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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용[李藏用]

화술의 달인, 정치 격랑을 헤쳐 나가다

1201년(신종 4) ~ 1272년(원종 13)

1 개요

이장용(李藏用)은 13세기의 대몽항쟁기부터 원간섭기 초기까지 활동하였던 정치가였다. 경전과 문장, 역사 등 다방면에 해박하였고, 특히 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임연(林衍)의 원종(元宗) 폐위 사건에서 취한 태도로 인해 훗날 정치적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사망하였다.

2 전란의 시대, 조정에 출사하다

이장용의 자는 현보(顯甫), 초명은 인기(仁祺)이다. 고려중기 최고의 문벌귀족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의 6세손으로, 1201년(신종 4)에 태어났다. 아버지 이경(李儆)은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르렀던 관리였다. 열전에서는 그가 고종대에 급제하였다고 하였지만 확실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원의 자료인 「중당사기(中堂事記)」에서는 이장용이 18세에 장원급제하였다고 적었지만, 1218년(고종 5)의 과거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그 전후의 과거에서는 장원급제자가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대략적으로만 참고해야 할 듯하다.

청년 이장용의 관직 생활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열전을 통해 그가 서경사록(西京司錄), 교서랑 겸 직사관(校書郞 兼 直史館), 국자대사성 추밀원승지(國子大司成 樞密院承旨),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며 차근차근 승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자감 관련 관직과 국왕의 측근 업무를 담당하는 중추원 관직을 거쳐 1258년(고종 45)에는 58세의 나이로 정당문학까지 승진했던 것이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유능한 사람이었다. 열전에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읽었으며 음양(陰陽)·의학(醫學)·음악(音樂)·율학(律學)·역법(曆法)에도 통달하였다. 문장은 맑으면서도 깊고 풍부하였다. 또 불경을 좋아하여 일찍이 『선가종파도(禪家宗派圖)』를 저술하였고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를 다듬었다.’라고 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 그가 남긴 시와 글이 몇 편 전하여 그의 문장을 조금이나마 감상할 수 있다. 그는 훗날 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의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또 2000년대에 들어와 발굴된 『보한집(補閑集)』의 새 판본에서 그가 지은 발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최자(崔滋)가 『보한집』을 편찬할 때 이장용의 집에서 고려중기의 문인 정서(鄭敍)가 엮은 시화집을 얻어 참조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장용은 국자감시(國子監試)와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문인 혹은 문신으로서도 유능했지만, 그의 주된 무대는 외교였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관련된다. 이때는 대략 고려가 몽골군과 강동성(江東城) 전투에서 처음 만나고 갈등을 겪다가 긴 전쟁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장용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기록도 이와 관련하여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 시기 동안 이장용이 작성한 글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이는 1240년(고종 27) 6월에 몽골군의 지휘관에게 보내진 고려의 서신으로 추정된다. 몽골군이 요구한 여러 사항에 대하여 응하기 곤란하다는 거절의 서신이었으니, 작성에 많은 고심이 필요한 중요한 서신이었을 것이다. 이장용은 요구 사항을 모두 거절하면서도 몽골 장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많은 공을 들여 서신을 작성했다. 이 사안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장용의 설득이 통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견해가 있다. 화술에 능했던 이후 이장용의 활동상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높은 판단이라 보인다.

3 불안한 평화의 시대,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다

1259년(고종 46), 고려와 몽골은 드디어 긴 전쟁을 끝내고 화의를 맺었다. 고려는 몽골에 항복을 했으나, 당시 몽골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차기 칸이 되는 쿠빌라이로부터 비교적 좋은 조건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양국의 갈등 요소들이 존재했고, 겨우 찾아온 평화는 호수의 얇은 얼음처럼 위태로웠다. 이장용은 이 어려운 시기에 외교 일선에서 새 국왕 원종(元宗)을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1260년(원종 1), 이장용은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4월에 원종은 태자를 몽골에 보내 쿠빌라이의 아릭부케 평정을 축하하였다. 「중당사기」에는 당시 이장용이 태자를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양측은 말이 통하지 않아 글로 각종 문답을 주고받았는데, 이장용이 답변을 맡아서 했다고 한다. 송과의 왕래와 같은 민감한 문제부터 고려의 과거 시행이나 서적 보유 상황 등 비교적 사담에 가까운 주제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고려 태자의 이 사행은 쿠빌라이로부터 개경 환도를 고려측 상황에 맞게 처리하라는 좋은 답을 얻어왔다. 이장용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장용은 이후 수태위 감수국사 판호부사(守太尉 監修國史 判戶部事)의 지위를 더 받은 데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다시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太傅 判兵部事 太子太傅)가 더해졌다. 그에 대한 원종의 신임과 총애를 볼 수 있다.

