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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曺敏修]

이인임의 친척,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제거되다

미상 ~ 1390년(공양왕 2)

조민수 대표 이미지

창녕 조민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민수(曺敏修, ?~1390)는 고려 말의 무신이다. 우왕(禑王) 대 권력자인 이인임(李仁任)의 친척이자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요동(遼東)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창왕(昌王) 옹립을 주도함으로써 이성계와 대립하여 결국 숙청되었다.

2 석연치 않게 승진을 거듭하다

조민수는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녹훈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1350년대에 중국에서는 몽골의 통치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해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라는 기치를 내건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빨간 두건을 맸다고 하여 홍건군(紅巾軍) 또는 홍건적이라고 불렸다. 강남 일대에서 흥기한 홍건적은 점점 세력을 키우며 북상하였고 홍건적의 한 갈래가 요양으로 진격하여 요동 지방을 휩쓸다가 1359년(공민왕 8) 겨울에 결국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고려로 침입하였다. 의주(義州)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정주(靜州), 인주(麟州)에 이어 서경(西京)까지 홍건적의 손에 넘어갔다. 공민왕(恭愍王)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한양(漢陽) 천도를 준비하는 한편 반격을 시작하였다. 곧 서경을 수복하였고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이 홍건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결국 1360년(공민왕 9) 2월에는 홍건적이 모두 물러갔다. 이 사건이 홍건적의 1차 침입이다.

조민수는 홍건적의 1차 침입 당시 순주부사(順州府使)로 있었는데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병사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증강하는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다. 순주는 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이다. 이후 공민왕 대 조민수의 행적은 거의 드러난 바가 없다. 열전에 따르면 거듭 승진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오르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고 하였으나 특별히 기록할 만한 업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민수의 빠른 승진은 공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권력자와의 유착 관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1372년(공민왕 21) 아들인 조취귀(曹取貴)가 장살되었다. 조취귀에게 장형이 가해진 표면적인 이유는 공민왕이 양릉(陽陵)을 배알하러 다녀올 때 어가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신돈(辛旽)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참소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신돈은 공민왕의 철저한 신임을 바탕으로 전권을 위임받아 1365년(공민왕 14)부터 고려의 국정을 주도해왔으나 너무 큰 권력을 손에 쥔 까닭에 점차 공민왕과의 관계가 벌어져 결국 1371년(공민왕 20) 7월에 실각하고 역모죄로 죽임을 당했다. 신돈이 숙청당할 때 조취귀나 조민수가 연루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들이 신돈의 당여(黨與)는 아니었으며 조취귀가 신돈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이인임의 인척으로 재상에 이르다

공민왕이 비명에 죽은 후 고려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가장 큰 문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모니노(牟尼奴), 즉 왕우(王禑)는 정통성에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돈이 숙청된 직후, 공민왕은 신돈의 여종이 자기 아들을 낳았다며 신돈의 집에서 아이를 한 명 데려왔다. 공민왕은 이 아이를 원자로 삼고자 했으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공민왕은 우를 후계자로 정식으로 책봉하지 못한 채 시해당했다.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충숙왕비(忠肅王妃) 명덕태후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종친 중 한 명을 택해서 왕위에 세울 것을 주장했다. 반면 이인임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우를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이인임 일파가 승리하여 우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한편, 이인임은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기 위해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무장세력과 연합하였다. 최영은 공민왕 사망 직전 제주(濟州)로 출정하였다. 최영이 제주 정벌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우왕이 즉위한 후였다. 최영은 우왕의 즉위를 인정하고 이인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인임은 우왕대 초에 자신을 비판하는 유신(儒臣),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권신(權臣) 등 정적을 차례차례 제거하였고 1380년(우왕 6)에 명덕태후가 사망하자 그를 더 이상 제어할 사람이 없어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다. 이후 1387년(우왕 13)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할 때까지 고려의 국정은 이인임과 그 일파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조민수는 이인임의 족당(族黨)으로 이인임과 함께 권세를 누렸다. 조민수의 외할아버지인 이만년(李萬年)과 이인임의 할아버지 이조년(李兆年)은 형제 사이로 조민수와 이인임은 6촌 형제가 된다. 조민수는 우왕 대 내내 별다른 업적을 세우지 못했음에도 수시중(守侍中)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최고 사령관 중 하나로 고려의 군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인임의 천거와 후원에 의한 것이었다.

