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조충

조충[趙冲]

중후한 인품, 몽골과 여진 장수를 감복시키다

1171년(명종 1) ~ 1220년(고종 7)

조충 대표 이미지

문정공조충지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충(趙冲)은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살았던 고려 시대의 정치가였다. 당대의 저명한 문신으로 재상까지 올랐고, 몽골의 대두가 일으킨 여파로 거란족들이 고려에 쳐들어오자 방어 책임을 맡아 공을 세웠다. 자는 담약(湛若)이었다.

2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며 정계에서 활동하다

조충은 명종(明宗)과 신종(神宗) 시대의 중신으로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던 조영인(趙永仁)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의종대의 재상 윤관(尹瓘)의 증손녀이자 윤언이(尹彦頤)의 손녀였다. 당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비극을 겪었다. 이 비극은 조충의 품성에 대한 첫 번째 일화를 낳았다. 조금 자란 어린 조충은 이 사실을 알고 ‘슬퍼하고 그리워함이 참으로 깊고, 효도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므로 집에서 이름을 효동(孝童)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조충은 처음에 음서로 간정도감판관(刊定都監判官)이 되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공부와 글짓기를 좋아했던 조충이 과거로 관리가 되는 길을 선택하기에 학문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태학(太學)에 들어가 좋은 성적을 올리며 상사(上舍)에 올랐고,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생몰년으로 보아, 이는 1190년(명종 20)의 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의 조충에 관한 기록은 대개 학문적인 능력과 외교 사행에서 보여준 예에 기반한 당당함, 그리고 조정 안팎에서 보인 정치가로서의 수완에 관한 내용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백가(百家)의 책을 두루 읽었고 특히 『시경(詩經)』과 『주역(周易)』을 중시했다고 한다. 또한 기억력도 뛰어나 옛 일을 잘 알았다고 하며, 이러한 공부를 토대로 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 翰林學士) 등을 역임하며 많은 전적(典籍)을 편찬하였다. 1209년(희종 5)에는 국자감시를 주관하였고, 1211년(희종 7)과 1219년(고종 6)에는 각각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 시험을 관장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글을 지었을 것이나, 아쉽게도 『동문선(東文選)』에 그가 지은 시와 시책문(諡冊文) 등 네 편의 글이 전할 뿐이다.

한편, 묘지명에는 그가 1196년(명종 26)에 금에 사신으로 갔던 때의 일화가 전한다. 당시 고려는 금에 사대(事大)를 하고 있었다. 즉 천자(天子)의 나라에 제후의 사신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의전을 알려주던 금 관리의 지시가 조충의 마음에 걸렸다. 황제 앞에서 “국왕 신 아무개의 사절입니다”라고 아뢰라고 했던 것이다. 조충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을 섬기는 예는 같은데, 어떻게 신하가 자기 임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느냐고 거부하였다. 금 관리는 이것이 관행이니 따르라고 하였으나 조충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조충의 뜻대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명종은 사신단이 돌아온 후 이를 듣고 크게 칭찬하며 상을 내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습은 유능한 문신의 활동상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무신집권기였다. 무신집권기에는 한 사람이 문신직과 무신직을 겸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런 사례가 고려 전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조충도 1216년(고종 3)에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 상장군(樞密副使 翰林學士承旨 上將軍)으로 승진하여 문무 관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은 무신집권기가 시작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러, 문신이 상장군을 겸직하는 일은 오래 전에 폐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충은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다 하여 특별히 이 관직들을 제수받았다. 그가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이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묘지명에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보다 조금 자세한 기록이 전한다.

1208년(희종 4), 조충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부임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으나, ‘폐단을 고치고 이익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막힘없이 판결하여 장수와 서리들의 신임을 깊이 얻었다’라고 한다. 이후 조충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앞서 언급한 국자감시와 과거 주관 등의 문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1214년(고종 1)에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부임하였다. 이때에도 동북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임무를 잘 수행하였고, 그 공으로 은청광록대부 부추밀사 이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副樞密使 吏部尙書 上將軍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묘지명에 실려 있다.

문무를 겸비하고 양쪽의 관직을 모두 보유했다고 해도, 평화로운 시대에는 현실적으로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충이 상장군을 겸하게 되었던 바로 그 해, 고려는 커다란 전운에 휩싸였다. 조충의 나이 46세 때였다. 거란과 여진, 몽골이라는 북방 세력들의 군대가 한꺼번에 고려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고려에는 비상이 걸렸다.

