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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아이신 구룬(금국)의 설립자

1559년 ~ 1626년

누르하치 대표 이미지

누르하치

위키피디아

1 개요

1559년에 여진의 건주좌위(建州左衛) 도지휘사(都指揮使) 가문에서 태어나 분열된 여진을 통일하고 아이신 구룬(金國)을 설립했다. 명과 조선과 몽골을 상대로 무력을 동원하고 외교력을 발휘하여 신생국가를 안정시켰으며 아이신 구룬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기초를 설립했다.

2 여진을 통일하다

누르하치는 1559년 여진의 건주좌위 숙수후부(部)의 허투알라성(현 신빈만족자치현 영릉진)에서 태어났다. 청 황실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원 말기 오도리 만호의 수장 몽케테무르(猛哥帖木兒)의 6대손이다. 누르하치가 태어난 16세기 중기에 여진은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 탁시는 여진 건주좌위의 지도자였으나 건주좌위의 모든 부족을 지배하지 못했고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누르하치는 열 살 때에 생모인 어머치가 사망한 후 계모인 컨저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소년기에 농사를 짓고 인삼, 버섯, 잣을 채취하여 명의 무순(撫順) 시장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한어와 몽골어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583년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이 있다. 16세기 중기 건주여진의 최강자인 건주우위 도지휘사 왕고(王杲)는 명의 변경지역을 약탈하다가 1574년 명의 이성량(李成梁)에게 패배한 후 북경으로 끌려가 사형을 당했다. 왕고의 아들 아타이는 구러 성으로 피신한 후 명의 변경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1583년 이성량은 구러 성을 공격하여 아타이를 죽였다. 그때 구러 성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가 명의 군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청 황실의 기록에 의하면 아타이의 아내가 누르하치의 큰아버지 리둔의 딸이었기 때문에 기오창가와 탁시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구러 성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명 군대의 길잡이로 구러 성에 갔다가 혼전 중에 피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억울하게 살해당했다고 명에 탄원했다. 명 조정은 두 사람을 오인 살해하였음을 인정하고 누르하치에게 보상으로 교역증명서인 칙서 30장, 말 30필, 도독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키려는 결심을 굳혔고 여진 통일의 장정에 돌입했다.

통일 전의 여진은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 북쪽에서 거주했으며 숙수후, 후너허, 왕기야, 동고, 저천 5개 부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너연, 주셔리, 야루기양 3개 부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해서여진은 송화강 하류역에서 거주했으며 훌룬 4부라고도 불렸고 울라, 하다, 여허, 호이파의 4개 부로 구성되었다. 야인여진은 무단강 일대와 그 동쪽의 오늘날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서 거주했다. 야인여진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제외한 다양한 집단을 통괄한 구분이었다. 건주와 해서여진에서 초기적 국가 형태가 나타나고 있었음에 반해 야인여진은 주로 씨족 단위의 거주가 유지되고 있었다.

건주여진의 통일은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킨 후 수많은 전투와 능수능란한 외교를 통해 부족들을 정복하였고, 1588년에 건주여진의 통일을 완수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해서여진과 몽골의 코르친부를 압박하자 1593년 9개 부가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이 9부의 전쟁에서 건주여진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한 9개 부는 여허, 하다, 울라, 호이파, 코르친, 시버, 구왈차, 주셔리, 너연이었다. 9부의 전쟁은 건주여진의 완승으로 종식되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1599년에 하다, 1607년에 호이파, 1611년에 야인여진의 일부, 1613년에 울라를 병탄했다. 그 결과 1616년 무렵 아이신 구룬(금국)의 건국을 선포할 때에 여허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진이 누르하치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일된 여진의 여러 부족들의 기원과 생활의 양태가 다양했고 정치적으로도 오랫동안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합병된 이들을 단기간 내에 하나의 체제 속에 융합해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어려운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준 것이 팔기 제도였다.

3 국가를 수립하다

만주어로 자쿤 구사, 즉 팔기는 누르하치가 1601년에 성인 남성 300명과 그 가족으로 니루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전부터 니루라는 이름의 수렵 조직이자 전투 단위는 1니루에 성인 남성 10~20명 정도가 포함되는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1601년 무렵 기존의 니루를 성인 남성 300명당 1니루의 큰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상시적으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 단위이자 행정 단위로 재탄생시켰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잘란과 그 상급 단위인 2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구사도 1601년 니루를 만들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4개 구사가 조직되었고, 정복전을 거치며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615년에 양황(鑲黃), 양홍(鑲紅), 양백(鑲白), 양남(鑲藍)의 4개 구사가 증설됨으로써 모두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되었다.

