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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30년간 세자로서 세종을 보필하다

1414년(태종 14) ~ 1452년(문종 2)

문종 대표 이미지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즉위 이전의 활동

문종의 이름은 향(珦)이며, 자는 휘지(輝之)이다. 1414년(태종 14년) 충녕대군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할 무렵 조선은 건국된 지 약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할아버지인 태종은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맏아들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세워 적장자 왕위계승에 대한 의중을 일찌감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문종이 출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의 이 선택은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이었으며, 문종 개인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건이었다.

문종의 어머니는 훗날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되는 심씨였고, 외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인 심온(沈溫)이었다. 문종은 세종이 즉위한 이후 1421년(세종 3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유년 시절 그는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한 세자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도 의젓한 모습을 보여 사신과 대신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또한 형제들과의 우애도 돈독했다고 전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세종이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본인의 침식을 잊고 세종의 간호에 극진한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문종은 일생동안 처복이 지독히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427년(세종 9년) 상호군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이 세자빈 김씨가 궁중에 들어온 이후 문종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온갖 미신적인 술법을 쓰고,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방중술(房中術)까지 배웠던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세종은 김씨가 세자빈으로 적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궁에서 내쫓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문종의 첫 결혼생활은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 종부소윤 봉여(奉礪)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는데, 세자빈 봉씨의 행적은 앞서 김씨보다 한 술 더뜨는 것이었다. 봉씨는 당시 후궁이었던 권씨가 임신을 하자 이에 대해 분개하는 한편, 문종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궁인들을 사주하기도 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음주를 하는가 하면 음식을 몰래 숨겨두고 먹는 식탐을 부리기도 하였다. 또 궁궐 내에서 소쌍(召雙)이란 궁인을 사랑하여 동성애를 행한 정적도 드러났다. 이러한 행실에 대해 중궁이었던 소헌왕후 등이 몇 차례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결국 행실을 고치지 못하였고, 세종은 고심 끝에 봉씨 역시 폐출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은 본래 후궁으로 있었다가 봉씨의 퇴출 이후 세자빈이 된 훗날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였다. 권씨는 권전(權專)의 딸이었는데, 1431년(세종 13년) 동궁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 그러다가 봉씨가 폐출된 이후 1436(세종 18년) 세자빈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권씨 역시 세자빈이 된 지 5년 만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였는데, 그 아이가 훗날 왕위에 오르는 단종이었다. 권씨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단종의 생모라 하여 작위를 추탈당하기에 이르렀는데, 16세기 사림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져 결국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정치사의 중요 문제였던 ‘소릉(昭陵) 복위문제’ 이다. 이처럼 문종은 모두 세 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결국 그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모두 폐출되거나 사망하였다.

문종은 세종의 건강 악화로 국정 운영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평소부터 안질을 비롯하여 여러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말년에는 이러한 지병이 더욱 심해져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러자 세종은 옛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세자의 직무 수행을 위하여 첨사원을 설치하고 국정 현안을 여기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단 세종의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적장자인 문종이 국정에 참여하여 이후 왕위 계승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한 포석이 깔린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까지 단 한 번도 적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이 없었기 때문에, 문종의 적장자 계승은 향후 왕실의 질서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무리 없이 국정을 운영해 나아갈 수 있었다.

