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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

고대의 신비로운 이야기도 우리의 역사

1206년(희종 2) ~ 1289년(충렬왕 15)

일연 대표 이미지

일연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시대 배경과 일연의 출생

일연(一然, 1206~1289)은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그는 무신정권이 최충헌(崔忠獻)과 최우(崔瑀)의 집권으로 안정되어 가는 시기에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런데 13세기 초는 몽골이 정복 활동을 활발히 벌이며 세계 제국을 형성해가는 시기였다. 몽골의 고려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30여 년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굴복하고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때 불교계는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계속되던 교종(敎宗) 사원들의 항쟁이 진압되고, 선종(禪宗) 중심의 교단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또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고종 19)에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목판이 소실되자,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원에서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이 단행되었다. 이 때 제작된 것이 지금 전해지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이른바 ‘팔만대장경’이다.

일연은 1206년(희종 2)에 경주 인근의 장산[경산시](獐山) 삼성산(三聖山) 아래에서 태어났다. 삼성산은 원효(元曉)가 탄생한 곳으로, 삼성산이라는 이름 또한 훗날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 그리고 일연을 성인으로 추앙하여 붙여진 것이다. 실제 충숙왕대 일연이 국사로 책봉되자 장산군은 승격되어 현령관이 되었다. 일연의 속성은 김씨, 처음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그의 집안은 지방 향리층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일연의 수행 과정과 활동

일연은 9세에 출가하여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대웅(大雄) 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진전사는 신라 말에 선(禪)이 크게 확산될 때,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최초로 남종선(南宗禪)을 펼친 도의(道義) 선사가 경주에서 내려와 은거한 절이었다. 도의는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가운데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로 받들어졌으므로, 일연은 가지산파에 속하는 선승이 된 것이다. 그 뒤 일연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고, 일찍부터 선승들 사이에 뛰어난 인물로 이름이 났다.

1227년(고종 14) 22세에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 즉 장원으로 급제한 뒤, 경주 인근의 비슬산(琵瑟山) 보당암(寶幢庵)에 머물며 수행하였다. 몽골군의 침입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연은 비슬산의 여러 암자에 머물며 수행하였다. 이때 화엄경과 법화경, 밀교(密敎) 등 다양한 계통의 신앙도 경험하고, 문수보살을 신앙하며 그 주문을 염송하기도 하였다. 또 비슬산 묘문암(妙門庵)에 머물면서 ‘중생의 세계는 줄지도 않고, 부처의 세계는 늘지도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라는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하며 진리를 구하였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는 ‘삼계(三界)가 덧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대지가 티끌만큼의 막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연은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에 심취하였다.

참선 수행의 여가에는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학승들의 불교학 연구서들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유학과 도교 등 여러 사상 계통의 전적에도 통달하였다. 일연은 선승이면서도 다양한 불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학은 물론 유학과 제자백가까지 섭렵하였던 것이다. 1237년(고종 24)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고종 33)에는 선사(禪師)의 지위에 올랐다.

1249년(고종 36) 44세의 일연은 남해(南海)의 정림사(定林社)로 가서 10여 년을 머물렀다. 정림사는 정안(鄭晏)이 사재를 희사하여 설립한 절이다. 정안은 무신정변 이후에 성장한 가문 출신으로 집권자 최우와 가까운 관계였으나, 남해로 물러나 불교에 심취해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기원에서 시작된 재조대장경[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 판각 사업에 참여하고, 수선사(修禪社)의 2세 사주인 혜심(慧諶)과 깊이 교유하고 있었다. 혜심이 이끄는 수선사는 최우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정림사에 머물면서 일연은 정안을 통해 수선사와 교류하게 되었던 것 같다. 혜심의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비롯한 많은 저작에 접하고, 더욱 간화선에 심취하게 되었다. 일연은 『선문염송』을 계승하여 다시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을 엮었다. 51세에는 지리산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편집하여 몇 년 뒤에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중국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중심 사상인 오위설(五位說)의 내용을 다시 엮은 것이다.