1264년(원종 5) 5월, 고려 조정은 크게 술렁였다. 몽골에서 국왕 원종의 친조(親朝)를 요구해 온 것이다. 김준(金俊) 등 여러 재상들은 변고가 생길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장용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며, 친조를 해야 화친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이 견해를 따라 친조가 결정되었고, 이장용도 원종을 수행하였다. 다행히 이장용의 주장대로 이 친조는 무사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때 몽골에 독로화(禿魯花)로 보내져 있었던 왕족 영녕공(永寧公) 왕준 (王綧)이 도발적인 사안을 제기하였다. 고려에 약 4만의 병력이 있으니, 자신이 이를 징발하여 몽골로 데리고 오겠다고 한 것이다. 몽골의 승상이 이에 대해 묻자 이장용은 오랜 전쟁과 흉년으로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다시 이와 연관하여 고려의 호구를 묻자 역시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답을 피하였다. 이 곤란한 상황에서 이장용은 “제 말이 틀리면 목을 베십시오”라고 강하게 나가거나, 재상이 왜 호구의 수를 모르냐는 몽골의 승상에게 “승상께서는 창문의 문살 수를 아십니까?”라고 되물어 입을 막는 등 강단과 재치를 적절히 쓰며 상황을 무마해 나갔다.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의 여러 관리들이 이장용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감탄하여, ‘아만멸아리간(阿蠻滅兒里干)’ 즉 ‘화술의 달인’ 이재상(李宰相)이라 부르거나 ‘해동현인(海東賢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여러 현안들을 능수능란하게 막아낸 이장용에게 원종은 귀국 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경원군개국백(門下侍郞 同中書文下平章事 慶源郡開國伯)을 내리고 식읍 1,000호와 식실봉 100호를 주었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를 더하여 주었다.

3년 뒤, 다시 한 번 이장용의 외교 실력이 발휘되었다. 당시 쿠빌라이는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하여 일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는데, 이와 관련된 움직임은 원종과 이장용이 활동했던 12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쿠빌라이는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을 초유하고 항복시키려 하였다. 무려 여섯 차례나 파견된 사신단은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하였는데, 고려는 사신 파견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전달하곤 하였다. 사신 왕래는 물론이고, 이것이 결렬되어 몽골과 일본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고려가 입을 피해도 막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267년(원종 8) 8월, 쿠빌라이가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의 귀순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장용은 사신으로 온 흑적(黑的)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이 귀순을 해도 얻을 것이 없고, 혹 무례하게 나오면 오히려 몽골에 누가 될 것이니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고 설득하였다. 물론 이렇게 해서 중단될 상황은 아니었고 사신단은 몽골의 지시대로 파견되었으나, 이장용의 예상대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268년(원종 9) 3월, 쿠빌라이는 고려에 개경으로 빨리 출륙 환도할 것 등을 요구하며 김준(金俊)과 이장용(李藏用)에게 몽골로 와 보고하라고 하였다. 김준은 두려워하며 다시 섬으로 숨을 생각을 하였다. 이장용의 인생에서도 큰 위기였다.

