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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불운한 일생을 살다

1688년(숙종 14) ~ 1724년(경종 4)

경종 대표 이미지

서울 의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경종은 조선의 제20대 국왕으로 1720년부터 1724년까지 재위했다.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이다. 숙종(肅宗)과 장희빈(張禧嬪) 사이에서 태어나, 곧바로 원자(元子)로 정호(定號)되었으며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경종은 탄생 과정에서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휘말렸으며, 이어진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훗날의 영조(英祖))의 탄생과 어머니 희빈 장씨의 죽음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왕위를 승계 받았다. 결국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죽음 이후에 이어진 독살설로 인해 당쟁의 갈등은 최고조로 높아졌다. 영조는 경종과 자신을 둘러싼 민감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즉위 이후 탕평정치를 추진하였다.

2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이 태어나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과 소의 장씨(昭儀 張氏)(훗날의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이 27세였던 숙종의 기쁨은 지극했고, 이는 이듬해 1689년(숙종 15)에 원자(元子) 정호(定號)로 이어졌다. 아직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모두 후사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원자 정호를 빠르게 결정하였고, 이에 대해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은 원자 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빌미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하여 서인정권을 축출하고 송시열을 제주도에 안치한 이후 사사(賜死)하였다. 이와 같이 경종은 태어날 때부터 서인과 남인의 당쟁 속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의 의지가 빚은 벌어진 환국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원자 정호 1년 후 숙종은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5년 후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면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왕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었다. 결국 인현왕후가 죽음을 맞이하자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1701년(숙종 27) 사사(賜死)당하였다. 장희빈의 죽음으로 죄인의 아들이 되어버린 경종은 왕위 계승권까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장희빈의 죽음보다 경종에게 닥친 더 큰 위협은 숙빈 최씨(淑嬪 崔氏)가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출산한 것이다. 연잉군은 단순히 배다른 형제를 넘어서서 경종에게는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었는데, 세간에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을 숙종에게 고해바친 사람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라고 지목하였기 때문이다. 연잉군의 탄생과 장희빈의 죽음으로 경종은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갑술환국 이후 새로운 집권세력을 형성한 소론이 남인을 대신하여 세자의 보호를 자임하고 나섬에 따라, 정국은 노론과 소론의 대결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경종은 생모의 죽음과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한 궁중생활을 하는 사이 매사 의욕을 잃고 정신적 장애를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세자는 이후 병약하여 잦은 병치레와 함께 24살이 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여 근심이 되었다. 1717년(숙종 43) 노론 계열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은 숙종과 독대한 자리에서 숙종이 세자의 교체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결국 세자가 서무를 대리청정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숙종 말년 경종은 대리청정을 통해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정을 살폈다. 대리청정을 맡은 경종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숙종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대리청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3 경종의 즉위와 소론의 득세

1720년(숙종 46) 숙종의 죽음 이후 세자 경종은 무난하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721년(경종 1), 노론은 세제(世弟)의 책봉을 주장하여 연잉군을 후계자로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종통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제 책봉이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경종과 왕비는 34세와 17세의 젊은 나이었고, 만약 경종에게 병이 있어 아들을 낳아 후사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면 종법의 원리에 따라 조카의 항렬에서 양자를 들이는 것이 종법의 원리이지 아우에게 왕위를 계승할 일은 아니었다.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는 것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보기에 원칙에 어긋나는 무리한 처사였으며 그것은 곧 노론의 횡포로 인식되었다. 노론들은 그들이 후원하는 연잉군을 확실하고 조속하게 후계자로 결정하기 위해 무리한 방법으로 경종을 압박하여 세제로 책봉하게 되었다. 노론들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세제 책봉이 이루어지자 소론 쪽에서는 경악하였다. 그러나 대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수교(受敎)를 얻어 결정된 일이었으므로 감히 그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전격적인 처리로 물의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세제의 책정은 기정사실이 되어 재론의 여지가 없게 되자 영조의 계승권도 확립되었다. 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다음 단계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론의 강공책은 경종의 왕위를 넘보는 일로 간주되어 소론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옥사로 연결되는 구실이 되었다.