2 즉위 이후의 생애와 업적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1450년(문종 즉위년) 35살의 나이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세종에 대한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문종도 승하하여 그의 재위 기간은 2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짧은 재위 기간임에도 몇몇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세종대부터 추진해온 국가의 중요 사업들을 무리없이 계속 추진하면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문종대 정치적인 중요 사건으로는 심온의 복권을 들 수 있다. 심온은 세종 즉위 초반에 태종에게 사사되었고 관직도 추탈되었는데, 심온이 상왕인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심온의 옥사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이 사건은 세종의 외척이 발호하게 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태종의 정치적 의도에서 조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당대관료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심온에 대한 복권논의는 이미 세종대부터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부친인 태종의 명을 본인 대에서 고치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사안은 다음대인 문종대에 들어와 해결을 보게 되었다. 심온의 명예를 복권시키는 논의에 대하여 당시 대신들은 거의 반대의견을 표명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간들도 몇 차례 형식적인 상소를 올리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심온의 복권으로 아들인 심회(沈澮)·심결(沈決)은 조정에 출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도 청송 심씨들은 이후 관직에 꾸준히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문종은 세종대부터 정비되어온 정치 제도의 틀을 잘 준수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의정부서사제에 입각하여 현안을 처리하고, 경연을 실시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야대와 윤대를 통해 자주 접견할 수 없는 신료들을 만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문종은 윤대에 들어와 접견할 수 있는 신료들의 자격을 종전의 4품에서 동반 6품, 서반 4품까지 확장하였다. 6품은 각 조의 좌랑 및 여타 부서의 실무진 급에 해당하며, 장원급제하여 이제 막 관원이 된 경우까지도 포함하는 범위였다. 윤대는 비단 관료들의 의견을 국왕에게 전달하는 계기가 될 뿐 만 아니라 국왕 입장에서도 관료 개개인의 식견과 능력을 직접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건강치 못한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윤대에 들어오는 신료의 범위를 넓힌 것은 문종이 가진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한편 문종은 경기도 마전현(麻田)에 숭의전을 설치하여 전 왕조인 고려의 국왕들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본래 고려왕들에 대한 제사는 태조대 처음 실시되었는데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태조를 비롯한 일곱 명의 왕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세종대에는 고려의 태조 왕건(太祖 王建), 현종[고려](顯宗), 문종[고려](文宗), 원종[고려](元宗)의 네 신위만 남겨 제사를 지내도록 한 바 있었다. 문종이 즉위한 이후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고, 사당을 증축하여 명칭을 숭의전이라고 고쳤다. 또한 왕의 위패뿐만 아니라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冲),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 16명의 고려 충신들도 배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숭의전이 속한 마전현도 군으로 승격시켰다.

위와 같은 정치적인 업적이 있던 반면 문종이 신료들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 바로 불교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본래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국시로 표방하였지만, 신라대 이후 고려시기를 거치면서 뿌리 깊게 자리한 불교적 전통을 삽시간에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당대 관료들은 대부분 친불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집권하고 강력한 불교 탄압 정책을 실시하고 뒤이은 세종 역시 본인 집권 중반까지는 이러한 정책 기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종 말년, 소헌왕후가 사망한 이후부터는 불교에 귀의하기 시작하여 궁궐 안에 내불당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문종을 비롯한 여러 대군들도 모두 친불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종은 공식적으로 자신은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며, 여러 불사들의 진행 역시 본인이 아닌 동생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친들의 불사뿐만 아니라 문종 자신도 여러 사찰을 중수하는데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였고, 세종의 국상 중에도 여러 차례 불사를 진행하는 등 친불교적인 모습을 자주 노출하였다. 이러한 문종의 친불정책은 그의 재위기간 내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말년의 세종과 새로 즉위한 문종의 호불 취향은 단순히 사상적인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인 폐단을 낳았는데, 바로 승려에 의한 공물대납이 성행하면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된 것이었다. 본래 공물은 각 지방의 수령이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직접, 조금씩 거두어서 서울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대납이란 바로 이러한 공물을 특정한 개인이 미리 관청에 납부한 다음, 원래 물건을 납부해야 하는 지역에 가서 공물값을 쌀이나 면포 등으로 거두는 것을 말한다. 만일 대납이 적당한 가격에 이루어진다면 백성입장에서도 물건의 운송 등에 들어가는 수고를 아낄 수 있어 서로 환영할 만한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납의 값을 너무 비싸게 거두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대납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 말년부터는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대납을 허용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승려들의 경우 대납을 통해 수익을 얻는 것 역시 인정해 주고 있었다. 문종대에 와서 이러한 승려들에 의한 대납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는데, 당시 대납의 대가로 꿀 1말에 쌀 100말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상당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관료들은 문종의 호불 성향과 더불어 이러한 대납 폐단을 당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이러자 문종 역시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고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납은 종전과 같이 일부 품목에 대해, 그리고 승려들에 의한 대납만을 허용하는 원칙은 고수하되 물품별로 대납의 공정가를 정하여 백성들에게 더 거두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상정하게 되었다. 이 정책의 시행은 비단 당시 승려들의 대납 폐단에 대한 시정이란 측면 뿐 아니라 이후 세조대 전면적인 대납 허용 정책의 시발점이 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한편 문종은 유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군사제도와 무기제작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우선은 세종대 말년부터 꾸준히 진행되었던 화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문종대에 들어서는 수레에 신기전을 탑재한 화차를 제작하였고, 이를 변방 일선 고을에 실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화차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다연장포와 비슷한 것으로, 한 화차에서 중신기전 1백 개 혹은 총통 50발을 연달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화차의 개발과 아울러 화기를 운용하는데 필수적인 염초의 조달을 위해 전국에 염초도회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도회관이란 본래 국가가 어떤 특정업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여러 고을을 하나의 단위로 묶고 그 중심에 도회관을 설치하여 해당 업무를 수행하게 만든 것이다. 예컨대 노비소송이나 호적발급과 같은 사안이 발생할 때 도회관을 설치한 경우가 있었다. 문종은 이러한 도회관제를 특정 물품을 생산하고 조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하였는데, 이후 도회관제는 철이나 광산물을 채취하는 방법으로도 널리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염초도회관은 이후 화기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줄어들고, 물자 생산을 위해 백성들이 거주지에서 도회관까지 이동해야 하는 불편 등이 제기되면서 세조-성종 연간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무기개발 뿐 아니라 문종은 병력을 움직이는 전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군사의 운용 방식과 훈련 방식을 새롭게 개정하여 진법을 만들도록 명하고 이것이 완성되자 『어제신진서』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는 시기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이민족과의 전쟁을 기술한 『동국병감(東國兵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동국병감』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사 기술로서, 특히 고려시대 부분에서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도 수록되지 않은 내용이 첨가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각종 역사서를 광범위하게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동국병감』 역시 수양대군이 실무책임자로 활약하였는데, 아쉽게도 문종 당대에 완성되지 못하고 단종대 이르러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세종대까지 내려오던 군사제도를 개혁하기도 하였다. 당시 군사제도는 3군을 두고 각 군은 4개의 사(司)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진법 체계는 다섯 개의 진을 전, 후, 좌, 우, 중앙에 배치하는 형태여서 3군 12사 체제와는 서로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이에 문종은 3군 12사를 5사로 개편하고 대다수의 병종을 5사내로 편입시키는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선 지휘관인 호군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여 각 단위 부대가 효율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 5사로의 개혁은 이후 세조대 오위로 개편되었는데, 5위 체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에도 수록되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 중앙군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업적 외에 문화적, 사상적인 업적도 적지 않았다. 우선은 고려사의 편찬 작업을 들 수 있다. 전대 역사에 대한 정리는 조선 개국 직후부터 추진되어 여러 편의 고려사가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각 편찬자의 시각 차이에 따라 내용이 다른 것도 있었고, 사실 자체에 대한 기록이 너무 소략하여 역사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세종이 김종서와 정인지로 하여금 고려사를 정리하여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문종대 들어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였다. 특히 『고려사절요』는 『고려사』 작업이 완성되자 바로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1년 만에 그 결실을 맺었다.

