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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

서얼출신의 대표적 실학자

1750년(영조 26) ~ 1805년(순조 5)

박제가 대표 이미지

송만덕귀제주시(送萬德歸濟州詩)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 말라!

박제가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대표적인 북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홍대용이 자연과학적 소양으로, 박지원이 문사적 기질로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의 기본 논리를 만들어 나갔다면 박제가는 경세론가로서 그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세계관 혹은 문화의 개조를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공통의 가치와 지향을 갖고 있었다.

북학론으로 대표되는 박제가 경세론의 내용은 크게 가난의 구제와 습속의 개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난의 구제를 위한 각종 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고루한 습속의 개혁을 위해 진보적인 사회사상을 개진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의 저서 북학의에 정리되어 있다. 현재의 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의 습속에서는 하루아침도 살 수 없다는 말은 ‘조선의 왕안석’이라는 별칭과 함께 그의 경세론이 갖는 급진성을 잘 보여준다.

박제가는 4차례의 연행을 통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청나라가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상속의 청과는 괴리가 큼을 알고 오랑캐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기 위해 애썼지만 그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진실을 제대로 전달하면 언짢아하고, 반대로 ‘만주사람이 말을 하면 개짖는 소리 같고, 음식은 고약하며, 뱀을 시루에 쪄 먹고, 황제의 누이동생은 역졸과 간통한다’ 등의 말을 하면 전하기에 분주한 조선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끝내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 말라!’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2 가계와 생애

박제가의 부친 박평(朴坪)은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38세에 사변가주서를 시작으로 정언, 좌랑, 병조정랑, 사헌부장령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스물한살이나 어린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박제가를 낳았는데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박평의 본부인은 청풍김씨로 박평보다 한 살 위였고, 그의 나이 44세 때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박제가는 서자로 태어났고, 열한 살 때(1760년, 영조 36)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박제가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시와 문장도 뛰어났다. 중국 고대 초나라 시인 굴원을 즐겨 읽었는데 그의 호를 초정으로 삼은 것도 초사에 의탁한 것이었다. 박제가는 집 한 칸 땅 한 뙈기 없이 불우한 서얼로서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였다.

박제가가 직접 수업을 받았고 박제가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힌 인물은 김복휴(金復休)이다. 김복휴는 박제가의 이웃에 살면서 10대 후반 교유의 폭을 넓히기 이전의 박제가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바치는 제문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박제가는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였다.

그만큼 그의 사귐에는 진실한 만남이 많았다. 열 여섯 살 무렵(1765년, 영조 41) 백동수(白東脩)를 사귀게 되는데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가 그의 매부인 이덕무(李德懋)를 알게 되었고, 그 외에 유득공(柳得恭), 서상수(徐常修), 이희경(李喜經) 등 서얼 출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즈음 연행에서 귀국한 담헌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 관심을 갖고 홍대용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서상수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열아홉 살(1768년, 영조 44) 경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찾아가 배웠는데 박제가는 첫 만남의 순간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박제가가 온다는 소리를 들은 박지원이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옷깃을 채 여미지도 못한 채 나와 맞으며 악수를 하던 장면이었다.

이런 인연들을 토대로 1769년(영조 45, 20세) 백탑시사가 결성되었다. 백탑시사는 유득공, 서상수, 윤가기(尹可基), 이희경, 박제가, 백동수, 이서구(李書九) 등 젊은 청년들과 홍대용, 박지원, 정철조(鄭喆祚) 등이 함께 하였다. 당시 백탑파들이 나눈 우정은 각별했는데 박제가의 경우 신혼첫날밤에도 친구들을 찾을 정도로 매우 의미 있는 존재였다. 그는 친구를 ‘반오(나의 반쪽)’라 하고, ‘하루라도 벗 없으면 좌우 손을 잃은 듯하다’고 하였다.

이덕무는 친구를 ‘기운을 나누지 않은 동기요, 한집에 살지 않는 부부’ 로 정의하였다. 부부나 형제와 다를 바 없는 가족 같은 존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가 그의 지기인 이덕무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면서 벗의 소중함을 역설한 박지원의 글도 있다.

이즈음 이덕무가 「초정시고서(楚亭詩稿序)」를, 박지원이 「초정집서(楚亭集序)」를 써 주며 박제가의 문장을 격려하였다.

