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무학대사

무학대사[自超]

이성계의 왕조 개창을 예견하다

1327년(충숙왕 14) ~ 1405년(태종 5)

무학대사 대표 이미지

함양 용추사 무학대사 영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는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지공(指空)에서 나옹혜근(懶翁慧勤)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아 저들과 함께 고려 말 삼화상(三和尙)으로 일컬어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게 깊은 존경을 받아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王師)가 되었다.

2 전설이 된 탄생과 성장

무학대사는 그와 관련한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대사의 가계 및 신분, 속가에서의 이름이나 성장 과정 등과 관련하여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조선 건국기 태조 이성계와의 깊은 관계로 인해 그와 관련한 수많은 설화와 야담들이 전해 내려온다. 이야기들은 대체로 무학대사의 비범함을 보이는 신이한 전설들과 이성계와의 인연 및 조선 창업과 관련된 이야기, 한양천도설을 비롯한 풍수도참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대체로 후대의 기록들이 많다. 대사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알려진 것은 양주시(楊州市) 회암사지(檜巖寺址)에 위치한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檜巖寺妙嚴尊者無學大師碑)에 새겨진 내용이다. 무학대사비는 무학대사의 입적 5년 후인 1410년(태종 10)에 왕명에 의해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으로 대사의 생애와 승려로서의 삶을 전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대사의 호는 무학(無學), 법명은 자초(自超),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시호는 묘엄존자(妙嚴尊者), 탑호(塔號)는 자지홍융(慈智洪融)이다. 삼기군(三岐郡) 사람으로 속가의 성은 박(朴)씨였으며 고려 말인 충숙왕 14년(1327)에 아버지 인일(仁一)과 어머니 고성 채씨(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훗날 숭정문하시랑에 추증되었다. 대사의 어머니가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을 하여 대사를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배움에 있어 대사를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외에 대사의 유년시절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전하는 바가 없다.

무학대사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비문에서 언급된 삼기군은 흔히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陜川)이다. 이 지역은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본향이어서 태조가 감무(監務)로 승격시킨 사실이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합천에 가면 무학대사가 어머니를 위해 숟가락으로 팠다고 하는 무학샘, 무학대사의 책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무학바위,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인 무학대사 유허지(無學大師 遺墟址) 등이 남아있어 이 지역과 무학대사와의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등 조선후기 기록류나 여러 설화에서 대사의 출생지가 충청남도 서산(瑞山)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사의 부모가 합천에서 서산으로 와서 대사를 낳아 유년시절을 서산에서 보낸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때문인지 서산에는 무학대사의 출생이나 성장 등과 관련한 전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 ‘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無學大師와 看月島 無堂寺)’, ‘토끼섬과 무학대사’, ‘무학대사가 잡아준 묫자리’와 같은 설화들이 전하며 그 중 대사의 신이한 탄생 및 이름과 관련한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가 유명하다. 그 내용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사는 여인이 출산을 앞두고 장에 어리굴젓을 팔러 나가던 길에 숲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신생아를 데리고 장에 갈 수 없어 수풀로 덮어두고 장에 다녀왔더니 학 한 마리가 아이를 감싸 보호하고 있다가 ‘무학’이라고 울며 날아가 학의 그 울음소리를 땄다거나, 학들이 아이를 둘러싸고 춤추고 있었다고 하여 무학(舞鶴)이라고 이름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설화를 바탕으로 1991년 서산시 인지면에 무학대사기념비(無學大師 紀念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비문의 내용과 설화의 유포지역이 다른 것으로 인해, 합천 출신인 무학대사의 부모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충청남도 서산으로 옮겨갔을 때 무학대사를 낳았고 이후 다시 합천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무학의 출생지뿐 아니라 무학대사의 속가 이름도 알기 어려운데, 비문에서 언급한 무학(無學)과 자초(自超)는 각각 법호와 법명이다. 속설에 무학(舞鶴), 무학(無學), 무심, 용문 등의 다양한 이름이 전해지며 속가의 이름이 무학(舞鶴)이어서 출가 후 이름을 무학(無學)이라고 하였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태조실록』이나 『태종실록』에서는 대부분 자초(自超)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입적 후에 무학(無學)을 쓰고 있고, 무학(無學)이란 불교의 수행 과정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 번뇌를 없애고 열반의 경지에 오르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이 이름은 속명이 아닌 법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승려를 지칭할 때 법명을 사용하므로 ‘자초’라고 불러야 하나 세간에 ‘무학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어 여기서는 법호인 ‘무학’으로 부르고자 한다.

