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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

4명의 왕을 쥐락펴락 한 절대 권력자

1149년(의종 3) ~ 1219년(고종 6)

최충헌 대표 이미지

최충헌 묘지명 탁본

e뮤지엄(국립제주박물관)

1 개요

최충헌(崔忠獻)은 1149년(의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생존했던 무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이후 4대 60년 동안 이어진 최씨 무신집권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동안 집권하면서 네 명의 국왕을 갈아치웠다. 스스로 중서령(中書令)이라는 고려 최고위의 관직과 진강공(晉康公)이라는 최고위 작위까지 취하였고, 자신의 거처인 흥덕궁(興德宮)을 왕궁에 못지않은 규모로 꾸미고서 거기에 진강부(晉康府)라는 관부를 개설하여 정사를 오로지하였으며, 진주(晋州)를 식읍으로 차지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국왕을 능가하는 권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그의 사후에는 그 지위가 최우(崔瑀), 최항[중기](崔沆), 최의(崔竩) 등 그의 가문으로 이어졌다. 여기서는 최충헌이 집권에 이르기까지의 행적과 집권 이후의 정치상황을 살펴보고, 그가 누렸던 권세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2 야심을 숨기고 집권을 기다리며

최충헌은 1149년(의종 3)에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장군을 지낸 최원호(崔元浩)였고, 어머니는 역시 상장군을 지낸 유정선(柳挺先)의 딸이었다. 조부 정현(貞現)과 증조부 주행(周幸) 역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최충헌이 처음 임명된 관직은 양온령(良醞令), 즉 왕실이나 관청에 술을 제조해서 공급하는 양온서의 8품직이었다. 한동안 하위관직을 전전하였는데,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난 뒤에는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고자 스스로 다짐하였음에도 서리직에 머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관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중앙정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174년(명종 4)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어 공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원수 기탁성(奇卓誠)에 발탁되어 선봉에서 공을 세운 후 개선하여 거듭 승진하여 장군직에 올랐다. 이후로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의민(李義旼)의 집권기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가 권신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계기로 여러 해 동안 앞길이 막혔다고 한다.

아마도 경주(慶州) 출신으로서 이 지역에 깊은 연고를 가지고 있던 집정자 이의민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에 가득찼던 최충헌은 40대 후반이 되도록 그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3 비둘기에서 비롯된 정변

최충헌이 48세가 되던 해인 1196년(명종 26),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엉뚱한 곳에서 마련되었다. 그의 동생 최충수(崔忠粹)가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李至榮)이 빼앗아 가버리는 일이 있었다. 성격이 사나웠던 최충수는 곧바로 이지영의 집을 찾아가 비둘기를 돌려달라며 거칠게 대들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왔다. 최충수는 곧바로 형을 찾아가 이의민과 그의 세 아들을 제거할 뜻을 표했고, 곤란해 하던 최충헌도 결국 이에 동의하였다.

당시는 이의민이 집권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그와 아들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인심을 잃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그의 두 아들 이지영, 이지광(李至光)이 더욱 심하여 세상에서는 그들을 쌍도자(雙刀子)라고 부르며 미워할 정도였다.

거사일은 그해 4월 9일이었다. 이날은 국왕이 개경 인근의 사찰인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의민은 행차를 따르지 않고, 경남 합천(陜川)의 미타산(彌陀山)에 마련된 자신의 별장으로 갔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최충헌 형제는 외조카인 박진재(朴晉材), 일족인 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그곳에서 이의민의 목을 베었다. 최충헌 일행은 곧바로 개경으로 돌아와 이의민의 잔당을 제거하고 국왕에게 이를 승인받았다. 그리고는 잠재적으로 그에게 반항할 위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권절평(權節平), 권준(權準) 부자, 손석(孫碩), 손홍윤(孫洪胤) 부자, 길인(吉仁), 이경유(李景儒), 권윤(權允), 유삼백(柳森栢), 최혁윤(崔赫尹), 주광미(周光美), 김유신(金愈信), 권연(權衍) 등 수십 명의 대신과 국왕 측근의 인물들까지 살해하거나 섬으로 유배보내었다.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국왕의 왕명을 전달하는 좌승선(정3품),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지어사대사(종4품) 등의 관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는 이듬해에서야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다른 무신집정자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최고위 관직과 최고위의 공신위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4 네 명의 왕을 갈아치우다