그러나 이장용은 이를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몽골로 간 이장용은 쿠빌라이와 대면했다. 쿠빌라이는 그에게 군사 징발과 전함 건조에 대해 강하게 재촉하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몽골의 칸 쿠빌라이. 그의 앞에 불려나가 호된 질책을 들으며 요구를 받을 때, 움츠러들지 않고 제대로 답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장용은 쿠빌라이의 요구에 당연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말을 부드럽게 돌려 고려에 가해지는 압박을 최소한도로 줄이려 하였다. 상대의 요구에 대해 합리적으로 이쪽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거꾸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을 하며, 때로는 강단 있게 자신의 목을 걸겠다고 도박을 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쿠빌라이와 대면한 이장용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외교적 대화를 이어갔다. 특히 오랜 전쟁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군사가 없다는 말에 쿠빌라이가 “죽는 자만 오히려 있고 어찌 태어나는 자는 없겠는가? 너희 나라에도 부녀자가 있는데 어찌 태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너는 나이가 많아서 잘 아는 일일 터인데, 말이 어찌 〈이와 같이〉 망령스러운가?”라고 꾸짖자, “저희 나라에는 큰 성은을 입어 스스로 군대를 거두어 가신 이래로 태어나서 자란 이들이 있으나 모두 어리고 약하니 충군(充軍)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 부분에서 그가 왜 ‘화술의 달인’이라 불렸는지 공감이 된다. 쿠빌라이를 확신시키기 위해 이장용은 몽골의 관리를 동반하여 고려로 와 현황을 함께 조사하였고, 그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일본 원정을 앞두고 고려의 부담을 크게 줄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4 무신집권기의 그림자, 달인도 피하지 못하다

일생 동안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을 만날 때마다 요령 있는 화술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던 이장용. 그러나 일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암초를 만나게 된다. 1269년(원종 10) 6월, 무신집권자였던 임연이 자신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 국왕 원종을 폐위시킬 마음을 먹었다. 오랜 무신집권기 동안 여러 차례 벌어진 일이었다.

임연은 군사들을 모아둔 채 재상들을 불러 이야기를 꺼내며, 원종을 폐위시키고 나면 “왕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도(海島)로 쫓아내버리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재상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한 명씩 지목하여 말을 시키자, 유천우(兪千遇)가 용기 있게 반대 의견을 내었다. 하지만 이장용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막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원종이 새 국왕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택하자고 하였다. 그간 보았던 이장용의 스타일로 볼 때, 원종을 시해당하게 두거나 섬으로 귀양 가게 하는 것보다는, 양위라는 형식을 통해 좀 더 나은 처지에 있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임연은 그의 말을 따랐고, 원종은 양위한 뒤 태상왕으로 올려졌다. 새 왕이 즉위한 후 임연은 이장용의 좋은 계책에 감사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외교 활동 스타일, 즉 주어진 악조건 속에서 상대의 마음을 만족시켜주면서도 가장 피해가 덜 생길 길을 만들어 가는 스타일과 유사하다.

무신집권기에는 이렇듯 권력을 쥔 무신집정에 의해 국왕이 교체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마침 몽골에 가있던 세자가 쿠빌라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쿠빌라이는 자신이 책봉한 원종을 폐위시킨 임연에게 분노했다. 임연은 황급히 원종을 복위시키고 이장용을 몽골에 보내 상황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런데 몽골에 간 이장용은 오히려 쿠빌라이에게 임연의 원종 폐위에 대해 소상히 알렸다. 임연의 아들 임유간은 쿠빌라이가 캐묻자 이장용에게 폐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시도했으나, 쿠빌라이는 이장용의 말을 믿었다. 결국 임연 세력은 제거되고, 원종은 안전한 삶을 되찾았다.

원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 활동을 펼쳤던 이장용. 그는 아마도 폐위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원종의 목숨을 지키고 다시 안정적으로 왕위를 지킬 수 있도록 복잡한 행보를 보였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임연 세력이 제거되고 원종이 안정적으로 복위한 후, 이장용은 실각하게 되었다. 원종의 양위를 제안하였다는 이유였다. 원종 본인도 혹시 이장용을 의심하였던 것일까. 사실 1267년(원종 8)에 이장용이 흑적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 초유를 단념시키려 했을 때에도 원종은 그가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고 의심하고 불쾌해 하며 귀양을 보낸 적이 있었다. ‘화술의 달인’이라는 것은 어쩌면 양날의 칼일 수 있다. 기교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게 되는 여러 가지 태도가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다.

이장용은 1272년(원종 13)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의 72세. 전쟁 직후의 칼날 같은 외교전선 위에서 필사의 기교를 부리며 고려를 위해 노력했던 정치가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새 왕이 즉위한 1275년(충렬왕 1), 그에게 ‘문진(文眞)’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이 그나마 저세상의 그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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