3 출가와 정진

비문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혜명국사를 찾아가 불법을 배우며 용문산 부도암에 머물렀는데 『능엄경』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더욱 수행과 공부에 정진하였다. 이후 진주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로 거처를 옮겨가며 공부에 게으르지 않다가, 스물 여섯 살이 되던 1353년(공민왕 2) 가을에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무학대사는 연경에서 인도승려인 지공화상을 만나는데 여기서 지공은 무학의 깨달음을 알아보고 “고려인이 모두 죽겠구나.”라고 인정하는 말을 하여 좌중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뒤이어 법천사로 가 나옹 혜근선사를 만났는데 혜근 역시 무학의 됨됨이를 알아보았고, 이후 영암사에서 재회했을 때 무학은 혜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그 깨달음을 인정받게 된다. 연이어 오대산 등의 산천을 유람하고 강절(江浙)지역 등으로 내려가고자 하였으나 전란으로 길이 막히자 1356년(공민왕 5)에 귀국하였다.

무학대사의 3년간의 원나라 유학기간 행적 중 특기사항은 지공과 혜근을 방문하여 도를 인가받은 일이다. 원나라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조우는 우연하고 일시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지공은 인도 마갈타국 출신의 고승으로 원나라 연경에 와서 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유학 온 혜근을 만나 선을 전수하는 인물이다. 훗날 고려에도 들어오는데 석가모니의 후손으로 고려인들에게 깊이 존숭받았다. 지공은 고려에 잠시 머무는 동안 법기보살(法起菩薩)이 머무는 곳이라는 금강산에 예배하고 연복정(延福亭)에서 계를 설하였으며 경기도 양주 천보산 자락이 인도의 나란타사가 있는 곳과 비슷하다 하여 절을 세울만한 자리로 가리키기도 하였다. 고려는 그곳에 262칸의 큰 절을 중창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주 회암사이다.

혜근은 무학에게 깨달음을 인가한다는 의미로 의발을 전수한 스승인 동시에, 고려 말 임제간화선풍을 현양한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에서 10여 년에 걸친 구법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공민왕의 후원을 받으며 신돈(辛旽)이 실각한 후 왕사로 임명되었고 살아있는 부처라고까지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 이후 그의 문도들은 여말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무학대사는 그의 고제(高弟) 중 한 명이었다.

무학대사는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공민왕 8), 혜근이 귀국하여 머물고 있던 원효암으로 찾아가 불자(拂子)를 전수받았다. 이후 혜근이 신광사로 옮기자 무학도 그쪽으로 옮겨갔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 고달사 탁암에서 은거 수행하였다고 한다. 1371년(공민왕 20)에는 혜근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자 송광사에 머물면서 무학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보내주어 그 깨달음을 인가하였다.

무학대사는 원나라 유학 후 귀국하여 대체로 은거하며 수행에 몰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76년(우왕 2) 혜근이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낙성회를 열면서 대사를 수좌로 두고자 하였으나 사양하며 별실에 따로 머물렀다. 같은 해 혜근이 입적하고 난 후에는 전국을 유력하며 공양왕이 왕사로 봉하고자 하여도 매번 응하지 않았다.

4 활동 : 이성계와의 인연

무학대사는 스승 혜근이 입적한 후 1392년까지, 지공과 혜근의 추모 불사에 참여했을 뿐 나머지는 대체로 명산대찰을 유력하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1384년(우왕 10) 이전 언젠가 청계사 주지를 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 외의 뚜렷한 행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문 외의 자료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은 설봉산 토굴에서 은둔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인연은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가 쓴 『설봉산 석왕사기』 에 자세히 전한다. 이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설봉산의 토굴에 숨어 이름을 숨기고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수행하고 있었는데, 1384년(우왕 10) 무렵 이성계를 만나 왕조 창업을 모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록에서도 찾아지며, ‘석왕사(釋王寺)는 왕업이 일어난 곳’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설봉산 석왕사기』에서 전하고 있는 그들의 만남은 다음과 같다. 1384년(우왕 10) 이성계는 함경북도 남쪽의 학성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일만 집의 닭들이 ‘꼬끼오’하고 일시에 울고 일천 집에서 일제히 다듬이 소리가 났으며, 낡은 집에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왔고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져 깨지는 꿈이었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웃 노파에게 해몽을 부탁했더니 그 노파가 사양하며 흑두타라 불리던 수행자, 무학대사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방문하여 해몽을 듣게 되는데 이 때 무학이 이 꿈을 임금이 될 것을 예고하는 꿈으로 풀이하였다는 것이다. 일만 집의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꼬끼오=고귀위(高貴位))를 축하하는 것이고 일천 집의 다듬이 소리란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며,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 또 서까래 셋을 사람이 지면[負] 임금‘왕(王)’자(字)가 된다고 하였다는 해몽이 바로 그것이다. 해몽 후 머물던 절의 이름을 왕의 꿈을 해석한 절이라 하여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3년을 기한으로 5백 성인을 모셔다 재를 드리면 왕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여, 이성계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3년 동안 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무학대사가 스승 혜근과 이성계의 부친 묫자리를 잡아 주었다거나 여러 사찰에서 무학이 이성계와 함께 조선 창업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는 등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각별한 존경을 받던 무학대사는 조선 개창 직후 3개월 만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개성에 와서 1392년(태조 1) 10월 9일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는 조선의 첫 번째 왕사로 책봉된 후 태종조에 입적하기까지 13년에 걸쳐 재임하였으며, 고려 이래의 국사·왕사제도(國師·王師 制度)가 적용된 마지막 승려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사가 되었다. 불교국가로서의 상징적 제도였던 국사·왕사제도는 무학 이후 조선에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왕사로 책봉된 후 1393년(태조 2)에 무학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도읍터를 물색하러 다닌다. 비문에는 처음에 태조가 지세를 살펴 수도를 세우기 위해 무학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하자 사양하였는데, 태조가 거듭 청하여 계룡산등 신도(新都)의 후보지를 돌아보는 길을 함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393년(태조 2) 1월 21일경 출발하여 계룡산을 돌아보았으며 1394년(태조 3) 8월에는 태조의 부름으로 무악(毋岳)과 한양의 지세를 살피러 나섰다.