비록 차지한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권력은 오로지 최충헌의 몫이었다. 그의 권력은 집권 20여 년 동안 다섯 명의 국왕을 거치면서, 그 중 두 명을 스스로 갈아치우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첫 번째 희생양은 명종이었다. 명종은 최충헌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적극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이 기거하고 있던 수창궁(壽昌宮)이 반쿠데타의 거점이 되었던 데서도 이를 엿보인다. 이에 최충헌은 정변 이듬해인 1197년(명종 27)에 명종을 폐위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한 명분은 없었다. 함께 논의했던 최충수의 말을 빌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임금은 왕위에 있은 지 28년이나 되어 늙은 데다 일에 염증을 내고 있다. 또 소군(小君)들이 항상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그의 은혜와 위엄을 도용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다. 임금도 소인배들을 총애해 금과 비단을 함부로 하사했기에 국고가 텅 비어 신료들과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태자 왕숙(王璹)은 궁비(宮婢)들을 가까이 해 아들 아홉 명을 낳았는데 각각 소군(小君)에게 보내어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게 했다. 게다가 성품도 어리석고 유약하니 태자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명분이라고는 왕이 늙고 일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것이 다였는데, 그럼에도 큰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재위 30년에 가까운 국왕을 갈아치웠으니, 최충헌의 권세를 알 만하다. 이때 최충헌은 병력을 동원해서 다섯으로 나누어 개경 시내 전역에 배치하고는, 두경승(杜景升), 유득의(柳得義) 등 조정의 중신들을 멀리 유배보내고는 명종을 폐위하였다. 대궐에 수하를 들여보내 왕을 핍박해서 홀로 성문을 나오게 하여 창락궁(昌樂宮)에 감금하였고, 태자와 태자비 역시 비를 무릅쓰고 역마에 태워 강화도로 내쫓았다고 한다.

명종은 창락궁에 유폐되고서 5년 후인 1202년(신종(神宗) 5) 훙서하였다. 애초에 최충수는 현종(顯宗)의 6대손인 사공(司空) 왕진(王縝)을 다음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했는데, 그가 왕진의 여종을 총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은 인종(仁宗)의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의종과 명종의 전례에 따라 형에서 동생에게 왕위를 전하는 모양새를 취하고자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하여 왕민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고려의 20대 임금인 신종(神宗)이다. 즉위 당시 그의 나이가 54세였다.

국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마실 물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민간에 왕이 다래정(炟艾井)의 물을 마시면 환관들이 권력을 잡는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최충헌은 그 우물을 허물고 광명사(廣明寺)의 우물에서 나는 물을 왕이 마시게 했을 정도였다.

신종은 약 7년간 왕위를 지키다가 훙서하였다. 다음 왕으로는 신종의 아들인 태자가 선택되었다. 신종은 돌아가기 직전 최충헌에게 왕위를 태자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튿날 최충헌은 이 문제를 그의 사저에서 최선(崔詵), 기홍수(奇洪壽) 등과 은밀히 논의하여 처리하였다. 국왕위 계승 역시 최충헌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희종(熙宗)이 즉위하였다. 『고려사』 신종 세가의 끝부분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그의 치세를 논평하였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이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 관직을 두고 없애는 것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왕은 다만 빈 껍데기를 가지고서 신민들 위에 있었으니 꼭두각시와 같았다. 슬프도다.”

