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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金祖淳]

순조의 스승이자 장인, 그리고 외척세도정치(外戚世道政治)를 펼친 인물

1765년(영조 41) ~ 1832년(순조 32)

김조순 대표 이미지

풍고 김조순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서 1832년(순조 32)에 사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초학노인(初學老人)이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초명(初名)은 낙순(洛淳)이며, 조선 23대 왕 순조(純祖)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로 봉호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이고, 종묘(宗廟)에 있는 정조(正祖)의 묘정(廟庭)에 추가로 배향(配享)되었다. 정조가 순조의 스승이자 장인으로 삼아 훗날을 부탁하였다. 30여 년간 순조가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외척세도정치(外戚世道政治)’를 펼친 대표적 인물이다. 19세기 권세를 휘두른다는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행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2 가계와 정조 연간의 정치 활동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연간 척화파(斥和派)였던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제19대 숙종(肅宗) 연간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제20대 경종(景宗) 연간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김제겸(金濟謙), 조부는 김달행(金達行), 부는 김이중(金履中), 외조부는 평산 신씨 신사적(申思迪)·함평 이씨 이형옥(李衡玉)이고, 처는 청송 심씨 심건지(沈健之)의 딸이다.

김조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和親)을 반대한 척화파의 후손임에도 청나라에 사신으로 연행(燕行)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연행 때 만난 청나라 학자 장도악(張道渥)과 편지를 왕래하고 이조원(李祖源)의 필체, 정선(鄭敾)의 그림 등을 선물하며 교유했다. 당시 유행하던 청 문물을 수용하는 북학(北學)과 패관소품(稗官小品)에 몰입하기도 했다.

또한 김조순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김수항이 남인(南人)에게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된 일과 경종 연간 신임옥사(辛壬獄事)로 사망한 고조부 김창집과 증조부 김제겸(金濟謙), 종조부 김성행(金省行) 등의 안동 김씨 인물들이 화를 입었던 사건 때문에 남인·소론(少論) 세력과 함께 협력하기 힘든 정치적 입장이었다. 이러한 김조순이 속한 안동 김씨 세력은 신(新)안동 김씨 또는 장동 김씨로 불리며,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성장했으며, 사상계에서는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한 노론 ‘낙론(洛論)’을 대표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은 기사환국·신임옥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인물이나 그 후손을 제외하고는 제22대 정조 연간에는 탕평 정치를 도우며 노·소론, 남인 세력이 협력해서 정국을 운영하는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영조 말 정조 초반부터 노론 외척 내에서는 혜경궁의 풍산 홍씨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북당(北黨)과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김한록을 중심으로 하는 남당(南黨)으로 나뉘었다. 이른바 ‘시파(時派)’·‘벽파(僻派)’라고도 했다. 김조순은 왕세손[훗날 정조]을 위협했던 남당 세력보다는 왕세손을 보호했던 북당 세력을 지지했음을 『풍고집(楓皐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1세인 1785년(정조 9) 문과에 급제한 김조순은 곧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김조순을‘문정초손(文正肖孫: 문정공 김상헌의 후손)’이라고 칭찬하며, 초명인 ‘낙순’을 ‘조순(祖淳)’으로 개명(改名)해 주기도 하였고,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했다. 초계문신제도는 정조가 ‘우현좌척(右賢左戚: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외척을 배척한다)’의 정국 운영을 해 나가며, 외척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고, 젊은 인재를 모아서 자신의 정치 세력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김조순은 초계문신으로 있으면서 1787년(정조 11)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에 이상황(李相璜)과 함께 패관소설(稗官小說)을 읽은 일이 발각되어 정조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후 1788년(정조 12)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에 임명되었고, 1792년(정조 16) 28세에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행 중에 문체(文體)가 바르지 못하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3 정조가 김조순을 원자(元子)의 스승이자 장인으로 삼아 세도(世道)를 부탁하다

김조순과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정조의 신뢰는 정조 후반 시기에 두드러졌다. 1795년(정조 19) 소론 정동준(鄭東浚) 세력과 남인 신서파(信西派) 세력 등이 정국에서 축출되고 위축될 때 정조는 심환지(沈煥之) 등의 노론 벽파 세력과 김조순 등 측근 세력을 등용했으며, 1797년(정조 21) 김조순을 특별히 발탁하여 정3품 이조참의에 임명했고, 1799년(정조 23) 9월에는 김조순을 영춘헌(迎春軒)에서 만나보고 원자(元子: 순조)를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하는 보도(輔導)를 부탁했다. 나아가 1800년(정조 24) 1월에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겸보덕에 임명했으며, 2월 2일에 김조순은 예조참의로서 왕세자 책례와 관례 행사에 참여했다.

