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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南在]

아우 남은과 다른 길을 가다

1351년(충정왕 3) ~ 1419년(세종 1)

남재 대표 이미지

구정남재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남재(南在)는 1351년(충정왕 3)에 의령 남씨(宜寧南氏) 집안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초명은 남겸(南謙)이고,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이다. 할아버지는 영광군사(靈光郡事)를 지냈던 남천로(南天老)이며, 아버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을번(南乙蕃)이다. 남재가 아우 남은과 함께 개국공신에 책봉되자 남을번이 검교시중(檢校侍中)의 직을 받았다. 남재의 아우는 남은 외에 남실(藍實), 남지(南贄)가 있다.

남재는 1371년(공민왕 20)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입사(入仕) 초기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전라도안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에 계책을 제시하였고,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에 공헌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아우인 남은이 죽임을 당했지만, 남재는 태종의 비호로 연좌되지 않았다. 그는 태종이 집권한 후 의정부 찬성사,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거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1416년(태종 16)에 손자 남휘(南暉)가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왕실과 사돈이 되기도 했다. 남재는 1419년(세종 1)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에 조성되었다. 문집으로는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다.

2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서 개국공신이 되다

남재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지만,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한 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머물렀다. 그가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위화도회군 무렵이다. 남재가 이성계(李成桂)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에서 윤소종(尹紹宗)과 함께 계책을 세우는 데 기여함으로써 이성계 세력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가 고려왕조의 존속을 위해 정치세력을 규합하면서 남재는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윤소종·조박(趙璞)·남은 등과 함께 유배되기도 하지만,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좌부대언에 임명되었다.

1392년(태조 1) 이성계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중추원학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고,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었다. 건국 직후 문무백관의 관제가 정해지면서 사실상 첫 번째 대사헌의 직을 맡게 된 셈인데, 그는 대사헌으로서 척불, 국경 방어, 음사(淫祀) 배척, 군사 징발 등과 관련한 정책 기조를 제시하였다. 1393년(태조 2)에는 명에서 조선이 요동 지역의 여진인 5백여 명을 데려왔던 것을 문제 삼자 남재가 중추원 학사로서 명에 사신으로 가 해명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막힌 사행로를 다시 열어줄 것을 청하기 위해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을 주축으로 사신단이 꾸려졌는데,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여 또 다시 명에 다녀왔다. 이후 그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노비변정도감 판사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건국 초기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3 제1차 왕자의 난, 처벌을 면하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발생 배경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립이다. 건국 직후 태조는 아들들 중에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소생의 어린 막내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에 책봉했던 터였다. 따라서 건국 과정에 공헌했음에도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던 신의왕후 한씨 소생 아들들은 불만이 컸지만, 그나마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병권을 둘러싼 갈등까지 나타났다. 정도전은 군제 개혁을 통해 왕자와 종친에게 있던 병권을 회수하고자 했고, 그들이 개별적으로 소유한 사병도 혁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위상에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방원이 주도하여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심효생(沈孝生)·박위(朴葳)·유만수(柳曼殊) 등의 관료들을 제거하였다. 이와 같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는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시 남은 역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의 형 남재는 그때 한양이 아닌 개성에 있었다. 변란 소식을 들은 남재는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곧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에 대해 태종은 “남재가 평소에 남은과 마음을 같이 하지 않았다”며 비호를 하지만, ‘남은 당여’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망갔다가 결국 잡혀서 의령으로 추방되었다.

정종이 즉위한 후에 남재는 의령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때 그는 홀로 송도(松都, 개성)의 대궐 뜰에 서서 이방원을 세자에 책봉하라고 외쳤다. 『정종실록』에는 그러한 남재의 행위에 대해 이방원이 크게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흘 뒤 세자 책봉은 단행되었다. 당시 남재는 이방원의 집권에 기여함으로써 정계 복귀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동안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4 잦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태종대의 핵심 관료가 되다

남재가 태종의 정권에 참여하기 시작한 때는 1403년(태종 3) 무렵으로 보인다. 그는 예문관 대제학, 경상도 도관찰사, 개성유후(開城留後),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404년(태종 4)에는 이거이(李居易)의 당여로 지목되어 다시 탄핵되지만, 이때에도 태종은 그를 보호하였다. 그 후 남재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406년(태종 6) 태종이 전위 의사를 나타냈을 때 남재가 강력하게 불가 의사를 표명하며 국왕의 권력을 수호했다. 1407년(태종 7)에는 세자 양녕대군을 수행하여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411년(태종 11)에는 건국 직후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種學)의 죽음이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명령을 내린 사람으로 정도전, 남은이 거론되면서 남은의 형 남재는 또다시 탄핵을 받았다. 이때에도 태종은 남재를 두둔했을 뿐 아니라 원종1등공신에 책봉하였으며, 1413년(태종 13) 우정승, 1414년(태종 14)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고려사』 개수에도 참여하였지만, 개수를 주도한 하륜(河崙)의 죽음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1415년(태종 15)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의 불충이 문제가 되었을 때 남재가 그들의 죄를 청하지 않은 것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남재는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했다가 1416년(태종 16)에는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 남은이 죽임을 당한 이후, 남재는 수차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태종의 비호 아래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재가 사망한 때는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이다. 그는 1419년(세종 1)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졸기(卒記)에 따르면, 그가 ‘경세제민[經濟]’의 재주가 있어 조선 건국시에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을 냈다고 평가되어 있다. 그리하여 1422년(세종 4) 태상왕 태종은 남재를 태조의 묘정에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추가 배향에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한 그의 동생 남은과 태조의 사위 이제(李濟)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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