또 제왕학의 교재로 자주 활용되었던 『대학연의』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대학연의』는 태조 이성계도 경연에서 자주 열람하였던 서적이었고, 태종과 세종 역시 애독하던 책이었다. 문종도 『대학연의』를 애독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즉위 이후 처음 경연에서 사용하였던 교재가 『대학연의』였다. 문종은 이 책에 대하여 임금뿐 만 아니라 대신, 종친도 모두 보아야 할 책으로 평가하였고, 여기에 상세한 주석을 달도록 명하였다. 특히 이를 당시 좌사간대부였던 최항에게 명하였는데,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특별히 그의 직무를 집현전부제학으로 바꿀 만큼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이 책이 완성되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3 사후의 평가와 가계의 계승

문종은 세 번째 부인이었던 현덕비 권씨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종 이후 왕위를 계승한 단종이었다. 딸은 영양위 정종(鄭悰)과 혼인한 경혜공주(敬惠公主)였다. 정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역모에 연루되어 세조 즉위 이후 유배되었다가 1461년(세조 7년) 능지형으로 사사되었다. 한편 두 번째 부인이었던 폐빈 봉씨 사이에서도 딸 하나를 두었는데, 반성위 강자순(姜子順)과 혼인한 경숙옹주(敬淑翁主)였다.

문종은 사후에 종묘에 안치되었으나,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비는 노산군의 생모라 하여 종묘에서 신주가 폐출되는 일을 겪게 되었다가 1513년(중종 8년) 당시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들의 건의로 다시 문종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었다. 이후 1569년(선조 2년) 문종의 신주는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되었는데, 반면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불천신주가 되어 오늘날까지 종묘 정전에 그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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