던 군사들이 굶주려 불만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그리고 이때 이의방과 이고가 이번에는 정중부에게 그 불공평함을 이야기하며 변란을 모의하였다고 하였다. 얼마 뒤 의종이 또 문신들과 즐기다가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던 여정에 묵은 보현원(普賢院)에서 마침내 이의방 등은 칼을 빼어들었다.(무신정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아래의 내용은 대체로 이 사료에 담겨 있다.)

이의방은 이고와 함께 미리 순검군(巡檢軍)을 모아두어 병력을 단속하고, 국왕의 측근 문신들을 끌어내어 죽였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고려사』의 묘사가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전한다. 수도 개경(開京) 외곽의 보현원에서 국왕을 구류한 후, 이의방은 정예 수하를 뽑아 이고 등과 함께 개경으로 급히 진입했다. 쿠데타 소식이 전해져 개경의 성문이 닫히고 태자가 군을 동원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개경의 궁궐과 태자궁, 주요 관청을 장악하고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서리라도 모두 죽여라!”라고 외치며 살육극을 벌였다. 당시 군졸들까지 봉기하여, 50여 명의 문신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의종은 이의방 등을 달래어 난을 진정시키려, 이들의 관직을 높여주었다. 피바람이 분 8월 30일이었다. 이들이 의종을 궁궐로 돌려보내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9월 1일, 환관 왕광취(王光就)가 무리를 모아 정변을 진압하려다가 정보가 누설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고 등 일부 무신들은 의종을 이 때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다른 무신들의 만류로 이는 일단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이의방 등은 결국 의종을 거제도(巨濟島)로 추방하고, 의종의 동생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 왕이 바로 명종(明宗)이다. 명종은 정변 주역들을 승진시키면서 이의방을 대장군 전중감(大將軍 殿中監)으로 임명하고 집주(執奏)를 겸하게 하였다. 절차적으로는 명종이 임명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정변 주역들이 스스로 배분한 지위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8품 산원에서 단숨에 고려 무반의 서열 두 번째인 종3품 대장군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3 어제의 동료, 오늘의 경쟁자

명종이 즉위하면서 정중부는 재상급 관료인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이의방과 이고는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들뿐만 아니라 정변에 가담한 무신들이 전체적으로 크게 승진하여, ‘그밖에 무인으로서 품계와 서열을 뛰어 넘어 고관요직[華要]을 겸임한 자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라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이의방과 이고, 정중부는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고 의종의 사저(私邸) 세 채를 하나씩 나누어 가지는 등 쿠데타 성공의 열매를 즐겼다. 이들은 또한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책봉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화가 걸렸다.

그러나 권력의 세계는 냉정했다. 정변의 세 주역은 곧 서로 권력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경쟁자가 되었다. 먼저 충돌한 것은 이의방과 이고였다. 이고는 정변 주역들 중 문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장 크게 보였던 인물이었다. 정변 직후에 아직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죽이려다가 정중부의 제지로 그만두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의방은 이듬해 1월에 태자(太子)의 관례(冠禮)에 즈음하여 명종이 연 잔치에 이고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기습하여 철퇴로 때려죽이고 그 무리를 잡아 처형하였다. 『고려사』에는 이고가 ‘감히 바랄 수 없는 뜻’, 즉 직접 왕이 되려는 뜻을 지니고 이 잔치에서 일당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다가 그 정보가 누설되어 이의방이 채원(蔡元)이라는 무신과 함께 선수를 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 달 뒤, 이의방은 채원과 그 무리마저 모두 죽였다. 채원이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고와 채원의 음모가 사실인지, 아니면 이의방이 이들을 제거하며 씌운 누명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의방은 이를 구실로 경쟁자들을 제거하였다. 정중부의 열전에서는 이의방이 이들을 미워하여 핍박하여 죽였고, 정중부도 화를 당할까봐 몸을 사렸다고 하였다. 무신정변은 ‘정중부의 난’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여 주로 정중부에 주목하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이의방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의방은 은거한 정중부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이의방이 비록 지금은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정변 당시에는 하급 무신에 불과했기 때문에, 원래 고위 무신이었던 정중부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두 사람은 이후로 서로 견제하면서도 연대하여 권력을 장악했던 모습들이 보인다.

4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다

1173년(명종 3)부터 무신정권에 반발하는 군사적 움직임이 나타났다. 물론 이전에도 몇몇 인사들이 무신집권자들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는 일이 있었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본격적인 무력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가 있었던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병사를 일으켜 거제도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구출하여 복위시키고 이의방 등을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진압되고 의종마저 시해되었으며, 이후 이의방 등은 보복으로 수많은 문신들을 살육하였다. 그나마 이의방의 형 이준의(李俊義) 등이 이를 말리고 무신과 문신 간의 통혼으로 문신들을 달래자고 설득한 것이 통하여 점차 진정될 수 있었다.

이의방은 김보당 세력을 진압하면서 종형(從兄)인 낭장(郞將) 이춘부(李椿夫)를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에 임명하여 전체적인 전황을 관리하였다. 또한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신들에게 관직을 나누어주고 혼인을 통해 유력한 문신·무신과 결속하는 등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의방이 집권했던 시기에 무신들이 지방관으로 대거 파견되는 조치가 내려졌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훗날 이의방이 살해당한 후의 상황에 대하여 『고려사』에 ‘당시 무신들이 모두 이의방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서로 말하기를, “국가의 중요한 권력이 중방(重房)에 속하게 된 것은 모두 이의방의 힘이었다.”라고 하면서, 끝내 종참 등 10명의 승려들을 해도(海島)로 유배 보내었다.’라고 한 것은 그의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준다. 뒤에 다시 나오겠으나, 종참은 이의방 살해에 가담한 승려였다. 1174년(명종 4) 3월에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며 그 위세를 한껏 높였다. 장차 자신의 외손자를 고려의 왕위에 올리겠다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의방의 권세가 높아질수록 그의 교만과 횡포도 커졌다. 고위 무신들이 모여 회의하던 관청인 중방에서 밤늦게까지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진 것은 약과였다. 형인 이준의가 그를 비난하면서 의종을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차지했으며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강간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한 죄가 있다고 한 것은 당시 그의 행태를 잘 보여준다.

김보당이 제압된 뒤에도 이의방에 대한 반발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위와 같은 그의 행태도 작용했을 것이다. 앞의 사료 뒷부분에 나오듯, 개경 인근의 승려들 2천여 명이 무장을 하고 침입하여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한 일도 벌어졌다. 1174년(명종 4) 9월에는 서경(西京)을 지키던 조위총(趙位寵)이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다. 조위총은 동계와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40여 성의 군사를 모아 전투 준비를 본격화하였다.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으로 진격해 오자, 이의방은 먼저 개경에 있던 서경 출신의 관리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직접 군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초전에서 승기를 잡은 이의방은 대동강(大同江)까지 추격했으나, 조위총이 서경에서 농성에 들어가고 추위가 엄습하자 패하여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의방은 다시 군사를 조련하며 조위총과 싸울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 준비에 돌입한 12월 한겨울의 개경 분위기는 흉흉했을 것이다. 이의방은 승려들까지 소집하여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이의방은 기습을 당하여 살해당하였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승려 종참을 회유하여 기회를 만들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습격하여 이의방을 죽였던 것이다. 이의방의 피살 소식에 군이 동요하자, 정중부는 저간의 사정을 알리며 군을 진정시켰다. 이의방 사후 조정의 권력은 정중부에게 돌아갔다. 의종 앞에서 앞장서 칼을 빼어들었던 이의방. 그 역시 결국 창칼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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