왕위에 오를 때 24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희종도 허수아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차례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1211년(희종 7) 12월 22일, 최충헌은 인사 문제로 수창궁을 찾아가 국왕을 알현하였다. 왕이 안으로 들어가고, 환관이 나와서 최충헌의 수행자들을 유인해낸 뒤 갑자기 승려와 속인 10여 명이 병기를 가지고 덤벼들어 그를 공격했다. 최충헌은 “주상께서는 신을 구해주소서”라고 외쳤으나 희종은 문을 닫아 걸고 받아주지 않았다. 최충헌은 지주사 방의 장지 사이에 숨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 사이 밖에 있던 그의 친족인 김약진(金躍珍)과 사돈 정숙첨(鄭叔瞻) 등이 그를 구해내었고, 신선주(申宣冑), 기윤위(奇允偉) 등이 들어와 승려들을 처단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최충헌은 사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 일은 내시였던 왕준명(王濬明) 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를 외면한 국왕 희종 역시도 무사하지 못했다. 최충헌은 두 번째로 국왕을 폐위시켜 강화도(江華島)로 보냈다가 얼마 후 자연도(紫燕島)로 옮겼으며, 태자 왕지(王祉)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도 모두 추방하였다.

희종이 폐위된 그날로 최충헌은 한남공(漢南公) 왕정(王貞)을 왕위에 앉혔으니, 그가 22대 강종(康宗)이다. 그는 다름 아닌 명종의 태자로, 명종이 폐위될 때 함께 쫓겨났던 인물이었다. 이때 이미 환갑이 다 된 강종은 1년 8개월 동안 왕위에 있다가 병으로 곧 훙서하였다. 강종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왕질(王晊)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23대 고종[고려](高宗)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5 끊이지 않는 내우외환

최충헌의 권력이 유례없는 것이었던 만큼 그를 노리는 반역도 끊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제거되었던 것은 그의 친동생인 최충수였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함께 권세를 장악했던 형제였으나 최고의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즉위시킨 직후 최충수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자 하였다. 최충헌은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한 나라를 휘어잡고 있으나 가계가 본래 한미하니 만약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는다면 비난거리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동생을 만류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둘은 각각 1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개경 시내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끝내 이기지 못한 최충수는 “형이 임진강(臨津江) 이북을 차지한다면 나는 임진강 이남을 가지겠다”라며 파주(坡州) 일대까지 피하였으나, 추격군에 의해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최충수가 제거된 뒤 다음 화살은 그의 외조카인 박진재에게 향했다. 이의민을 제거한 직후에는 정7품의 별장이었던 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종3품 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라 최충헌과 거의 맞먹는 수준의 문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진재의 문객 가운데 하나가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는 김준거(金俊琚)의 모의에 가담하는 일도 있었고, 박진재가 외삼촌인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익명의 방문이 광화문에 나붙기도 하였다. 결국 1207년(희종 3)에 최충헌은 박진재를 자신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리고는 백령도(白翎島)로 추방해버렸다.

정적들은 제거하였으나 안팎의 반란은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것이었다. 1198년(신종 원년)에는 그의 사노 만적(萬積)이 관노와 사노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만적이 했던 말은 유명하다.

“국가에서 경인년(1170년, 의종 24년)과 김보당의 난(金甫當-亂) 이후로 천예들이 높은 관직을 많이 차지했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1203년(신종 6)에도 나무를 하러 갔던 가노들이 교외에서 전투 연습을 하다가 적발되어 대거 처형된 일도 있었고, 이듬해에도 30여 명의 사람들이 최충헌 암살을 모의하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1209년(희종 5)에는 청교역(靑郊驛)의 역리(驛吏) 세 사람이 최충헌 부자를 암살하려고, 공문을 위조해 여러 사원의 승려들을 불러 모으려다가 사전에 들통 나기도 하였다. 1217년(고종 4)에는 고려를 침공한 거란군이 육박해 오자 흥왕사(興王寺),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 등의 승려들이 종군하였다가 최충헌을 죽이고자 군사행동을 하였으나 실패하는 일도 있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처형당한 승려가 8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방에서의 민란도 줄을 이었다. 1199년(신종 2)에는 명주(溟州)에서 반란이 일어나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도 다시 민란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신종 3년에는 밀양(密陽)의 관노 50여 명이 관아의 은그릇을 훔쳐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반란세력에 가담하는 일도 있었고, 최충헌의 식읍인 진주(晋州)에서도 노비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당시 진주의 향리였던 정방의(鄭方義)라는 인물이 배후에 있었는데, 그 무리가 죽인 것이 6천 4백 명에 달한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경상도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 세력들은 경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 신라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하였다가 결국 최충헌이 토벌군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편 후에야 가라앉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제 정세에도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1206년(희종 2)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일이 발생한 해인데, 바로 몽골 초원에서 칭기스칸이 흩어져있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제국을 세운 것이다. 몽골세력은 곧바로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고, 그 여파는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멸망된 뒤 그 치하에서 살던 거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은 몽골군에게 공격을 당하여 한반도로 피신하였다. 즉, 당시 금산왕자(金山王子),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해왔던 것이다. 이때 거란군은 개경의 선의문(宣義門)까지 추적해 와서 황교(黃橋)를 불태우고 돌아갔으나, 고려 조정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6 찬란한 부와 권력과 영예

