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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金弘道]

서민의 삶을 그림에 담다

1745년(영조 21) ~ 미상

김홍도 대표 이미지

김홍도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머리말 - 국화(國畵) 김홍도

단원 김홍도, 그는 인물됨이 신선과 같아서 ‘화선(畵仙)’이라고 불리고, 또 나라 안의 으뜸가는 화가라는 뜻으로 ‘국화(國畵)’라고도 불렸다. 요즘 말로 하면 국민화가라는 뜻일 것이다. 그만큼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흔히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진경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 고사인물, 초상화, 영모화조, 사군자, 기록화, 불화 등 할 것 없이 모든 회화 장르를 섭렵했다고 할 수 있다.

회화뿐만이 아니다. 시서화악에 두루 걸친 재능과 교양을 갖추고 있어서 작품의 품격을 높였다. 그의 스승 강세황(姜世晃)은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와 대금,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다.’ 라고 칭찬하였다.

김홍도의 퉁소 소리는 맑고 가락이 높아 멀리서 이것을 들으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고도 하였다.

또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의 각 폭에 칠언절구 시를 써 올려서 정조에게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볼 때 글씨도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88년(정조 12) 김홍도가 어명을 받들어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릴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해산첩(海山帖)〉을 본 홍석주(洪奭周)는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 서문에서 김홍도의 예술이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해학과 여유로운 기질, 호탕한 성품까지 지니고 있어서 그가 가는 곳마다 풍류가 더해진다. 실제로 그는 시서화악의 재능과 풍류로 당대 유명한 예술인, 학자, 고관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과 문화적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진경산수화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 풍속화에서 보여주는 개성적 사실주의, 조선적 미감은 진경회화의 역사에서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도 ‘옛 사람이 자신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했다 하니 자기 작품에 대한 자긍심과 작가의식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는 정조[조선](正祖)의 아낌없는 후원과 총애를 받은 화원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세계와 정조의 감상안목이 일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가 궁중에서 근무하면서 매번 한 장의 그림을 내놓을 때마다 곧 정조의 뜻에 맞았다고 한다. 정조는 김홍도의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취향의 풍속화에 담긴 생활미를 좋아하였다. 사람살이 날마다의 일과 세속의 여러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으니 길거리며 나루터, 가겟방과 노점상, 과거장과 놀이마당에서 한번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 보는 사람들마다 손뼉을 마주치고 감탄하며 과연 ‘김사능(金士能 : 김홍도의 자)의 속화’다 라고 칭찬하였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모두를 웃게 하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 고금의 화가 중에 김홍도 같은 이는 없었다.

2 가계와 생애 - 천재 화원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국가의 그림일을 도맡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이다. 김홍도의 가계는 오세창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에 나오는 가계도와 『성원록(姓源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5대조 김득남은 수문장을, 고조 김중현은 별제를, 증조 김진창(金震昌)은 만호를 지냈고 조부 김수성과 부친 김석무(金錫武)는 벼슬이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김홍도의 집안은 대체로 하급 무반 벼슬을 지낸 중인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내력에서 특별히 화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발견되지 않는다.

김홍도의 자는 사능(士能)이다. ‘참다운 선비만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거는 『맹자(孟子)』「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에 나오는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는 구절이다. 중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비를 지향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그의 부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丘),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畫史), 첩취옹(輒醉翁), 농한(農漢), 농사옹(農社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단원’이라는 호는 김홍도가 평소 존경하던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자호한 것이다. ‘취화사’나 ‘첩취옹’은 모두 술과 관련된 것으로 ‘술 취한 환쟁이’, ‘매번 취하는 늙은이’ 라는 뜻이라 평소 술과 해학을 즐겼던 김홍도와 잘 어울리는 호라고 할 수 있다. ‘농한’ 이나 ‘농사옹’은 농사짓는 사내 혹은 늙은이라는 뜻으로 아무런 벼슬 없이 지내던 말년의 김홍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김홍도의 인물됨은 신선과 같아서 ‘화선(畵仙)’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 강세황도 김홍도의 사람됨에 대해서 일컫기를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신선같은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또 조희룡은 김홍도의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훤칠하니 키가 커서 속세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도 하고, ‘멀리서 대하면 신선이요,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다.’라고도 하며 ‘군자의 모습’이라고도 하는 걸로 보아 김홍도의 인물은 꽤 준수했던 모양이다.

김홍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강세황의 「단원기(檀園記)」에 단편이 보인다. 「단원기」는 김홍도가 스승 강세황에게 부탁해서 받은 글인데 김홍도의 생애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김홍도는 아주 어릴 때(7세 무렵)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면서 화법을 배웠다고 한다.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와의 교분에 대해서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는 사제지간으로, 중간에는 한 관청에 근무하는 동료로, 나중에는 예술계의 지기로 함께 했다고 하였다. 평생의 인연이었다는 뜻이다.

