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전국 통일의 주역이자 조선 침략의 원흉

1537 ~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표 이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부분 (모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1 개요

한일 양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일본에서 히데요시는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입신출세를 거듭하여 혼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인물로 주목을 받는다. 더욱이 오랜 전란으로 구체제가 무너진 상황 속에서 능력만으로 천하인(天下人)에 오른 히데요시의 행적은 당시의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상징하는 존재였다. 반면 한국과 중국에서 히데요시는 이유 없는 전쟁을 일으켜 이웃 나라를 전란의 참상으로 내몰리게 만든 침략의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으며, 조선을 지원하였던 명(明)에게도 국력 쇠퇴로 인한 멸망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2 히데요시의 출생과 유년 시절

히데요시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가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에도 시대 초기에 집필된 『태합소성기(太閤素性記)』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오와리노쿠니(尾張國, 현재의 아이치현 서부) 아이치군(愛知郡)에서 부친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彌右衛門)과 모친 나카(仲)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 야에몬은 해당 지역의 영주였던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아시가루(足輕, 하급 전투원) 출신이었는데, 그가 일찍 죽게 되자 어머니는 오다 가문에 소속된 예능인 지쿠아미(竹阿彌)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새아버지 밑에서 지내던 히데요시는 이후 친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집을 나와 바늘 장수를 하면서 당시의 유력 다이묘였던 이마가와(今川) 가문의 가신으로 몸담기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오다 가문의 휘하로 들어갔다.

『태합기(太閤記)』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아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태양을 품에 안는 태몽을 꾸고 히데요시를 잉태한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전국을 통일한 뒤 히데요시가 조선에 복속을 요구하며 보낸 외교문서에도 “삼가 나의 사적을 돌아보니 비록 미천한 몸임에도 나를 잉태하였을 때 어머니가 품속으로 일륜(日輪)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미천한 출신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히데요시가 출세한 뒤 자신의 출생을 미화하려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오다 노부나가의 밑에서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아버지로부터 오와리노쿠니의 일부를 물려받은 뒤, 머지않아 오와리노쿠니 전역을 통일하였다. 더욱이 도카이도(東海道) 지역의 패자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침략을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에서 물리친 뒤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전역의 패권을 넘볼 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후일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무장 중 하나로서 통일 전쟁의 선봉에 섰던 히데요시였지만, 오다 가문의 가신단 내에서 처음부터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신발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추운 겨울날 자신의 몸으로 주군의 신발을 데웠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로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점차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히데요시는 25세가 되던 1561년 오다 가문의 가신이었던 아사노 나가카쓰(淺野長勝)의 양녀 네네와 혼인하였다. 당시 네네의 나이는 13세였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통칭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565년 노부나가가 미노(美濃, 현재의 기후현 남부) 지역에 발급한 문서에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라는 서명이 날인되어 있어 당시 오다 가문의 미노 공략에서 히데요시가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68년에 노부나가가 상경한 뒤 히데요시는 교토(京都)의 정무를 지시받았으며, 이후 반 노부나가 세력과 벌인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1573년에 적대 세력인 아자이(淺井)·아사쿠라(朝倉)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아자이 가문의 옛 영지였던 오미(近江, 현재의 시가현) 동부 지역을 영지로 하사하였다. 이리하여 노부나가 휘하의 다이묘(大名)가 된 히데요시는 자신의 성을 하시바(羽柴)로 고쳤다. 이는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히데요시의 처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 노부나가 사후의 정국

교토의 조정, 그리고 상업이 발달한 사카이(堺) 지역을 세력에 편입하여 정치·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노부나가는 포위망을 결성한 저항 세력들을 물리치고 1573년에는 자신에게 대항의 뜻을 보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마저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둔 노부나가였지만, 총애하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주도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變)’으로 인해 1582년 교토에서 장남 노부타다(信忠)와 함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서쪽에서 노부나가 세력에 대항해 온 모리(毛利) 가문에 맞서기 위해 출진하여 빗추(備中, 현재의 오카야마현 서부) 지방의 다카마쓰성(高松城)을 수몰시킨 뒤 공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리 가문 측과 곧바로 화의를 맺은 뒤, 조속히 퇴각하여 주군의 복수전에 나섰다. 히데요시의 철군에 적잖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판단하였던 미쓰히데는 준비가 부족한 채로 히데요시와 일전을 벌인 결과, 패퇴하던 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주군의 복수에 성공하여 명분을 확보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기요스(淸洲) 회의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오다 가문의 유력 가신인 가쓰이에와 나가히데, 그리고 히데요시와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4인이 참가한 가운데 노부나가의 후계자는 차남 노부카쓰(信雄)와 삼남 노부타카(信孝)가 물망에 오른 상태였으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함께 혼노지에서 사망한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인 산보시(三法師)를 안고 회의장으로 들어와 후견을 자처하였다. 게다가 나가히데와 쓰네오키가 히데요시의 편을 드는 가운데 고립된 가쓰이에는 이후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자결하였으며, 히데요시에게 함께 대항하였던 노부타카도 항복한 뒤 자결을 명받았다.