최충헌의 묘지명에 기록된 그의 공신호는 익성정국(翊聖靖國)으로 시작하여 촉유정원(燭幽定遠)에 이르기까지 총 94자에 달한다. 그밖에도 그의 관함으로 문산계로는 정1품의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특진금자광록대부(特進金紫光祿大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훈직으로도 최고위인 상주국(上柱國), 관직으로도 더없이 높은 벼슬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에, 식읍 1만 호, 식실봉 3천 호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작위로서도 공후백자남 다섯 단계 중에 최고위인 진강공(晉康公)을 칭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긴 공신호와 가장 높은 문산계, 관직, 작위 등을 영위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최충헌은 생전에 일신에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부와 권력을 말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조정의 인사권을 완전히 독점하여, 최충헌이 사저에 머물면서 내시(內侍) 노관(盧琯)과 함께 문무관의 임면을 결정하여 왕에게 아뢰면 왕은 머리를 끄떡이고, 이부와 병부의 장관들도 정당(政堂)에 앉아서 단지 문건만 훑어 볼 따름이었으며, 좌우 측근이 부탁한 자나 뇌물을 바치고 자기에게 아부한 자는 모조리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국왕의 자리도 거리낄 것 없이 갈아치울 정도였으니, 왕들 역시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희종은 최충헌이 자신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각별히 우대했다. 그를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으며, 왕실이 소유하여 경영하던 토지인 내장전(內莊田) 1백 결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처음에는 진강후(晋康侯), 나중에는 진강공(晋康公)으로 책봉하고 부(府)를 세워 관리를 두게 할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책봉을 받던 날을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치장에 쓰인 꽃과 과일, 음악과 가무의 성대함은 이 땅이 생긴 이래 신하의 집에서는 전에 없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기도 하였다. 1209년(희종 5)에 그가 집을 지을 때에는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힘닿는 대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는데, 그 집터가 몇 리에 걸치게 되어 대궐과 비슷한 규모였다고 한다. 또한 공사 때에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몰래 붙잡아 오색(五色) 옷을 입혀서 네 모퉁이에 묻어 토목 공사의 해로운 기운을 물리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최충헌의 권력은 무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항상 대규모의 호위병들을 이끌고 다녔다. 당시의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의 문객이 되었던 것은 관군의 힘을 약화시켰고, 이는 거란군이 침입해왔을 때에 적절히 방어해내지 못한 데에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최충헌이 가병(家兵)을 사열하면, 좌경리(左梗里)에서 우경리(右梗里)에 이르기까지 몇 겹으로 편성된 부대의 길이가 2~3리까지 이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최충헌의 영예는 말년과 죽음까지도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관직에서 은퇴하게 되는 70세가 되어서도 그는 국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아 그대로 지위를 유지하였고, 죽기 직전에는 왕씨 성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의방부터 이의민까지 앞선 무신 집정자들이 제 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최충헌은 71세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1219년(고종 6)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에 백관들이 모두 흰 상복을 입고 참석하였으며, 이때에 쓰인 기물들은 국왕의 장례와도 비슷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집권하면서 탄탄하게 다져놓은 권력의 기반은 그의 아들인 최우(崔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서는 더없는 부와 권력, 영예를 누렸지만 죽은 후 최충헌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매우 준엄했다. 『고려사절요』의 찬자는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록 뒤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최충헌은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하였으며, 심지어는 두 왕을 내쫓고 조신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 크나큰 악이 하늘에까지 뻗쳤는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방안에서 죽었으니, 천도(天道)를 알 수 없음이 이와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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