태조의 신임 아래 새로운 도읍터를 정하는 논의에 참여한 무학과 관련하여 그 풍수도참에 대한 능력과 신이함, 신도 선정과정에서 정도전과의 갈등, 한양천도설과 건원릉(健元陵) 터를 정한 기연 등을 보여주는 여러 이야기가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에 전해지고 있다. 그 기록에는 무학이 왕사가 되자 바로 한양을 신도읍지로 점쳐 말하기를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그 터가 동향이므로 정도전이 이에 난색을 표하며 반대하자 무학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2백년 후 자신의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산설림』에 전해지는 야담들은 대체로 정도전(鄭道傳)을 폄하하고 신라의 의상대사까지 끌어와 승려인 무학의 한양천도설이 옳았음을 대변하고 있어 흥미롭다.

왕사 책봉 이후 무학대사는 태조의 청으로 신도읍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참여한 것 외에는 대체로 하산소인 회암사에 머물며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였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王子-亂)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회암사를 사직하고 양평 용문산으로 물러나는 등 회암사로의 복귀와 사직이 반복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태조 6) 무학대사를 위해 무학 생전에 회암사 북쪽에 부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회암사지 무학대사자지홍융탑이 그것인데, 무학의 입적이 1405년(태종 5)이니 그 8년 전에 미리 부도를 만든 셈이다. 무학대사는 1405년(태종 5)에 금강산 금장암(金藏菴)에서 세수 79세로 입적하였다.

5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의 간행과 삼화상의 계보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및 한양 천도와의 관련성으로 인해 풍수도참의 술승(術僧)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불교 승려로서 무학대사를 주목하였을 때 특기할만한 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 지공과 혜근을 잇는 조파(祖派)를 확정하였다는 것이다. 무학은 1393년(태조 2) 혜근의 진영을 제작하는 불사를 하고 1394년(태조 3)에는 지공과 혜근의 부도에 탑명을 새기는 등 스승들의 추모 사업을 주관하였다. 아울러 지공화상에서 나옹혜근을 이어 자신에 이르는 조파도를 확정하여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로 간행하여, 이른바 고려 말 삼화상의 계보를 완성하였다.

무학대사는 생전에 영아행(嬰兒行)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보살의 다섯 가지 행 중 하나로 어린 아이 같은 지혜와 행동을 비유한 것이다. 원래 보살의 지혜는 수승하나 지혜가 얕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작은 선행을 하는 것이다. 무학의 영아행은 지공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무학대사의 행적을 보면 스승인 지공과 혜근, 특히 혜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임제선풍을 견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일단 그의 출가가 이미 송광사여서 수선사 계통의 임제종(臨濟宗) 간화선(看話禪)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승 혜근이 조주(趙州)의 돌다리 쌓는 화두를 꺼내어 선문답을 던졌을 때 조주의 수좌도 답하지 못했던 것을 무학이 받아 답했다는 것은 그 깨달음의 경지가 높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혜근에게 임제선풍을 사사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무학대사는 수선사 계통의 임제종 간화선풍 위에 지공의 선사상을 수용하여 조선 초 불교계의 선풍을 진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학대사의 대표적 문도로 기화(己和)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외에 『인공음(印空吟)』 이 있어 목은 이색(李穡)이 그 서문과 발문을 썼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