21세 때인 1765년(영조 41) 영조의 즉위 40년과 춘추 71세의 경사를 기념하여 거행된 행사를 기록한 그림인 〈경현당수작도(景賢堂授爵圖)〉 제작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아 20대 초반 이미 화원이 되어 중요한 일을 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772년(영조 48, 28세)에는 『진전중수도감의궤(眞殿重修都監儀軌)』와 1773년 『현종명성왕후영조정성왕후정순왕후상호도감의궤(顯宗明聖王后英祖貞聖王后貞純王后上號都監儀軌)』에 화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9세 이후에는 여러 차례 어용화사로 활동하였다. 첫 번째는 1773년(영조 49, 29세) 영조 어진 및 세손(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데 동참화사로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사포서 별제에 제수되었다. 이 첫 번째 어용화사로 정조가 김홍도를 알게 되었고, 이후 그림일은 모두 김홍도를 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정조가 즉위하던 해(1776년)에 〈규장각도(奎章閣圖)〉를 그리도록 한 것이나 창덕궁 벽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리게 한 것, 1788년(정조 12)에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게 한 것 등으로 볼 때 이후 중요한 그림일을 거의 김홍도에게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홍도가 그려온 〈금강산도(金剛山圖)〉는 수십 장 길이의 비단화폭 두루마리에 화원체로 그려진 그림으로서 정조가 매우 아꼈다고 한다.

두 번째 어용화사는 1781년(정조 5, 37세)에 정조의 익선관 곤룡포 차림의 어진을 그릴 때 동참화사로 활약한 것이다. 이 일로 1783년(정조 7, 39세) 경상도 안기 찰방에 제수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 1786년(정조 10, 42세) 다시 도화서로 복귀하였다.

마지막 어용화사는 1791년(정조 15, 47세)에 정조의 원유관 강사포 차림의 어진을 그릴 때 동참화사로 참여한 것이다. 이 공로로 김홍도는 포상을 받아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1789년(정조 13, 45세)에는 동지정사 이성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이명기와 함께 중국 북경의 천주당을 견문하여 서양화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을 영건한 후 이듬해 그 원찰로서 창건한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龍珠寺大雄殿後佛幀畵) 제작에 이명기, 김득신 등과 함께 참여하였던 사실로 볼 때 김홍도의 중국방문은 아마도 용주사 대웅보전의 불화 작업에 서양화법을 도입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용주사 불화는 서양화법 중 명암법, 원근법 등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홍도 역시 북학이라는 시대사상을 그의 화법에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1795년(정조 19, 51세)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즉,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화성에 모시고 가서 회갑연을 거행한 행사를 기록한 의궤의 기록화 작업을 맡았고, 이 밖에 〈화성전도(華城全圖)〉, 〈원행을묘의궤도(園行乙卯儀軌)〉 8폭 병풍, 〈화성춘추팔경도(華城春秋八景圖)〉 18폭 등 화성 성역과 관련된 여러 기록화도 제작하였다.

1800년(정조 24, 56세) 정월 초하루에 주자의 시 여덟 수를 소재로 한 병풍 〈주부자시의도〉를 진상하자 정조가 화운시를 쓰고 항상 주위에 두고 눈여겨보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재능을 아끼고 인정해주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김홍도는 상실감과 함께 병고가 찾아들며 실의의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정조 재위시에는 최고의 화원으로서 열외로 특별대우를 받았던 그였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는지 1804년(순조 4)에는 60세의 나이에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1806년(순조 6, 62세)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3 교유관계와 예술 세계 - 사대부 의식과 문인 취향을 갖다.

1784년(정조 8, 40세) 안기찰방 시절에 경상도관찰사 이병모(李秉模), 흥해군수 성대중(成大中), 봉화현감 심공저(沈公著), 영양현감 김명진, 하양현감 임희택 등과 어울려 청량산에 가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이미 그림으로 이름이 난 김홍도가 그 자리에서는 퉁소를 잘 불러서 모임의 흥을 돋우웠고 밤이 깊도록 돌아가면서 화운시를 지었다.

당시 김홍도가 운을 받아서 지은 제시도 전해진다.

1791년(정조 15, 47세)에 송석원 시회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는데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라는 작품이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1786년(정조 10) 경에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결성된 문인들의 모임인데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한다. 서울의 중인계층들이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옥류동의 송석원에서 시문을 즐겼다. 사대부계층 못지않게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는 중인들 사이에 김홍도가 있었던 것이다.

1788년(정조 12, 44세) 당대 명문가의 자제들의 모임인 은암아집에 참여하고 〈은암아집도(隱巖雅集圖)〉를 그렸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퉁소를 잘 불고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의 저자이기도 한 이한진(李漢鎭)이 있었다. 그는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성대중, 이덕무(李德懋), 서상수(徐常修) 등 당대 문예를 주도하던 이른바 연암집단의 한 사람이었는데 김홍도와도 친밀하게 지내서 함께 풍류를 즐기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김홍도 역시 이한진을 통해서 연암집단의 사람들과 교유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788년 이한진, 성대중 서상수 등이 참석한 이덕무 부친의 생신잔치에서 김홍도는 파초, 국화, 매화와 대나무, 壽星노인 등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 48세) 연풍현감 재임시절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광섭(李光燮)이 김홍도, 이한진, 황운조 등을 청주로 불러 서원아집이라는 풍류모임을 열었다.

김홍도는 이 모임을 기념해서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를 그렸는데 스승 강세황이 찬사가 담긴 발문을 적어주었다. 중국선비들을 그린 중국화를 방작해서 그린 것이었는데 원본과 우열을 다툴 정도로 훌륭하게 그려진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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