팔기를 만들면서 누르하치의 통치하에 포함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이 되었다. 아울러 병탄된 해서여진 부족의 백성들까지 허투알라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어서 기인으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팔기제는 군사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제도이자 사회조직이었으며 누르하치가 건설하고 확장시킨 국가 그 자체였다. 누르하치는 8개의 구사 가운데 2개를 관리하면서 팔기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갔다. 나머지 6개의 구사를 관리하는 호쇼이 버일러들은 누르하치에 의해 임명된 그의 자식들과 조카들이었기 때문에 누르하치의 권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누르하치의 권력 구축에 방해가 되거나 저항하는 자는 친족이라고 해도 제거되었다. 누르하치의 장남인 추영과 친동생인 슈르하치가 그의 중앙집권적 권력 구축 과정에서 제거된 대표적 인물이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은 여진을 넘어 몽골의 일부까지 확대되어갔다. 몽골 코르친부에 대한 누르하치의 지배력과 연대는 1593년 9부의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되어갔다. 1606년에는 내칼카 5부의 하나인 바유트부의 엉거더르 타이지가 누르하치에게 ‘쿤둘런 한(존경스러운 임금)’이라는 존호를 헌상했고,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그전에 사용하던 호칭인 ‘수러 버일러(현명한 버일러)’를 쓰지 않고 ‘한’ 호칭을 사용했으며, ‘쿤둘런 한’, ‘겅기연 한(영명한 한)’ 혹은 ‘쿤둘런 겅기연 한’을 자칭하면서 여진과 몽골에 대한 권위를 강화해갔다. 엉거더르는 1624년에 바유트 부족민을 이끌고 금국으로 이주하여 누르하치의 직접 지배하에 편제되었다.

1616년 정월 초하루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서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이때 제정된 최고 통치자로서의 칭호는 “압카 거런 구룬 버 우지키니 서머 신다하 겅기연 한”(하늘이 여러 나라를 기르라 하여 임명하신 영명한 한)이고, 국가명은 아이신 구룬(금국)이었다. 국가를 선포한 후 누르하치는 전쟁에 전력을 집중했다. 1616년부터 1618년까지 흑룡강 중류역과 무단강 동쪽 지역에 군대를 파병하여 포로를 확보하고 변경을 안정시킨 후 1618년 명에 대한 일곱 가지 원한, 즉 칠대한을 반포하고 명을 공격하여 청하와 무순을 점령했다.

명은 즉시 전쟁 준비에 돌입하여 국내 각지에서 8만여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파견에 소극적인 조선을 압박하여 동원한 조선 병사 1만 3,000명, 해서여진 4개 부 가운데 마지막까지 후금에 저항하고 있던 여허에서 동원한 병사 2,000명 정도를 더해서 총 10여 만의 공격군을 준비했고 4개 부대로 분산하여 금국을 공격했다. 이 사르후 전투는 누르하치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전투에 동원된 금국의 군사는 4~7만 명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전략이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아군의 분산을 최소화하고, 분산하여 진격해오는 적군을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각지에 척후병을 파견하여 적군의 이동을 파악했고, 시시각각 입수되는 보고를 분석하여 병력의 이동과 공격 지점을 결정했으며 빠르게 부대를 이동시켜 적을 분쇄해갔다. 그 결과 명과 조선의 병사 가운데 대략 절반이 사망했고 사르후 전투는 금국의 압승으로 종식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전투에서 발휘된 탁월한 전략 때문에 후대의 사서는 누르하치를 “용병(用兵)의 신(神)”이라고 묘사했다. 사르후 전투는 향후 동아시아의 역사가 전개되는 방향을 결정지었다. 전투 이후에 명과 후금의 우열 관계가 역전되어 명의 요동 전략은 방어전으로 전환되었고, 반대로 후금은 명에 대한 공세를 가속화해 갔다.

사르후 전투가 끝난 직후 누르하치는 승전의 여세를 몰아서 명의 개원과 철령을 함락했으며 해서여진 가운데 마지막 남은 여허를 멸망시켰다. 1621년에는 심양과 요양을 함락하고,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수도를 이동했다. 신생국가인 아이신 구룬이 피정복 부락에서 끌고 온 인구를 부양하고 국가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산지에 위치한 허투알라에서 광활한 평야지대이자 농업생산의 중심지인 요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누르하치는 기존의 요양성에서 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동경성(東京城)을 건설하여 천도하고, 요양을 중심으로 요동 지역의 한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요양에서의 한인 지배는 실패했다. 허투알라 일대에서 이동해 온 다수의 여진인을 요양의 한인들과 한 집에서 거주하도록 조치한 만한동거(滿漢同居) 정책은 요양 한인의 반발과 저항을 야기했다. 한인은 우물에 독을 풀어서 여진인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소극적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요양의 한인을 설득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학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대규모의 학살이 끝난 후 누르하치는 약 5년간의 요양 생활을 청산하고 심양으로 수도를 이동하여 새로운 궁궐을 건축했다. 명과 몽골 그리고 조선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르하치가 요동의 안정적인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명을 더 공격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성 공격을 실패했으며 새로운 수도인 심양의 궁궐이 미처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천도한지 1년 6개월이 지난 1626년 8월에 사망했다. 신생국가 금국의 내부적 통합을 강화하고 여진, 몽골인, 한인을 공존시키는 문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한에 오른 홍타이지에게 부과된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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