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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靖宗]

거란과 화친을 맺어 고려의 평화를 얻다

1018년(현종 9) ~ 1046년(정종 12)

1 머리말

고려 10대 국왕인 정종(靖宗)은 현종(顯宗)과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덕종(德宗)의 친동생이며, 문종(文宗)의 이복형으로 1018년(현종 9) 8월 태어났고 이름은 형(亨)이다.

1022년(현종 13)에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해졌고, 1027년(현종 18)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에 임명되었다. 정종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강단이 있어서 사소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 1034년(덕종 3)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형 덕종(德宗)이 죽으면서 그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자, 같은 해 9월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2 팔관회를 정례화하다

정종은 즉위 한 뒤 1달 뒤인 1034년(정종 즉위년) 10월에는 서경(西京)에 대신을 파견하여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이틀 간 잔치를 열었으며, 11월에는 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했다. 팔관회는 원래는 불교의 여덟 계율을 지키는 행사였다. 하지만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려의 전통적인 신앙과 결합되면서, 태조(太祖) 때부터 토속신에게 제례를 행하는 날로 변형이 되었다. 고려는 이 날에 호국의 뜻을 새기고 복을 빌었는데, 대체로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개경에서는 11월 15일에 개최되었다.

팔관회는 성종(成宗)대부터 현종(顯宗)대에 다시 설치될 때까지 폐지되기도 하는 등 변동이 있었다. 정종은 이 팔관회를 정례화 했던 것이다. 팔관회를 개최한 정종은 위봉루(威鳳樓)에 나가서 여러 관리들을 위하여 주연을 베풀고 저녁에는 법왕사(法王寺)로 갔으며, 다음날에도 큰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감상하였다. 이 기간 동안 동경(東京)과 서경 그리고 동로(東路)와 북로(北路)의 병마사(兵馬使)와 4도호(四都護), 8목(牧)이 표문을 올려 축하를 했으며, 송나라 상인들과 동·서 여진과 그리고 제주도인 탐라국에서 그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이는 이 시기 팔관회가 단순히 불교의례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국제무역까지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음을 말해준다.

3 거란과의 화친을 택하다

정종대 대외관계는 앞선 덕종대의 거란관계가 연속되는 상황이었다. 덕종은 거란에 대하여 압록강 동쪽에 차지한 땅을 돌려주고 사로잡고 있는 사신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었는데, 거란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덕종은 외교관계를 끊고 전쟁 준비를 하는 등 강경대응을 펼친 바 있었다. 하지만 재위 4년 만에 덕종이 사망을 하였고, 거란과의 긴장 관계는 정종이 고스란히 물려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정종 즉위 초기의 양국 관계는 좋을 리가 없었다.

1035년(정종 원년)에 거란이 고려와 접경 지역에 위치한 내원성(來遠城)을 통해 흥화진(興化鎭)에 보낸 글에는 고려가 석성(石城)을 쌓아 왕래를 막거나 나무로 울타리를 세우는 행위를 하며 외교를 맺으려는 의지가 없다며 외교 단절의 책임을 고려에 전가하였다. 이에 고려 또한 답장을 보냈는데,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양국 외교의 파탄은 거란이 차지한 영토를 고려에 돌려주지 않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답장의 말미에 거란이 말한 것들은 농담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거란의 질책을 농담으로 일축해 버린 것이다.

거란이 보낸 공식문서를 농담이라고 한 것은 지금 봐도 매우 강한 불만의 표시였다.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러한 점은 이 답서를 보낸 이후인 1035년(정종 원년) 9월에 고려가 서북로의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쌓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거나, 1036년(정종 2) 7월에는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송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행을 파견하려 했던 사실 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의 거란에 대한 강경 대응은 1037년(정종 3)에 가면서 온건한 쪽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강경정책을 주도하던 왕가도(王可道)와 유소(柳韶) 등이 사망하고 대신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실권을 장악한 내부적 요인과 함께, 거란이 자국의 서북 지역에 있던 몽골 부족의 한 갈래인 조복(阻卜)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고려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고려는 거란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고 그 동안 사용하지 않던 거란 흥종(興宗)의 연호인 중희(重熙)를 사용하며 거란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송과 조복 등을 복속시켜 우위를 인정받은 거란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고려로 눈을 돌렸다. 물론 그렇다고 군사행동을 가하지는 못했다. 사실 오랜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데에 실패했던 거란으로서 이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신에 거란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지역에 소규모의 요새인 성보(城堡)를 더 쌓아 압박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고려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 복종을 얻어내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성보를 철거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거란은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성보를 쌓은 것이 아니라, 변경을 방비하고 농사를 짓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한 것임을 강조하며 고려와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후에는 양국 간에 더 이상 성보에 관련한 외교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거란이 1042년(정종 8) 3월에 관남(關南) 10성을 달라고 송에 요구하여, 송으로부터 돈과 폐물을 더 받아내는 등 동북아시아의 절대강자로 다시 부상한 탓이 컸다. 거란은 이 사실을 같은 해 11월에 고려에 알렸다. 당시 거란의 흥종은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낼 정도로 자신감이 흘러넘치던 시기였다.

국제정세가 거란을 중심으로 재편된 이상 고려도 더 이상 거란과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거란도 고려가 송이나 여진과 외교관계를 맺고 자국을 견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고려를 압박할 수는 없었다. 양국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 것이었다. 이제현(李齊賢)은 태조대부터 현종(顯宗)과 덕종에 이르는 시기의 대거란 강경정책이 우호를 유지하여 백성을 편히 쉬게 하자는 황보유의 등의 의논만 못하다고 하면서, 정종 3년에 고려가 최연하(崔延嘏)를 거란에 파견하고 4년에 거란 사신이 고려에 와 맹약을 다시 맺은 사실을 좋은 계책으로 평가한 바 있었다.

4 무비(武備)를 잊지 않다

거란과 우호관계를 다시 회복했지만, 정종은 군사적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040년(정종 6) 6월에 정종은 비록 사방이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각 지방에 사신을 보내 날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교습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1041년(정종 7) 8월에는 서북면병마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바다에 연해 있는 서북로 주진에 『김해병서(金海兵書)』를 각기 1본씩 주었다. 10월에는 서면병마도감사 박원작(朴元綽)이 제작해 바친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를 시험해보고 성능이 탁월하자 이를 동쪽과 서쪽의 변방에 위치한 진(鎭)에 비치하게 하였다.

또한 정종은 성을 쌓아 외적에 대한 방비를 하였다. 1039년(정종 5) 9월에는 정변진(靜邊鎭) 과 같은 해 11월에는 숙주(肅州)에 성을 쌓았고, 1041년(정종 7) 9월에는 영원진(寧遠)과 평로진(平虜鎭)에, 같은 해 12월에는 동로의 환가현(豢猳縣)에 성을 쌓았다. 1044년(정종 10) 10월에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그리고 원흥진(元興鎭)의 성들을 쌓아 11월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때 성을 쌓는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을 해, 모범으로 삼게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종이 국방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들이다 국무에 전념하던 정종은 1046년(정종 12) 4월 병에 걸렸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든 관리들이 정종의 회복을 바라며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는 사실을 보면, 매우 심각했던 듯하다. 병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고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종은 5월에 이복 동생 휘(徽, 문종)를 불러 국정을 맡기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능은 주릉(周陵)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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