우왕 초 조민수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엿볼만한 기록이 있었다. 1375년(우왕 1), 조민수는 경상도 일대에서 왜구와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 왜구가 김해부(金海府)에 침입하여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있었던 조민수가 출병하였으나 패전했고 이어서 대구현(大邱縣)에서 싸웠으나 또 패하여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다시 왜구가 배 수십 척을 이끌고 강을 따라 밀성(密城)을 공격하려 하자 조민수가 맞서 싸워 이번에는 왜구 수십 명을 죽였다. 우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민수에게 옷, 술, 말을 하사하자 조민수가 전(箋)을 올려 감사하였다. 우왕은 다시 이에 화답하는 교서(敎書)를 지어 조민수에게 보내도록 명하였다.

교서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은 김자수(金自粹)는 조민수는 김해와 대구에서 비겁하고 나약하게 패전하여 사졸을 많이 죽였으니 밀성에서 세운 작은 공로로는 죄를 덮을 수 없다고 하며 조민수에게는 기록할만한 공이 없으므로 교서를 작성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우왕은 크게 노하였고 김자수는 왕에게 간쟁(諫爭)할 권한이 있는 간관(諫官)이었음에도 왕의 말을 어겼다는 죄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다음 해인 1376년(우왕 2) 진주(晉州)에 침략한 왜구와 싸워 13명을 베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과연 조민수가 무장으로서 공을 얼마나 세웠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당시 왜구에 맞서 엄청난 전과를 세우고 있던 이성계와 비교한다면 더더욱 조민수의 능력에 의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조민수는 이인임의 친척이자 이인임 세력의 일원으로 순탄하게 승진하여 1382년(우왕 8)에는 수시중 , 1383년(우왕 9)에는 시중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인임 세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욕을 채웠다. 이인임의 토지와 노비는 온 나라에 두루 걸쳐 있었다고 하며 그가 임명한 장상(將相)은 이인임을 다투어 본받아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염흥방(廉興邦)과 임견미(林堅味)의 만행은 특히 심하여 우왕이 그들에게 불만을 품고 넌지시 표현할 정도였다. 결국 1387년(우왕 13) 12월에 염흥방이 밀직부사 조반(趙胖)을 반역으로 무고한 사건을 계기로 우왕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듬해 초, 우왕은 최영과 연합하여 염흥방과 임견미 세력을 모두 죽이고 숙청했다. 이때 이인임은 노환을 이유로 은퇴한 후였으나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국정을 농단해온 처지에 연루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염흥방, 임견미와는 달리 사형되지 않고 유배에 그쳤으니 이는 최영이 이인임을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조민수 역시 이인임 일파의 일원이었으나 숙청에 연루되지 않고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저 임견미와 염흥방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며 이전에 탈점했던 전민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며 몸을 사렸을 뿐이었다.

