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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李仁老]

『파한집』을 후세에 남겨준 성실한 문인

1152년(의종 6) ~ 1220년(고종 7)

이인로 대표 이미지

파한집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이인로(李仁老)는 당대의 문인(文人)이었던 고려 중기의 관리로, 『파한집(破閑集)』을 남겼다. 또한 임춘 (林椿)의 글을 모아 『서하집(西河集)』을 편찬하는 등 왕성한 문인 활동으로 후세에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자는 미수(眉叟)였다.

2 명문가의 고아, 장원으로 급제하다

이인로의 어릴 때 이름은 이득옥(李得玉)이었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도 이 이름을 썼다.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이름을 고친 것인데, 그 시점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인로로 통칭하겠다. 이인로는 평장사(平章事) 이오(李䫨)의 증손자였다. 이오는 당대의 명문이었던 인주(仁州) 이씨 집안의 사람으로, 문종대부터 예종대까지 정계에서 활동하며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이인로의 조부모와 부모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명확하게 전해지는 내용이 없어 족보 등을 토대로 추정만 이루어지고 있으나, 관리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생각된다. 하지만 이인로가 자신의 집안에 대해 ‘8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였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학문에 뛰어난 명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것 같다.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어린 이인로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글을 잘 지었다고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인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서하집』을 통해 그에게 훗날 출가하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어린 이인로 형제는 갑자기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차라리 아주 아기 때여서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조금은 덜 슬픈 일이었을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행히 이인로에게는 대숙(大叔)인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있었다. 속세를 떠난 승려이지만 고아가 된 어린 혈육에 대한 애틋한 정은 버릴 수 없었던 듯하다. 요일은 이인로를 거두어 정성껏 길렀다. 승통이라는 고위 승직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니 이인로의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일은 이인로에게 나이 지긋한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우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글을 가르쳐서 삼분(三墳)·오전(五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게 하였다. 시점이 약간 모호하지만, 열전에 따르면 이인로는 일시적으로 출가를 하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나 세상이 흉흉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던 1170년(의종 24)의 일이었다.

이인로가 본격적으로 세상으로 나온 것은 1175년(명종 5)이었다. 그해 여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이인로는 국자감에 들어가 수학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국자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실력을 겨루는 고예시(考藝試)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이어, 1180년(명종 10)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무려 장원급제였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무신집권기 초기에 문신들이 많이 살육당했고 위축되었다고는 하나, 과거 급제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키워온 요일도 무척 기뻤을 것이다.

3 『파한집』에 전하는 소탈한 관직 생활

이인로의 관직 생활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인로는 처음 계양관기(桂陽管記)로 나아가 직사관(直史館),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監 右諫議大夫)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가 한림원에 들어가는 데에는 당시의 재상이었던 문극겸(文克謙)의 천거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열전에서는 그가 ‘성품이 편협하고 급하여 그 당대를 거슬렀기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고, 『파한집』 발문에서도 관리로서의 성취에 대해 본인도 아쉬워하였다는 묘사가 있다. 주로 사한(史翰), 즉 글짓기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오래 근무하여 정치 현안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점도 있고, 무신집권기라는 시대 특성상 문신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여의치 않은 면도 있었다. 물론 그가 올랐던 최종 관직이 정4품인 우간의대부였으니, 객관적으로 말단 하위직이었던 것은 아니다. 장원급제자들의 모임이나 한림학사들의 모임에서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며 화려하게 노닐었던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글보다 더 주목되는 것이 있다. 그가 남긴 글이 담긴 『파한집』에는 관리로 살아가며 겪었던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고려 시대의 관리는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모두 경험해야 했다. 꼭 한 번씩 교대로 맡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순환 근무는 예규(例規)였다. 『파한집』에 담긴 사례 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역시 지방관으로 나가 있을 때 겪었던 먹 제작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인로는 맹성(孟城)에 부임했을 때 왕실에서 쓸 먹 5천 개를 만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먹을 만드는 특수지역인 소(所)로 추정되는 공암촌(孔巖村)으로 가서 주민들을 직접 감독하며 두 달 동안 머물렀다. 이인로는 이를 글로 남기며, ‘얼굴과 옷에 모두 연기 그을음이 묻었다.’라는 말로 고생을 표현하였다. 이어 그동안 평범한 물건으로 여겼던 먹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하며, ‘이 뒤로 먹을 보면 비록 한 마디[寸]라도 천금처럼 귀중하게 여겨 감히 소홀히 여기지 못한다.’라고 남겼다. 연구자들에게는 당시 소의 운영상에 대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면서, 누구에게나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의 가치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교훈을 남겨준다. 장원급제자가 지방에 내려가 검댕을 묻히며 먹을 만들었던 것을 가지고 합당한 일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장원급제자라도 민생의 고달픔을 겪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게 되는 장면이다.

4 왕성한 문인 활동, 역사를 남기다

이인로의 삶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문인 활동이다. 「발문」에 따르면 이인로는 과거에 급제한 후 아직 관직에 공식적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사신단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장인인 사업(司業) 최영유(崔永濡)가 금에 하정사(賀正使)로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남긴 시 두 수가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가 금에 널리 알려져 훗날까지 회자되었다고 한다.

이인로는 관직 생활의 대부분을 문한관으로 보냈다. 『고려사』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시(詩)의 대가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이인로이다. 그가 지은 사(詞)는 ‘용솟음치는 샘물 같아 거의 정체됨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복고(腹藁)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배 안에 원고, 즉 글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는 임춘 , 오세재 (吳世才) 등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곤 했는데, 세간에서 옛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 불렀다고 한다. 임춘 과 오세재 등은 뛰어난 문장을 지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불우한 생활을 했던 문인들이었다. 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도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임춘 이 끝내 안타깝게 삶을 마치자 그의 글을 모아 『서하집』을 엮은 것은 이인로와 그의 우정을 잘 보여준다. 이 우정 덕분에 지금 임춘 의 문집이 전해지게 된 것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인로가 활동했던 또 하나의 모임은 이른바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였다. 최당(崔讜) 등 은퇴한 고위 관료들이 모여 시를 지으며 놀곤 했는데, 이인로가 그 막내로 참여하여 글 100여 수를 모아 최당의 서재 이름을 딴 『쌍명재집(雙明齋集)』 세 권을 엮었다. 장원급제자의 모임인 용두회(龍頭會)에서도 글을 엮었을 가능성이 보이지만, 지금은 시 한 수만 전한다. 또 본인이 지은 고부(古賦) 5수(首)와 고율시(古律詩) 1천 5백여 수를 모아 『은대집(銀臺集)』을 편찬하였다. 안타깝게도 『쌍명재집』과 『은대집』은 전하지 않는다. 다행히 『동문선(東文選)』에 이인로의 시문이 90여 편 남아 있어, 그의 문학에 대해 살펴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 중에는 『파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이 매우 많다. 또한 그가 해동의 역대 시문을 모으고 평을 단 『파한집』을 지은 것이 지금 전하여,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집은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시화집(詩話集)이다. 이인로가 없었다면 『서하집』과 『파한집』도 생기지 못했을 것이니, 그의 왕성한 문인 활동이 후세에 남긴 공이 무척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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