스물 여섯 살(1775년, 영조 51)에는 이희경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의 시문을 엮어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을 낼 때 여기에 서문을 썼다. 이듬해에는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네 사람이 쓴 시를 엮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냈다. 이 시집은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 알려졌고, 연경에도 보내졌는데 이때 이조원, 반정균 등이 서문과 평을 써 주었고, 이에 박제가가 답례글을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박제가를 비롯한 네 사람의 시명이 연경의 문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해에 박제가는 소전이란 이름으로 자전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 글에서 그는 어려서 문장가의 글을 배웠으나 성장해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할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고백하며 경세제민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1777년(정조 1, 28세) 증광시에 응시하였고, 이듬해 정사 채제공(蔡濟恭), 부사 서호수(徐浩修)를 수행하여 첫 연행길에 올랐다. 이때 이덕무도 서장관 심염조(沈念祖)의 수행원으로 함께 하였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첫 번째 연행의 경험을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변의 통진에서 3개월 만에 『북학의(北學議)』로 풀어냈다.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는 20여 년 뒤인 1798년(정조 22, 49세) 영평현령 재직시에 정조[조선](正祖)가 농서를 구할 때 북학의에서 농업과 관계된 내용을 추리고 보완한 뒤 상소문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疏)」와 함께 제출한 것이다.

1779년(정조 3, 30세) 서얼 출신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발탁되었다. 이는 정조가 1777년(정조 1)에 발표한 서얼허통절목의 실천으로 취한 조치였다. 검서관은 7품 이하의 규장각 실무 하급관료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정조의 지우와 총애를 입었는데 박제가의 경우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라 칭송받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검서관 생활은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며 계속되었다.

검서관 시절에 그는 1790년(정조 14, 41세) 이덕무,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간하고, 1791년(정조 15)에는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국조병사(國朝兵事)』도 편찬하였다.

그 밖에도 1792년(정조 16) 『규장전운(奎章全韻)』과 같은 거질의 편찬사업을 맡는 등 정조의 문무겸전 구현의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재임 기간 약 13년 동안 규장각에 소장된 많은 서적들을 읽고 여러 도서의 교정 및 간행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박제가 사상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검서관 이외의 관직은 1781년(정조 5, 32세) 군자감 주부를 시작으로, 전설서 별제, 이인 찰방, 부여 현감, 영평 현령, 오위장, 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중 특기할만한 것은 오위장, 가승지에 임명된 것이다. 1794년(정조 18, 45세) 2월에 춘당대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자, 1795년(정조 19, 46세) 검서청 청수였던 박제가에게 수고한다는 의미로 오위장 자리를 만들어 주어 특별 등용하고, 이 해 6월 19일에서 25일까지에는 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라는 이유로 정식 승지에는 임명할 수 없기 때문에 특례로써 임명한 것이었다. 또 박제가의 집 근처에 있는 소나무에 어애송(御愛松)이라는 칭호를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서얼 출신 검서관인 박제가에 대한 정조의 애정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

박제가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중국여행이었다. 1778년(정조 2, 29세) 생애 첫 연행을 체험한 이후 두번째 연행의 기회는 1790년(정조 14, 41세)에 찾아왔다.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는 사절단 정사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의 수행원 자격으로 유득공과 함께 나섰다. 3차 연행은 2차 연행의 귀국길에 명을 받고 곧바로 후속되었다. 순조(純祖)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지막 연행은 1801년(순조 1, 52세)에 이루어졌다.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주자서 선본을 구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유득공과 함께 했다. 이처럼 박제가는 모두 4차례나 연행길에 올랐는데, 대략 십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학문과 사상이 단계적으로 성숙할 즈음 한번씩 찾아왔을 연행의 기회는 그의 사유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을 것이다.

1801년(순조 1, 52세) 4차 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비방하는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4년(순조 4, 55세) 해배되었으나 이듬해 5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박장임(朴長稔), 박장름(朴長廩), 박장엄(朴長馣)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아들 박장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검서관에 발탁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柳本藝), 유본학(柳本學) 형제도 검서관에 임용되었으니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세 사람은 대를 이어 같은 인연을 이어간 셈이었다.

3 북학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박제가의 경세론 -경세제민과 이용후생

박제가는 평소 학문은 경세제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용하고 후생함에 하나라도 빠짐이 있다면 위로 정덕을 해친다.” 라고 하여 삶의 안정 없이 도덕은 존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풀어서 다시 설명하면 이용은 빠르게 생산하는 것을 말하고, 후생은 의복과 식량이 넉넉한 것을 뜻한다.

그는 ‘경세제민’을 목표로 하고 ‘이용후생’을 기반논리로 삼아 백성들의 생활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정책론을 펼쳤다.