4 위화도회군 후 잘못된 결정으로 몰락하다

우왕 초, 고려는 외교적으로 몹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새로 건국한 명(明)이 몽골리아 고원으로 후퇴한 북원(北元) 및 요동 일대에 잔존한 몽골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려는 처음에는 친명정책을 펼쳤으나 명이 요동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고려를 압박하자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더욱이 공민왕 사망 직전 있었던 ‘명사(明使) 살해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명 사이의 관계는 크게 경색되었고 명은 우왕을 책봉해달라는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는 명에 지속해서 사신을 파견하는 동시에 북원과의 외교를 재개했다. 명은 고려가 북원과 동맹하여 명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번은 명의 정요위도사(定遼衛都事) 고가노(高家奴)가 북원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를 파견해 상인으로 가장하여 고려를 정탐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있었던 조민수는 이들이 정탐꾼인 것을 알아채고 “듣기에 황제가 사적인 무역을 엄금했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명령을 어기고 우리 강토를 소요케 하는가?”라고 하여 쫓아냈다. 명과 북원의 대립 구도 속에서 고려는 명과의 관계를 우선하면서도 안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1385년(우왕 11) 9월,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명이 우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했다.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조민수와 우현보(禹玄寶), 하륜(河崙)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책봉을 계기로 고려와 명 사이의 관계가 안정되나 싶었으나 좋은 분위기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1388년(우왕 14) 2월, 홍무제가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조(元朝)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라고 하며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고려는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철령위 설치가 불가함을 주장하는 한편 대응 방법을 둘러싸고 고려 조정은 둘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최고 집권자였던 최영은 요동 정벌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최영의 뜻에 따라 4월에 요동 정벌군이 출정에 나섰다. 최영은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었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사실 최영이 직접 출정하고자 계획했으나 우왕의 만류로 인해 평양(平壤)에 남게 되었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다. 이성계는 출정 직전까지 4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 공격에 반대하였으나 역시 최영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조민수와 이성계 휘하 요동 정벌군은 압록강에 이르러 위화도에 진을 치고 머무르며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다시금 요청하였다. 최영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회군을 결정하였다. 이때 조민수가 이성계가 휘하의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성계에게 가서 울면서 “공이 가시면 저희들은 어디로 갑니까?”고 했다.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했다. 바로 위화도회군이다.

최영은 회군 소식을 듣고 우왕과 함께 개경(開京)으로 후퇴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결국 패배하여 고봉현(高峯縣)으로 유배 갔다가 얼마 후에 처형당했다. 이제 정권은 위화도회군의 두 주역 조민수와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사실 두 주역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가 주도한 회군에 조민수가 참여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조민수는 회군 당시 이성계와 같은 지위에 있었기에 운 좋게도 일등공신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조민수는 새 왕을 옹립하는 문제로 짧았던 연합을 뒤로 하고 이성계 세력과 바로 결별했다. 회군할 때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종친 중 한 명을 다음 왕으로 옹립하고자 조민수에게 동의를 구했다. 조민수는 이에 동의하였으나 막상 새 왕을 정할 때가 되자 생각을 바꾸어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삼고자 계획을 꾸몄다. 왕창의 생모는 근비(謹妃) 이씨로 이인임의 외형제 이림(李琳)의 딸이었다. 곧 조민수의 친척이기도 한 것이다.

조민수는 혼자만의 뜻으로는 왕창을 왕으로 옹립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색(李穡)을 끌어들였다. 마침 이색도 왕창을 세우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결국, 6월 신해일에 공민왕비 정비(定妃)의 교지를 받들어 왕창을 국왕으로 세웠다. 이성계가 약속을 어긴 조민수를 힐난하자 조민수는 얼굴을 붉히며 이색의 핑계를 댔다. 반대로 훗날 이색은 창왕을 옹립한 죄로 국문을 당하자 조민수의 뜻에 따른 것뿐이라고 발뺌했다.

창왕 즉위 후 조민수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이인임을 복권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인임은 이미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는 이인임을 예장(禮葬)하고 추증해달라고 청했으나 아무도 이인임의 시호를 올리고자 하지 않았다. 창왕 옹립으로 인해 정권을 손에 쥔 조민수는 철저하게 이인임의 전철을 밟았다. 탐욕을 부려 전민을 탈점하고 사전을 개혁하려는 논의를 저지한 것이었다. 7월, 결국 조민수는 한 달 만에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결국 옛 정치로의 회귀를 꾀했던 조민수가 개혁을 원했던 이성계 세력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는 역사의 흐름상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11월, 유일한 지지세력을 잃은 창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위당했고 고려국왕위는 이성계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종친인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에게 돌아갔다. 조민수는 신씨를 왕위에 옹립한 죄로 거듭하여 탄핵을 당했고 1390년(공양왕 2) 유배지인 창녕(昌寧)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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