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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구[閔無咎]

태종의 처남, 죽임을 당하다

미상 ~ 1410년(태종 10)

민무구 대표 이미지

마천목좌명공신녹권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민무구는 민제(閔霽)의 아들이고,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오빠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고려 말의 세족이었다. 민무구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원경왕후의 출생연도가 1356년(공민왕 14)인 점을 고려하면 대략 1350년대 전반기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생으로는 민무질(閔無疾),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 태조대에는 민무구 관련 기록이 없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그의 활약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태종의 집권을 도와 공신에 책봉되었고, 이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태종은 외척을 제거함으로써 국왕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1407년(태종 7) 민무구는 자신의 아우인 민무질과 함께 불충(不忠)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태종의 명으로 자결하였다.

2 태종의 집권을 돕다

민무구, 민무질은 두 차례 왕자의 난에 참여함으로써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의 집권에 기여하였다. 그 후 민무구 형제는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태종 즉위 이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다. 그들은 외척이기도 했지만 공신 관료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면서 점차 위세가 높아졌다.

이와 같은 민무구 형제를 견제하는 목소리는 태종 집권 초기부터 있었다. 상장군 이응(李膺)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종에게 민무구 등에 대한 총애가 극진하므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응이 다른 이유로 인해 탄핵을 받는데, 이를 두고 태종은 민무구가 사헌부를 부추긴 결과로 판단하였다.

태종대 초기에 민무구 형제는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총제(摠制), 참지승추부사(參知承樞府事), 도병마사(都兵馬使) 등의 군직을 주로 역임하였고, 민무질은 두 차례 명 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태종은 둘째 딸 경정궁주(慶貞宮主)를 조준(趙浚)의 아들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보낼 때에 주혼자(主婚者)를 처남 민무구에게 맡기기도 했다.

3 민무구, 민무질 옥사

민무구, 민무질 옥사의 발생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수많은 탄핵 상소에서 언급된 여러 이유는 외척의 정치적 세력 확대에 대한 반감과 함께 확대 생산되고 있었다. 옥사 발생 직전 1407년(태종 7)에 민무구 가문에서 하륜 (河崙), 조박(趙璞), 정구(鄭矩) 등과 함께 세자와 명 황녀와의 정혼을 추진하였던 일도 배제하기 어렵다. 결국 정혼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태종은 국가의 중대사가 민씨 집안을 중심으로 거론되는 상황이 불만이었다. 그들이 명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권력 확대를 시도했다는 점도 태종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정혼 논란이 사그라질 즈음에 민무구, 민무질 옥사가 발생하였다.

민무구, 민무질 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407년(태종 7)으로, 영의정부사 이화(李和) 등의 상소로 인해서였다. 권력 남용, 불충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죄목이 거론되었다. 이듬해에는 태종이 민무구·민무질의 죄를 10가지로 설명하기도 했는데, 가장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1406년(태종 6)에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에서 왕위를 주려하다가 철회했을 때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세자를 제외한 다른 왕자들을 없애서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 셋째, 임금의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병권을 내놓았다고 말한 것 등이다.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탄핵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그들의 아버지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제가 아들들의 처벌을 자청하여 유배된 후에는 탄핵이 줄었다. 하지만 민제의 병이 위중해지고 결국 1408년(태종 8)에 세상을 떠나면서 탄핵은 다시 거세졌다. 태종은 민무구, 민무질이 공신이기 때문에 목숨만큼은 보전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탄핵을 유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민무구 형제에 대한 죄목을 추가적으로 언급하면서 오히려 탄핵을 유도하기도 했다. 민무구, 민무질 옥사는 약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고, 그동안 그들의 죄목을 발굴하고 실증하는 과정이 계속 행해졌다. 결국 1410년(태종 10)에 제주에서 왕명으로 두 사람이 자결함으로써 옥사는 일단락되었다.

옥사의 여파는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민무구 형제와 관련하여 탄핵을 받은 사람들은 이른바 거물급의 관료가 많았고, 그만큼 정국에 미치는 파장도 컸다. 우선 태종대 관료사회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하륜 도 민제를 비롯하여 민씨 가문과 오랜 교유가 있었다. 그는 민무구 등을 가볍게 처벌해야 한다고 언급했다가 태종의 핀잔을 듣기도 했고, 민씨 가문의 일파로 지목되어 탄핵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륜 은 태종이 적극적으로 비호하여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조박, 김첨(金瞻), 조희민(趙希閔), 유기(柳沂), 박은(朴訔) 등도 민무구 형제와 관련되어 탄핵을 받았다.

그들의 처벌에 대해 부당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지성(李之誠)이 명에 사신으로 간 세자에게 민무구의 무죄를 말하였다가 논란이 되었고, 이빈(李彬)은 윤목(尹穆)에게 민무구의 무죄를 이야기했다가 이무(李茂), 강사덕(姜思德) 등 여러 사람을 연루시켰다. 특히, 이무가 관련되면서 옥사가 커졌다. 그를 비롯하여 윤목, 이빈, 강사덕, 조희민, 유기(柳沂) 등이 사형당하거나 귀양 등의 처벌을 받았고, 그 친척까지도 대거 연좌되었다. 거기에 조희민의 아버지인 조호(趙瑚)가 이무를 왕이 될 만한 재목으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터져 나옴으로써 또 다른 연루자들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연달아 옥사가 발생했다는 것은 민씨 일가의 세력화 규모가 그만큼 컸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민무구, 민무질 옥사는 여흥 민씨 세력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인 1415년(태종 15)에는 아우 민무휼, 민무회의 불충이 논란이 되었고, 결국에는 아우들 역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원경왕후도 태종과 사이가 좋지 못한 터에 그 형제들이 연달아 옥사에 휘말리면서 폐출 논의까지 행해졌다. 비록 왕후의 폐출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민무구를 비롯하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형제는 모두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4 태종의 외척 제거

태종은 외척을 왜 제거했던 것일까? 태종은 외척이 종묘사직의 안정에 가장 해로운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외척에 대해 ‘싹이 트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태종은 외척이 실제로 저지른 죄목을 밝히기보다는 향후 국왕의 권력을 저해할 여지가 있는지를 우선 고려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척 제거의 배경을 따져보면, 무엇보다 태종 자신이 권력을 획득했던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형제들을 죽이고 얻은 권력은 불안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은 외척 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 있는 많은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국왕 권력의 안정을 꾀하였다. 더욱이 제도적으로는 외척의 정치적 참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에는 외척을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배제를 완벽히 이뤄낼 수밖에 없었다. 그후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까지도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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