박제가가 북학론을 중심으로 한 경세론을 펼치게 되기까지 첫째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인물은 최치원(崔致遠)과 조헌(趙憲)이었다. 최치원과 조헌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그들이 직접 견문한 사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박제가는 자신의 개혁안의 역사적 연원을 최치원과 조헌에 두고 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교유의 폭을 확장한 이후에 그의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에는 우선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유금, 서상수, 이희경, 이서구 등 백탑파 일원들이 있다. 또 그밖에 이덕무가 서울의 학문적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로 지목한 서명응(徐命膺)과 그 아들 서호수, 이벽(李蘗), 정후조 등 서학과 수리 연구자들이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역사 속, 혹은 동시대 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독자적 사유 체계를 확립해나갔다.

박제가의 경세론은 크게 경제사상과 사회사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경제사상은 상공업발전론, 해외통상론 등을 들 수 있는데 청나라 선진 기술의 도입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사상은 신분론, 과거제와 문벌 개혁론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상공업발전론과 해외통상론은 중국의 수레기술과 배 만드는 기술을 배우자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선 중국 것을 본떠서 수레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한 물화의 유통을 주장하였다.

재화가 잘 유통되지 못해서 물가의 지역간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소비생활이 악화되고 산업이 위축된다고 진단한 것이었다. 원활한 유통을 위해서 열 사람 중에 셋은 상인이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또 사치재 소비가 시장과 기술의 발전을 촉진한다고 역설하였다.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건을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들이 날로 궁핍해지는 것은 마치 퍼내면 채워지고 쓰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우물과 같다고 하였다.

박제가는 수레를 이용한 국내 상업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외국과의 통상을 주장하였는데 특히 해로무역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우선 표류해 온 중국 배가 있으면 모방하여 배 만드는 법을 배우자고 하였다.

조선은 작고 가난해서 국내 산업만으로는 부국을 이루기가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외국과 무역을 해야 하는데 삼면이 바다이고 중국과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면 해로 무역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해로 수송은 육로보다 10배 이상 편리하고, 백 수레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육로로 천리를 가는 것보다 뱃길로 만리를 가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하였다.

사회사상의 핵심은 인재등용방식과 관련한 과거제 비판과 문벌 개혁론 및 신분론이다. 조선의 현실에서는 한유가 고시관이 되고 소식이 글을 쓴다고 해도 합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운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게다가 문벌, 붕당의 득실까지 관여하므로 인재 등용의 길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제도의 개혁도 중국에서 배우자고 하면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경기도 지평에 은거하는 원중거(元重擧)에게 보내는 글에도 과거, 벌열, 붕당의 폐해를 종합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직에 있으면서 정조에게 자신의 경세론을 밝힐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북학의와 유사한 논지로 1786년(정조 10, 37세)에 정책건의안을 올렸는데 국가의 큰 폐단인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 중국과 통상하고 부당한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상공업을 장려해 부국을 이루자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개혁구상안으로 이른바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과 해로로 무역하면 배, 수레와 같은 편리한 기구를 배울 수 있고 천하의 서적도 들어올 것이니, 습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편벽되고 고루한 소견은 저절로 타파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유의유식하는 사족들을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종사시키고 서얼차별과 같은 부당한 신분제도를 타파하자고 하였다. 나아가서는 중국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사람들을 초빙하여 관상감에 근무하게 하자든가 국내의 우수한 인재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어 선진 기술 등을 배워오게 하자고도 하였다.

그런데 같은 날 대사헌 김이소(金履素)가 서양인의 초빙 및 연경에서 서적 들여오는 것을 엄금할 것을 주장하고, 대사간 심풍지(沈豊之)는 사신들이 연경의 선비들과 필담을 주고받는 것과 귀국 후 서신왕래를 금지시키자고 한 것이 받아들여진다. 이로써 볼 때 박제가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박제가 사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

초정 친필본, 삼한총서 본 등 20여 종 이상의 『북학의』 사본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북학의』를 읽은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 내용을 볼 때 대동소이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박지원은 『북학의』 서문을 써주면서 나의 일기(『열하일기』)와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동시대 혹은 후대 관료들의 정책제안이나 주장 등에서 북학의의 주장과 유사한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박제가와 함께 규장각 관원으로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는 다산 정약용(丁若鏞)도 이용후생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 박제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가 영평현령으로 재직시 종두법을 시행한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가 하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는 자신이 『북학의』를 읽어보았는데 보통 사람은 추측하지 못할 탁견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나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도 『북학의』가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박제가의 사상은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많은 논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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