5 도요토미 정권의 전국 통일

옛 오다 가문의 세력권을 통합한 히데요시의 다음 대항마는 노부나가 생전의 동맹 세력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이에야스는 노부카쓰와 공조한 뒤 히데요시의 군세를 한 차례 물리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히데요시는 외교전을 펼쳐 노부카쓰를 회유한 뒤 저항의 명분을 상실한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여동생을 강제로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와 혼인시켰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기도 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을 회유하는 데에 진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무렵부터 히데요시는 적극적으로 조정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에 취임하였는데, 본래 섭관가(攝關家)인 후지와라 가문의 적장자에게만 한정된 자리였기 때문에 후지와라 가문의 일파였던 고노에(近衛)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586년에는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豐臣) 성을 하사받고, 이어서 조정 관위의 최고직인 다조다이진(太政大臣)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자신이 조정에서 유래한 전통적 권위 체제인 관위제(官位制)의 정점에 서서 타 세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에야스를 아군으로 포섭한 뒤, 히데요시는 본격적인 전국 통일 작업에 착수하였다.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히데요시는 허가받지 않은 다이묘들 간의 사적인 분쟁을 금지하는 지시인 이른바 ‘총무사령(惣無事令)’을 선포한 뒤, 거역한 이들을 징벌한다는 구실로 1585년에는 시코쿠(四國)를, 1587년에는 규슈(九州)를 평정하였다. 이어서 1590년에는 몸소 21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토(關東)로 출병하여 항복 요구를 거절하였던 호조(北條) 가문을 멸망시킨 뒤, 이에야스의 영지를 해당 지역으로 교체하여 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동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도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국을 통일하였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한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하여 직접 토지와 인구를 조사하였다. 히데요시가 실시한 전국적 토지 조사를 태합검지(太閤檢地)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도요토미 정권 은 고쿠타카(石高)라는 단위를 통해 일본 전역의 토지를 일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며, 다이묘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고쿠타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히데요시는 피지배층의 무력 행위를 방지하고자 백성들이 지닌 병장기를 몰수하는 도수령(刀狩令)을 지시하였는데, 이로써 무사와 농민 사이의 신분적 구획을 확정하는 병농분리(兵農分利)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규슈를 세력 하에 포섭한 뒤 히데요시는 일본이 신국(神國)임을 내세워 기독교를 통제하는 법령을 하달하고 선교사를 추방하도록 지시하였다. 일본사 연구에서는 일본 근세의 시대적 특징으로 ‘병농분리’, ‘고쿠타카제’,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른바 ‘쇄국제’를 꼽고 있다. 히데요시가 실시한 위의 정책들을 통해 일본 근세의 원형이 성립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사 내에서 도요토미 정권 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6 조선 침략

히데요시의 침략 의욕은 이미 1585년 무렵부터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唐]까지 도모할 심산’이라고 주변인들이 눈치챘듯이 일찍부터 그 조짐이 보였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공명심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더욱이 국내 통일 전쟁의 연장으로서 대외 침략을 통해 부하 무장들이 세운 군공에 대하여 은상(恩賞)을 지급함으로써 주종관계 체제를 지속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규슈 정벌을 완수한 1587년에 쓰시마(對馬)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자가 알현하자 히데요시는 조선에 국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침략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 가문은 이를 날조하여 국왕의 입조 대신 일본 통일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通信使)의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통신사로 건너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에게 히데요시는 마치 속국의 사신처럼 대우하였으며, 소 가문에게는 통신사의 귀국편에 문서를 보내 명을 정벌하기 위한 길 안내를 조선에 요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 가문은 명과의 국교 중재 요청으로 히데요시의 지시를 날조하여 전달하였다. 통신사 측도 히데요시의 야욕을 간과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일본에 대한 경계를 풀지 말도록 건의하였으며,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와 같은 자이므로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후일 그가 유성룡(柳成龍)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이는 국내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592년 3월에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은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에 몸소 입성한 뒤 병력을 파견하였다. 부산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일본군은 한양을 함락시킨 뒤 평양과 함경도까지 이르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결국 조선·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한반도 남부로 퇴각하였으며, 이후 양측은 교섭을 추진하여 1593년 6월에 강화 체결을 결정하였다.

조선과 명이 일본에 전한 강화조건은 조선에서의 완전한 퇴각, 포로가 된 두 왕자의 송환, 그리고 히데요시의 사과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을 것, 과거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이루어졌던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복구할 것, 일본과 명 양측의 대신이 각서를 교환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그리고 이상의 요구를 수락한다면 일본은 조선의 두 왕자를 반환하고, 조선은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권신이 서약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통하여 히데요시가 조선을 강화 교섭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의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사신들은 히데요시와 접견도 하지 못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명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조건과 함께 조선으로부터의 완전한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일본 측이 요구 조건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교섭은 파탄에 이르렀다. 에도 시대에 작성된 기록들은 명의 사자가 가져온 ‘국왕’ 책봉의 조서를 받고 히데요시가 분개하여 찢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히데요시는 명의 조서를 흔쾌히 받았으며, 교섭의 결렬은 양측의 요구 조건이 맞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1597년에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시작되었다. 1592년의 1차 침략이 중국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철저한 섬멸과 정복을 목적으로 한 침략이었다. 그러나 조선·명 연합군의 반격과 더불어 해상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바라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결국 이듬해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본국으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7 히데요시의 죽음과 후계자 문제

오래도록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는 1589년에 측실 요도기미(淀君)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1591년에 요절하자 낙담한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조카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이후 본인은 다이코(太閤)라고 칭하였으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대외 침략 준비에 착수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에는 요도기미로부터 또 한 명의 아들인 히데요리(秀賴)가 태어났다. 이를 계기로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히데요시와 이미 간파쿠 직을 물려받았던 조카 히데쓰구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히데요시는 이듬해 1595년 히데쓰구와 그 일족을 처형하였으며, 이후 휘하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어린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이어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사망한 뒤의 권력 체제를 정비하고자 행정을 전담하는 측근들을 고부교(五奉行)로, 그리고 유력 다이묘들을 고다이로(五大老)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1598년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고다이로의 필두였던 이에야스의 대두, 그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던 유력 무장들과 고부교 사이에서 시작된 분쟁은 결국 도요토미 정권 의 붕괴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