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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閔霽]

태종의 장인, 조선 최초의 국구

1339년(충숙왕 후8) ~ 1408년(태종 8)

민제 대표 이미지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鄭津開國原從功臣錄券)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1 출생과 관직생활

민제의 호는 어은(漁隱), 자는 중회(仲晦)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고려 말 여흥 민씨는 충선왕대의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포함될 정도로 세족(世族)이었고, 민지(閔漬), 민사평(閔思平) 등 성리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도 배출했다. 민제의 아버지는 주로 간관직을 맡았던 민변(閔抃, ?∼1377, 우왕 3)이다.

민제는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말에는 전공예의판서(典工禮儀判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겸예조판서(兼禮曹判書) 등 의례와 관련된 직임에 주로 임명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대에는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고, 정종대에 사위 이방원(李芳遠)이 세자에 책봉되고 난 후에는 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국구(國舅)로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책봉되었고, 그 후 안태사(安胎使), 수성 도통사(守城都統使)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태종대에는 대체로 관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주요 현안에는 의견을 제시하며 정치활동을 이어나갔다.

2 조선 최초의 국구가 되다

민제가 이성계(李成桂)와 사돈을 맺게 된 시기는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인 1382년(우왕 8)이다. 민제는 그녀의 딸을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이성계는 홍건적, 여진, 왜구 등의 외적을 물리치면서 전공을 쌓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승전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 성과가 밑거름이 되어 이성계는 정치적 성장을 했고, 세족과 혼인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혼인 관계는 이성계의 건국 과정에도 도움이 되었으리라 판단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우선 기록상 고려 말 민제의 활동은 의례와 관련된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권력관계의 변동에 깊이 개입했다고 볼 만한 사료는 없다. 다만 그의 동생 민개(閔開)는 고려 말에 이성계 세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시해된 이후 민개는 대사헌으로서 정몽주의 당여를 유배시키는 과정에 개입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를 때 민개는 유일하게 기뻐하지 않았다는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제, 민개는 모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1,500명 정도에 이르는 개국원종공신 책봉은 건국 초기의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고, 그에 따라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대거 포함되었다. 민제, 민개 형제가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된 배경에는 이성계와의 사돈관계가 가장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또한 민제의 사위 조박(趙璞)은 개국공신이었다.

기록상으로 민제는 이방원의 집권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딸 민씨가 은밀히 병장기를 준비하면서 남편 이방원의 군사력에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아들 민무구, 민무질 등도 왕자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집안사람들이 왕자의 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민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정종이 즉위한 이후 민제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태조대에 정당문학, 삼사우복야 등을 맡았고, 정종대에는 판삼사사, 우정승, 좌정승 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 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정탁(鄭擢)과 함께 문과를 주관하기도 했다. 당시 정종이 국왕이기는 했지만, 정치세력이 세자 이방원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던 상황에서 장인 민제는 세자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 민제는 조선 최초의 국구가 되었다. 태조의 장인 한경(韓卿), 강윤성(康允成), 정종의 장인 김천서(金天瑞) 등은 조선 건국 이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왕조 최초의 국구는 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척으로서 누리게 된 권력은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몰고 갔다.

3 외척으로서의 삶

고려 말 이방원은 혼인한 후 일반적인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의 습속에 따라 한동안 처가에서 생활하였고, 장인과 사위의 관계도 원만했던 듯했다. 태종은 어렸을 때 처가에서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고, 민제는 사위를 자신의 친구인 하륜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즉위 이후에도 태종은 종종 민제의 집에 행차하여 주연에 참석하였다. 사석에서는 민제가 태종에게 ‘선달(先達)’이라고 호칭하고, 태종이 민제에게 ‘사부(師傅)’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407년(태종 7)에 아들 민무구, 민무질의 불충(不忠)이 논란이 되면서 민제의 가문은 위기를 맞았다. 민무구 형제가 세자에게 기대어 국가를 장악하려 했고, 다른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태종이 자신들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을 말하고 다녔다는 혐의도 있었다. 또한 그 전년도인 1406년(태종 6)에 태종이 갑작스럽게 세자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선언했을 때 민무구 형제가 기뻐하다가 태종이 이를 철회하자 좋아하지 않는 표정을 내비쳤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민제는 하륜, 조영무 등과 더불어 태종의 전위(傳位) 선언에 반대했었는데, 아들들은 상반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탄핵이 거세지자 민제는 직접 아들들의 유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유배된 후 사건은 잠잠해지는 듯했지만, 민제의 병문안을 위해 민무구, 민무질이 소환되면서 탄핵은 다시 빗발쳤다.

민무구, 민무질 옥사가 장기화되면서 사간원에서는 민제의 세력화를 경계하는 내용으로 상소하기도 했다. 조호(趙瑚), 김첨(金瞻), 허응(許應), 박돈지(朴惇之) 등을 불러 붕당을 맺고 있으니,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민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민제는 1408년(태종 8)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앞서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간 지 약 4개월 후의 일이었다.

한편, 사간원 상소에서 거론된 인물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민제가 임종했을 때 남몰래 찾아간 김첨이 하옥되었고, 조호는 이무(李茂)가 제거될 때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허응은 병사하였고, 박돈지는 1410년(태종 10) 이후 기록이 없다. 민제의 집에 출입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의 당여로 지목되었던 이들도 대거 유배되었다.

사후 평가가 담긴 민제의 졸기(卒記)에는 아들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너희들이 매우 교만하니 고치지 않으면 분명 패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민제가 죽은 이후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탄핵은 더욱 거세졌다. 1410년(태종 10) 태종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민제가 죽은 이후에도 가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415년(태종 15)에는 민무휼, 민무회의 불충이 논란이 되었다. 민무회가 염치용(廉致庸)의 노비 소송에 대한 의견을 충녕대군에게 말했고, 충녕대군은 이를 국왕에게 고했다. 이는 결국 국왕의 판결이 뇌물을 받은 사람들의 청탁으로 행해졌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탄핵이 이어지던 과정에서 세자 양녕대군이 2년 전에 민무휼, 민무회와 있었던 일을 공론화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다. 양녕대군이 ‘민씨 가문이 교만 방자하여 화를 입은 것이 마땅하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민무회가 반발하였고, 민무휼이 이를 감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듬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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