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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金集]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라

1574년(선조 7) ~ 1656년(효종 7)

김집 대표 이미지

의례문해속 1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율곡의 학통을 이어 예학(禮學)의 시대를 연 학자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조차도 삼가라.’ 이 문구는 예(禮)의 준수와 실천, 그리고 항상 올바른 마음가짐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핵심 명제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 이 신독을 자신의 호로 삼아 살아간 학자가 있었다. 신독재 김집(金集)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집은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새로운 지평을 연 학자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로부터 부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으로 이어지는 서인의 학통을 전수받아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전해주어, 이후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한 기호학파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2 명문 출신의 총명한 아이

김집은 1574년(선조 7) 6월 6일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김장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김집의 가문은 대대로 충청도 연산에서 세거해 온 집안이었다. 연산으로 입향(入鄕)한 선조는 김집의 9대조 김약채(金若采)로, 그는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에 항거하여 유배당하였을 정도로 절개 있는 인물이었다. 김약채는 조선 왕조 개창 이후에도 중용되어 대사헌, 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김약채의 증손이자 김집의 6대조 김국광(金國光)은 세조대에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부 김계휘(金繼輝) 또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이이나 기대승(奇大升)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유명한 학자이자 서인의 영수였다. 부친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중앙정계에서 활약하였다.

김집은 어릴 때부터 총명한 아이로 집안의 기대를 듬뿍 받았다. 그가 겨우 말을 배웠을 때 ‘손가락을 입에 세워 이것이 가운데 중(中) 글자이다’라고 하니, 조부 김계휘가 기특하게 여겨 ‘우리 집을 창대하게 할 아이’라 감탄하였다. 이미 명문으로 자리 잡은 집안을 창대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김집에게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겠다.

김집은 8살이 된 1581년(선조 14) 송상현(宋象賢)과 송익필(宋翼弼)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친 김장생과 깊은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었으니, 송상현은 김장생과 막역한 사이였으며 송익필은 김장생의 스승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두 스승 모두 서인의 중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비록 이 두 스승에게 배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지만, 김집은 어려서부터 서인의 학풍을 익히며 자랐다고 볼 수 있겠다.

김집은 아홉 살 때 조부 김계휘의 상(喪)과 열세 살 때 모친 조씨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김집은 부친 김장생을 따라 모든 절차를 마치 다 자란 성인들과 같이 엄수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예(禮)를 준수하는 것에 대한 남다른 생각과 실행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혼란스러운 시대

김집은 1591년(선조 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 좌의정 유홍(兪泓)의 딸과 혼인하여 순탄한 삶을 사는 듯하였다. 그러나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김장생은 정산현감으로 있었는데, 김집은 아버지의 부임지에 따라가 왜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김집에게 큰 정신적 피해를 안겨주었다. 스승 송상현은 동래부사로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서울에 살고 있던 형 김은(金櫽)과 그의 가족이 일본군에게 몰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서숙(庶叔) 김연손(金燕孫) 또한 비장으로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개인적 가정사도 순탄하지 못하였다. 김집은 혼인한지 4년 만에 율곡 이이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맞이하였는데, 부인 유씨가 고질병이 있어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유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김집은 다시 본처를 들이지 않아 적통을 잇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시 계속된 정치적 갈등은 결국 김집의 가문에도 큰 먹구름을 드리웠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바로 그것이다. 1613년 양반가의 서얼 출신들이 서얼 차별 폐지를 주장하다 좌절되자 불만을 품고 전국에서 강도질을 일삼은 사건이 벌어졌다. 충격적인 사건이기는 해도 단순 강도로 처벌받을 일이었으나, 일은 당시의 불안한 정국과 맞물려 확대되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광해군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왕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으나,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은 서얼들의 강도 사건을 이용하여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던 영창대군 일파를 몰아내려 하였다. 결국 강도 사건은 반역 사건으로 둔갑했다. 서얼 강도들은 사회 혼란을 야기한 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으며, 그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 일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계축옥사에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金慶孫), 김평손(金平孫)이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고문을 받다 죽었고, 또 언제 김장생에게까지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김장생이 서인의 명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북 일파가 가문 전체에 화를 입힐 수도 있어 더욱 불안한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모반으로 국문을 받던 이들이 김장생의 연루를 강력히 부인하였기 때문에 김집의 가문은 피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장생은 김집을 데리고 연산으로 낙향하여 벼슬길에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4 예학에 몰두하다