세제책봉 2개월 후인 1721년(경종 1) 10월 노론은 대리청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리청정 역시 왕세제 책봉 때처럼 대신들이 나서기보다 하급관원이었던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종은 소론인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의 간곡한 만류로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경종은 다시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고, 노론 대신들은 경종의 대리청정의 명을 받들어 상세한 절목을 만들어 곧 시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과천에 물러나있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궁궐에 입궐하여 청정의 명을 환수할 것을 요청하였고, 경종은 이를 허락하여 청정을 환수할 것을 명하였다.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파동에는 조정에 당색을 가진 관인들의 힘겨루기가 있었고, 여기에서 경종의 역할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론 측 자료에 의하면 경종은 정무에 성의가 없었고 사리판단이 명백하지 않아 비망기(備忘記)의 작성을 전적으로 환관들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그 결정 과정에 대비나 왕비 혹은 환관들이 개입하여 농간을 부릴 가능성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에 의해 추진되었던 세제 책봉은 소론에 의해서 경종 폐위로 인식되었고, 대리청정은 찬탈로 선전되었다. 그 결과 노소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대리청정이 환수된 지 2달 후 소론 급진파인 김일경(金一鏡) 등 7명은 연명 상소로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였다. 경종은 이를 즉시 수용하고 노론 대신들을 조정에서 축출하여 급속히 환국이 진행되었다. 이를 신축환국(辛丑換局)이라 부른다. 이듬해 3월에는 목호룡(睦虎龍)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가 있었다고 고변함으로써 옥사가 일어났다. 노론 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이이명(李頤命)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김춘택(金春澤)의 사촌동생 김용택(金龍澤) 등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환관․궁녀와 결탁하여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노론 4대신을 비롯하여 60여 명의 노론계 인물들이 살육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임인년 옥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김일경(金一鏡)의 사주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내려졌으나, 노론의 젊고 패기만만한 자제들이 작당하여 자금을 모으고 궁중과 내통하여 연잉군의 대권 계승에 실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신축환국과 임인년 옥사, 곧 신임사화(申壬士禍)는 결국 세제인 연잉군을 국왕으로 만들기 위한 노론 측의 지나치게 무리한 강공책과 자제들의 모험주의적이며 부도덕한 공작정치가 빚어낸 자충수라고 할 수 있다. 경종은 신축환국을 진행하면서 소론 주도의 정국으로 개편하는 데 있어서는 즉각적이며 능동적으로 국정을 이끌었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직접 국정을 책임지는 경우가 적었다. 말과 웃음이 적은 성품 때문인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까닭에 임인년 옥사에서 내렸던 처분이 당파의 이해 문제 때문인지, 경종의 결단 때문이었는지를 놓고 영조 즉위 이후 정쟁이 더욱 가열되었다. 다만 경종이 영조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는 매우 강렬하였다. 임인년 옥사의 취조 중에 세제의 이름은 수없이 거론되었으나 후계자로서의 특수한 신분과 경종의 특별한 애호로 연잉군은 무사할 수 있었다. 경종은 정신적, 성격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생인 연잉군만은 끔찍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4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

1724년(경종 4) 8월 경종이 죽음을 맞았다. 경종은 재위시절부터 병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친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되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쌓인 근심과 두려움이 병이 되어, 한열증(寒熱症)으로 멍청한 상태가 된다든지, 앞뒤의 응대가 달라진다든지 하는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의 병약함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른바 경종 독살설이다. 실제로 경종은 당시 왕세제궁에서 보내온 게장으로 수라를 들고 나서 생감을 먹었는데, 그날 밤부터 갑자기 증상이 나빠져 5일 후에 사망하였다. 이 일로 경종이 게장에 든 독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인지 민간에서 게장을 먹고 생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전해져온다. 그러나 경종이 독살되었는지 아닌지를 사료로 증명하기는 어려우며 여전히 논란은 진행 중이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노론의 지나친 논의에 염증을 느낀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제보합(調劑保合)하는 탕평론을 받아들여 소론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소론 과격파들은 모반의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의 난은 김일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과격한 소론인 준소(峻少)에 의해 모의되었다. 이인좌의 난 주모자들은 전국 각처에 괘서를 걸어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는데, 이때 경종이 대비와 세제였던 영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점이 널리 부각되었다. 이렇듯 경종은 탄생부터 죽음 이후까지 당쟁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불운한 일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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