또한 정조는 김조순을 순조의 장인으로 삼고자 했다. 2월 26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김조순의 딸을 포함한 초간택이 행해졌고, 윤4월 8일 재간택을 마쳤지만, 삼간택을 끝마치지 못한 채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昇遐)했다. 이후 11살의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행해졌다. 김조순은 총융사(摠戎使), 홍문관부제학, 장용대장에 임명되었다가 8월에 정순왕후의 전교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9월에 정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렸고, 11월에 예문관제학, 12월에 규장각제학에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에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노·소론, 남인 내 정조 측근 세력이자 시파 세력 내 많은 사람들이 벽파 세력에 의해 유배가거나 사망했으나, 정순왕후가 정조의 유지(遺志)를 이어서 김조순은 무사할 수 있었다. 김조순은 1월에 형조판서, 5월에 예조판서, 6월에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9월에 시행된 삼간택에서 그의 딸이 순조비로 최종 간택되었다. 순원왕후의 대례(大禮) 후에 김조순은 영안부원군, 부인 심씨는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에 봉해졌고, 10월에 훈련대장(訓鍊大將), 호위대장(扈衛大將)에, 11월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외척이 된 김조순은 “국구(國舅)가 조정의 정사에 참여할 수 없음은 국조 이래 오랜 규정이며 아름다운 일입니다.”라며, 모든 관직을 사양하는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4 병인경화(丙寅更化)와 순조 중반의 추국(推鞫) 사건

1803년(순조 3)에 김조순은 실록청당상으로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804년(순조 4) 삼청동에 옥호정사(玉壺精舍)를 지었다. 같은 해, 순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자, 1802년(순조 2)에 삼간택을 저지하려 했다는 이유로 권유(權裕)·이안묵(李安默)에 대한 추국이 행해졌고, 심환지 세력을 정국에서 축출하려는 ‘갑자년의 옥사’가 일어났다. 1805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경주 김씨 세력을 정국에서 축출하려는 ‘김달순(金達淳) 옥사’와 1806년(순조) 병인경화가 일어나, 그 과정에서 노론 외척 중 경주 김씨 세력 등과 심환지·권유·김달순·서형수(徐瀅修) 등의 벽파 세력이 축출되고, 노론 외척 중 반남 박씨 박종경(朴宗慶)·안동 김씨 김조순 등의 시파 세력이 주도하며 정치 세력과 정국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1809년(순조 9)에 효명세자(孝明世子)가 태어나자 순조는 1811년(순조 11)에 영돈녕부사 김조순을 포함한 대신들에게 원자인 효명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할 인재들을 천거하라고 명했다. 7월에도 김조순은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지만, 다섯 차례 명을 어기고 네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려서 사직을 허락을 받았다. 이해 순조는 잦은 병으로 조용히 치료하는 일이 많았고 궁궐을 옮겨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해 겨울에 서북 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연이어서 1812년(순조 12) 3월에 정조의 배다른 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을 추대하며 일어난 ‘역적 이진채(李振采)의 옥사’가 일어났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가 반란의 처리 문제를 김조순에게 편지로 묻자, 김조순은 관대하게 처리하기를 건의하는 답장을 하며, 세도를 안정시키고, 세신(世臣)를 보호하는데 일조했다. 7월에 효명세자를 왕세자에 책봉했고, 김조순은 왕세자 교명문을 작성했다.

문장(文章)에도 뛰어났던 김조순은 1814년(순조 14) 규장각검교제학으로 『홍재전서』를 교인(校印)하고, 『열성어제』 속집 간행에도 참여했다. 또한 그는 1815년(순조 15) 혜경궁 홍씨가 81세로 서거하자, 혜경궁의 만장(挽章)을 작성했으며, 1816년(순조 16)에 현륭원 혜빈 홍씨 지문을 작성했다.

순조 중반 시기인 1817년(순조 17) 1월에 김조순과 교유했던 충청감사 홍석주(洪奭周)가 연루된 ‘이희조(李希祖) 옥사’가 일어났다. 2월에 부호군 이우재(李愚在)가 김한록(金漢祿) 관련 역안(逆案)의 죄목을 뒤집으려 한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를 논척하고, 3월에는 박충준(朴忠俊) 등이 은언군의 아들을 옹립하려는 계획이 발각되어 추국이 시행되었다. 연이은 추국과 관련해서 규장각검교제학이자 상의원제조를 역임하던 영돈영부사 김조순은 자수자정(自守自靖: 각자 도리를 지켜서 스스로 편안히 지낼 것)해야 한다며 모든 직임에서 해면되길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같은 해에 조득영(趙得永)이 박종경의 전횡을 논척했다. 외척 세력 내 박남 박씨 세력이 위축되고, 1819년(순조 19)에 풍양 조씨 조득영 집안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왕세자빈으로 정해졌다.