역설적이게도 김장생의 낙향은 김집에게는 인생의 큰 계기가 되었다. 어차피 김집 또한 부친 김장생과 같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실망하여 벼슬길에서 미련을 버린 터였다.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김장생이 택한 길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예(禮)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이황과 이이 단계를 거치며 조선 성리학은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인 심성론(心性論)을 발전시켰다. 왜란 등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고, 심성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윤리론인 예학(禮學)이 자연스레 발달하게 되었다. 김장생은 그러한 예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학자이다.

김장생의 예학 탐구는 자연스레 강학 활동으로 이어졌고, 김집 또한 부친으로부터 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율곡 이이로부터 이어진 서인의 학통을 바로 김집이 떠받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김집은 이미 송상현과 송익필 등 두 스승에게 나아간 바 있지만, 어렸을 때의 몇 년간인데다가 송상현과 송익필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꾸준하게 학문을 배우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장생은 김집의 부친이자 평생의 스승으로, 김집은 조선 예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김장생 예학의 적통을 이었던 것이다.

김집은 예(禮)란 바로 인욕을 절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으로 인식하였다. 예(禮)의 준수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어떠한 예(禮)가 올바른 것인지를 가려내는 작업이다. 잘못된 예(禮)를 준수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올바르게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금의 예(禮)를 검토하여 어떠한 예(禮)가 인간이 가진 선한 본성을 잘 드러내면서 당시의 사회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인지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고, 이것이 바로 예학(禮學)이었다. 예학(禮學) 연구는 인간의 마음을 올바르게 유지하도록 하여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자 한 것이었다.

5 산림(山林)의 길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조정에서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를 산림(山林)으로 초빙하여 불러들이려 하였다. 산림이란 산림(山林)에 은거하고 있는 선비를 약칭하는 용어로, 특히 학덕(學德)을 겸비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조정으로부터 중용된 인물을 일컫는다. 본래 김장생과 김집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아 중앙의 요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김장생이 명문가 출신이었음에도 정치에서 은퇴하기 이전에 주로 외직을 맡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거치며 서인이 정권을 잡자 조정에서 학문과 도덕이 뛰어난 인물을 필요로 하다는 명목으로 서인계 인물들이 중용되었고, 김장생도 중앙 요직을 두루 거치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호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왕의 곁을 지켰다.

김집 또한 중앙정계에 발을 담는 것을 저어하여 인조(仁祖)가 수차례 벼슬을 내렸음에도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극진한 예를 갖추어 여러 산림을 초빙하자 김집도 그에 응하여 서울로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내려진 벼슬에 오랫동안 머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김집이 중앙정계의 일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국가 차원에서 예법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에는 항상 참여하였다. 김집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림으로 활동하며 서인의 구심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예서의 검토와 간행에 집중하여 부친 김장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를 보충한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을 편찬하였다. 김집은 예를 연구하는 것 뿐 아니라 철저하게 준수하여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였다. 그는 거처하는 건물을 ‘신독재’라 명명할 정도로, 홀로 있을 때조차도 혹시 예를 어겨 옳지 않은 마음을 품을까 조심하였다.

김집은 1656년(효종 7) 윤5월 13일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이 깊어지자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생사(生死)의 이치를 환히 알아 마음에 동요됨이 없으니, 이에 있어서는 거의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이른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3년 뒤에는 그에게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연산 집 근처의 돈암서원(遯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200년 이상 지난 1883년(고종 20)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김집은 대부분의 시간을 연산에서 예학 연구와 강학 활동에 쏟아 수많은 인재를 양산하였고, 이 때문에 호서 지방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 대표주자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은 김집이 잠시 이조판서로 재직하였을 때 산림으로 등용되었다. 이들은 결국 서인 노론의 학맥을 형성하여 조선 후기 최대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김집은 조선 중기 예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서인의 학통을 전수해주어 조선 후기 정계에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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