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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忠肅王]

고려 국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다

1294년(충렬왕 20) ~ 1339년(충숙왕 복위7)

1 개요

충숙왕(忠肅王)은 제27대 고려 국왕으로서 원(元) 제국의 힘이 고려의 내정 깊숙이 침투하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아버지 충선왕(忠宣王)은 적극적으로 원 황실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여 자신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이를 토대로 자신과 고려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 대가가 있는 법이다. 충숙왕은 그 대가를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원 황실에서 권력의 향방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따라 고려 국왕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충숙왕은 아버지·사촌형제·아들과의 연이은 권력다툼, 원에서의 장기간 구류 등 일반적인 국왕이라면 경험하기 힘들 시련을 연속적으로 경험하였다. 이로써 천성적으로 강건하고 총명하였다고 평가받던 그는 점차 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무기력한 삶을 이어갔으며 끝내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가족관계

충숙왕의 이름은 도(燾), 초명은 의효(宜孝)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라트나시리[阿剌訥忒失里]이다. 충렬왕(忠烈王) 20년인 1294년에 충선왕과 의비(懿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의비는 예쉬진[也速眞]이라는 이름을 가진 원 여성으로, 원에서 충선왕을 만나 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 외에 출신성분을 알려줄만한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원 황실의 여성에게는 ‘공주’라는 존칭이 붙는데, 그녀는 ‘공주’로 기록되지 못한 것을 볼 때 원 황실 출신은 아니었던 듯하다.

충숙왕의 후비(后妃)는 총 5명이다. 우선 이례적으로 충숙왕은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경화공주(慶華公主) 등 세 명의 원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원 황실과의 정략결혼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앗다. 그가 세 명의 공주와 혼인을 했던 것은 중혼(重婚)이 아니라, 배우자로 맞이한 공주가 계속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원 공주의 소생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였던 충숙왕은 아내로 맞아들인 공주들이 차례대로 요절할 때마다 새로운 혼인대상을 물색하며 원 부마로서의 지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충숙왕은 이 가운데 조국장공주와의 사이에서 차남 용산원자(龍山元子)를 얻었다. 다음으로 그는 고려 여성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와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특히 명덕태후에 대한 은애가 지극하여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장남 충혜왕(忠惠王)과 3남 공민왕(恭愍王)을 얻었다.

3 충선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즉위초년

후궁 소생이자 차남이었던 충숙왕이 고려 국왕으로 즉위한 일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본래 충숙왕은 친형인 왕감(王鑑)에게 밀려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충선왕과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왕감이 처형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세자의 부재로 인해 그는 유력한 왕위 계승후보가 되었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선양(禪讓) 받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선양’이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침으로써 즉위 초년의 충숙왕은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였다. 애초에 충선왕은 본인의 의지로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 아니었다. 원 무종(武宗)을 옹립한 공으로 심왕(瀋王)에 책봉되었던 충선왕은 고려 국왕이 된 이후에도 심왕 지위를 포기하지 않은 채 원에 체류하며 원 황실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데에만 주력하였는데, 원에서 복수의 왕위를 가진 것에 대해 문제 삼고 고려로 귀국시키려 하자 궁여지책으로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충선왕은 충숙왕의 실권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로 삼았다. 또한 전지(傳旨)를 활용하여 고려의 중요한 사안들을 직접 처결하였고, 충숙왕의 측근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4 고려 국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사투

충선왕 못지않게 충숙왕의 자리를 위협한 존재는 사촌형제인 왕고였다. 왕고는 충숙왕 3년인 1316년에 충선왕으로부터 심왕의 지위를 물려받고 충숙왕보다도 일찍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다. 그는 임바얀투구스[任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충선왕이 토번(吐藩)에 유배되자 본격적으로 충숙왕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충숙왕은 충선왕의 그늘을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고자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배정지(裵廷芝) 등 충선왕의 측근들을 축출하던 중이었다. 이 기회를 노린 왕고는 권한공·채하중(蔡河中)·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과 같은 충선왕의 측근들을 자신의 주변에 결집시켜 세력을 키웠으며 1321년(충숙왕 8)에는 원 황제에게 충숙왕을 참소해 그를 원에 구류시켰다. 나아가 충숙왕이 구류된 사이에 권한공과 채홍철을 고려로 파견하여 자신을 고려 국왕으로 삼도록 원 조정에 청원할 것을 백관들에게 강요하였다.

복국장공주의 사망으로 부마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더욱이 사망 원인에 대한 문책까지 받고 있었던 충숙왕에게 이러한 왕고의 행동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윤선좌(尹宣佐)와 김륜(金倫)을 필두로 고려의 대간(臺諫) 및 사한(史翰)이 강력하게 반발한 덕분에 심왕을 옹립하기 위한 움직임은 좌절되었다. 이에 심왕을 지지하던 일부 세력은 고려를 원의 지방 행정단위로 편입시키자는 주장까지 펼쳤다. 고려 국왕의 자리를 두고 벌어졌던 권력다툼이 어느덧 고려의 국체(國體)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논의는 원 조정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고려에서도 이제현(李齊賢)이 간절한 청원을 올리는 등의 노력을 편 끝에 중단되었으나, 향후 고려의 존망이 다시 도마에 오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게 되었다.

5 대를 이은 권력다툼과 그 상흔

장장 3년 동안 원에 구류되었던 충숙왕은 1324년(충숙왕 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귀국을 허락받는다. 같은 해에 충숙왕은 조국장공주와 재혼하여 원 부마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이듬해인 1325년(충숙왕 12)에 고려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나긴 권력다툼으로 지쳐버린 충숙왕은 제대로 된 정치활동을 시작할 수 없었다. 여전히 심왕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원에 머물며 그를 참소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충숙왕의 왕위 유지를 강력하게 지원할만한 측근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였다. 이에 충숙왕은 심왕에게 왕위를 선양하려는 마음까지 먹었다가 한종유(韓宗愈)의 만류로 뜻을 접기도 하였다.

1330년(충숙왕 17)부터는 설상가상으로 아들 충혜왕과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정치활동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은 김지경(金之鏡)과 같은 일부 신하들의 간계에 넘어가 충혜왕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측근들을 축출하고 용산원자까지 위협하자 본격적으로 충혜왕과 충돌하였다. 충숙왕의 분노는 명덕태후에게까지 미쳐서 그녀를 시골에 유폐하고 아들과의 만남을 금할 정도였다. 결국 원 조정의 정세 변화와 맞물려 충혜왕이 폐위되자 충숙왕은 고려 국왕으로 복위하여 윤석(尹碩)·김지경·고용현(高用賢) 등 충혜왕의 측근을 축출한다. 부자간의 권력다툼이 그와 충혜왕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된 것이다.

아버지·사촌형제에 이어 아들과도 권력을 두고 다투어야만 했던 충숙왕은 복위 후 은둔생활을 이어가다 복위 8년만인 1339년(충숙왕 후8)에 사망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노골적으로 주변에 사람이 오는 것을 꺼려하였고, 원과의 관계문제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원에서 파견한 사신을 마중하지 않거나 원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꺼려하여 행렬을 지체시키는 등 부마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연이은 권력다툼이 남긴 상흔 속에서 그는 실로 무기력한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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