5 건릉(健陵) 천봉(遷奉)과 외척 세력 내 풍양 조씨의 부상(浮上)

1821년(순조 21) 3월에 정조비(正祖妃) 효의왕후(孝懿王后)가 69세로 서거하자, 김조순이 효의왕후 만장과 건릉 효의왕후 김씨 지문을 작성했다. 김조순은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에 임명되자, 정조가 묻혀 있고 효의왕후가 묻힐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옮겨야 한다고 요청하며 상소했다. 상소에는 “세상에서 모르는 자들은 간혹 이것이 선대왕께서 직접 정하신 땅이라고 의심하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건릉을 천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7월에 김조순은 건릉 천봉 만장을 작성했다.

앞서 1821년 가을에 돌림병이 유행해서 김조순도 전염되어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소생한 후, ‘초학노인[옛날의 습관을 버리고 스스로 공부에 힘써 천지가 다시 살게 해준 은혜에 보답한다]’으로 자신의 호(號)를 지었다.

1823년(순조 23)과 1824년(순조 24)에 황해도 황주목사와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하는 김원근(金元根)을 따라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다녀온 후, 영돈녕부사로서 순조에게 환곡(還穀)과 대동고(大同庫)의 폐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음사(蔭仕)]을 하는 제도에서 차별을 받고 있던 관서(關西) 지역에 대한 인사(人事) 문제를 개선할 것과 서류(庶類)의 가문(家門)이나 능력(能力)을 고려하여 등용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825년(순조 25) 12월 도목정사에서 청백리인 김전(金銓)의 봉사손(奉祀孫) 김희수(金囍秀)를 추천하는 내용의 서찰[貴札] 사건이 일어났다. 김조순이 이조판서 이석규(李錫奎)에게 보냈다는 서찰인데, 김희수는 위조죄(僞造罪)로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 유배되었다. 당시 이석규는 1826년(순조 26) 1월 2일에 파직되었지만, 이틀 뒤인 1월 4일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김조순은 김희수의 가짜 편지에 대해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고, 순조는 김조순에게 혐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남인 세력 중 윤기(尹愭)는 이 사건을 자신의 문집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남기며 ‘세상의 변고(變故)’라고 논평했다. 후임 이조판서에 조만영을 임명했다. 이때 김조순은 이조판서에 임명된 조만영에게 답장하는 편지에서 사직할 생각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출사하여 공무를 행하기를 당부했고, 성주덕(成周悳)이 편찬한 『재상록(災祥錄)』을 증정하며 적극 활용하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즈음 김조순은 경기 이천시 백사면 영원암(靈源庵)에 시주하고, 여주(驪州) 현암(玄巖)에 지은 새집으로 가서 기거했는데, 4월 10일에 문장으로 뛰어나 겸홍문관대제학, 겸예문관대제학, 겸지성균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이 시작되자, 김조순은 신위(申緯) 등의 인물을 추천하고, 본인은 여주 현암에서 기거했다. 1828년(순조 28) 8월 견평방(堅平坊)의 집에서 부인상(夫人喪)을 당했는데, 당시 독감이 유행했다. 효명세자가 슬퍼하는 순원왕후를 대신해서 친히 조문하겠다는 명을 내리자, 명을 거두기를 요청하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 5월 6일에 효명세자가 창덕궁 희정당에서 병으로 22세에 서거하자, 효명세자 만사를 작성했고, 7월 15일에 영돈녕부사로서 효명세자 연경묘 지문을 지어 올렸다.

김조순은 1832년(순조 32) 4월 3일에 사망했다. 그는 정조가 원자를 보필하며 이끌어주기를 부탁한 후, 순조 30여 년간 국구이자 사보(師輔: 스승으로서 가르침)로서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충문’으로 시호를 내렸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6월에 여주 효자리(孝子里)에 장사 지냈다가, 1841년(헌종 7)에 이천(利川) 가좌동(加佐洞)으로 이장(移葬)했다.

1833년(순조 33) 예조판서 조만영의 추천으로 대신들이 동의하여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834년(순조 34) 현암서원(玄巖書院: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을 세우고 사액하였다. 1854년(철종 5) 삼남(三男) 김좌근(金左根)이 활자(活字)로 문집 『풍고집』을 간행하였다. 1857년(철종 8)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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