3 원간섭기 일연의 활동

1259년(고종 46)에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뒤, 일연은 54세에 선종의 최고 승계인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1261년(원종 2)에는 원종[고려](元宗)의 명에 의해, 일연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주석하게 되고, 왕실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한 뒤, 이장용(李藏用), 박송비(朴松庇)와 같은 원종대 정권을 주도한 세력가들의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수선사를 계승한 선원사에 머물면서, 일연은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였음을 자처하며 활동하였다. 3년 뒤에는 왕에게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여러 번 청하여 운제산(雲梯山) 오어사(吾魚寺)로 내려갔다. 그가 있는 곳에는 배움을 청하는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1268년(원종 9)에는 왕명에 따라 개경 운해사(雲海寺)에서 선종, 교종의 이름난 승려들을 모아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가 열렸다. 낮에는 경전을 읽고 밤에는 그 뜻을 담론하는 법회에서, 일연은 모임을 주관하며 다른 승려들의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1274년(원종 15)에는 그동안 머물고 있던 비슬산 인홍사(仁弘寺)를 중수 확장하였는데, 원종이 ‘인흥사(仁興寺)’라는 이름을 지어서 내렸다. 또 비슬산 동쪽에 있는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쳤다. 1277년(충렬왕 3)부터는 청도(淸道)의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1278년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대연표[일연](歷代年表)』를 인흥사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 편의 토대가 되었다. 운문사에 머무는 동안, 일연은 본격적으로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수록하여 우리 역사의 시작을 중국과 같은 시기로 끌어올리고 고조선에서 삼한, 삼국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를 수립하였다. 또 불교 관련 사적을 널리 모으고 채록하여 이 땅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임을 드러내었다. 곧 우리 역사와 문화가 유구하고 우월하다는 인식과 불교 신앙으로 몽골 침입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삼국유사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의 성인들이 나라를 세울 때 신비스러운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하도낙서와 함께 한 복희와 여와에서, 삼황오제는 물론 한고조 유방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온 것은 괴이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앞선 시기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동시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다.

1281년(충렬왕 7)에 충렬왕(忠烈王)은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해 징발된 군병을 격려하고자 경주(慶州)에 행차하였는데, 일연을 불러 가까이 있게 하였다. 이때 일연은 여러 승려들이 뇌물을 바치고 높은 지위를 구하는 타락한 현실을 보았다. 이듬해 다시 충렬왕의 초청으로 대궐에 들어가 설법하고,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게 되었다. 1283년(충렬왕 9)에는 78세로 국존(國尊)에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다. 이때 국존이라고 한 것은 원나라가 국사(國師) 칭호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연의 입적한 뒤 세워진 비문에는 그를 ‘보각국사’라 하고 있다.

국사가 된 일연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정하여 내려와 머물게 되었는데, 충렬왕은 인각사를 중수하게 하고, 전답 100여 결을 하사하였다. 인각사에서 일연은 선종 승려들을 크게 모아서 법회를 열었다. 이때 많은 승려들이 그의 문도로 들어왔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를 들 수 있다. 또한 그의 비문 음기에서는 당시 재상급의 재가신도들의 이름도 확인한 수 있어 그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일연의 저술은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 『선문염송사원』, 『어록(語錄)』, 『게송잡저(偈頌雜著)』, 『조파도(祖波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등 다수이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뿐이다. 또한 『가락국기(駕洛國記)』도 삼국유사에 초록 형식으로 남겨 놓아 가야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서술하면서 신라의 향가 14수를 모아 놓았는데, 이는 우리나라 고대 시가의 한 원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화적으로는 물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일연은 1289년(충렬왕 15)에 인각사에서 84세로 입적하였다. 충렬왕은 시호를 보각(普覺), 탑명을 정조(靜照)라고 내렸다. 인각사에는 부도와 비가 건립되었다. 인각사보각국사비첩(普覺國師碑帖)의 비문은 민지(閔漬)가 지었고,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겼다. 이 때문에 후일 왕희지 글씨를 얻기 위한 탁본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보각국사비는 잘 보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탁본이 많이 남아 있어 후대에 탁본을 모아 인각사보각국사비첩(普覺國師碑帖)이 만들어져 그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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