3 전장을 누비며 몽골 장수와 의형제를 맺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는 13세기 초반 몽골 초원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던 몽골족의 대두에서 촉발된 사태였다. 한국사에서는 이 사건을 ‘강동성 전투’ 혹은 ‘거란 유종(遺種)의 침입’이라고 부르며, 해당 항목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몽골이 세력을 떨치며 금을 공략하자, 금에 의해 멸망 당했던 옛 거란의 후손들이 금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 뒤 거란 세력의 내분 및 금 장수의 반란과 동진(東眞) 건국 등이 얽히고설키어, 요동 일대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몽골군과 금 군대에 의해 몰리던 거란족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는 선택을 하였다. 1216년(고종 3) 8월의 일이었다. 조충의 삶도 가장 격렬한 순간을 맞이하였다.

고려를 침공한 거란군은 북방 각지를 약탈하며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고려는 삼군(三軍)을 출동시켜 9월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거란군의 후속 부대가 밀고 내려왔다. 조정은 10월에 정숙첨(鄭叔瞻)을 원수로, 조충을 부원수로 삼아 군을 보강하고 12월에 출정시켰다. 하지만 당시의 무신집권자였던 최충헌은 자신을 지킬 병력을 보강하는 데에 더 열중하였고, 병사들의 처지는 매우 열악했다. ‘당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門客)으로 삼았고, 관군은 모두 노약자인 데다가 여윈 군졸이었다’는 표현이 당시의 실정을 잘 보여준다.

1217년(고종 4)에도 각지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투가 이어졌다. 조충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3월에 방심한 순간에 거란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고, 거란군이 개경 코앞까지 진격하였다. 기세가 오른 거란군은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까지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조충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국왕 고종은 그를 계속 신뢰하였고, 계속 전장에서 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10월에 그가 새로 남하한 여진족 황기자군(黃旗子軍)을 격파하자 고종은 옛 지위를 다시 내려주었다. 황기자군은 금 군과 싸우던 반란군이었다.

1218년(고종 5) 7월, 조충은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임명되었다. 9월에 출병한 조충은 거란군을 격파하며 성주(成州)까지 올라갔다. 수만의 거란군이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은 이를 격파하였고, 거란군은 강동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거란군을 토벌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걸고 몽골과 동진(東眞)의 병력 3만이 강동성 앞으로 진격해 와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또 전투가 끝난 뒤에는 양국이 형제 관계를 맺으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왔다는 말을 전하였다. 고려와 몽골, 여진, 거란의 군대가 고려 땅에서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골이 매우 흉악하다 하여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고려군의 사령관으로서 일촉즉발의 전장을 바라보는 조충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몽골군의 등장과 형제 관계 요구에 고려 조정은 우왕좌왕하였다. 조충은 현장에서 이들을 잘 달래고 우호를 다지며 상황에 대처해 나갔다. 고려 조정에도 이들의 말을 신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전하였다. 조충의 중재, 그리고 그와 함께 고려군을 이끌던 김취려(金就礪)의 배포와 활약 덕분에 몽골군의 지휘관 합진(呤眞)은 우호적인 자세로 나왔다. 합진과 조충, 김취려는 형-동생 관계를 맺을 정도로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농성하던 거란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당시 동진군을 이끌고 왔던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조충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아, 고려 사람에게 “그대 나라의 원수는 뛰어나게 훌륭한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 나라에 이런 원수가 있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조충. 그러나 그는 최충헌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게 되었다. 최충헌은 혹시 그가 군을 이끌고 자신에게 적대할까 우려하여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또한 그의 공을 시기하여 개선장수를 맞이하는 환영 의례조차 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무신집권자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고 돌아오면서 이런 대접을 받았던 조충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다행히 조충이 돌아와서 곤욕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 判禮部事)에 임명되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지공거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병부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兵部事)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다. 하지만 ‘개선하여 돌아온 이래 ▨▨▨▨▨ 떨어진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샘을 파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독락원(獨樂園)이라 이름지었다.’라는 묘지명의 표현은, 그가 최충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지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닐까. 이듬해에 그는 불과 50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조충은 훗날 고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묘지명과 열전에 담긴 그에 대한 묘사는 흠잡을 데 없이 이상적인 온후하고 유능한 정치가의 모습이다. 거친 몽골과 여진의 장수들마저 조충을 존경했다는 것을 보면, 실제 그의 품성도 상당 부분 이에 부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무신집권기가 아닌 다른 시대에 태어나 그 능력을 좀 더 마음껏 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