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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 를 지은 북학파의 영수

1737년(영조 13) ~ 1805년(순조 5)

박지원 대표 이미지

박지원 초상화

실학박물관

1 머리말 - 열하일기, 이용후생과 법고창신의 결합

『열하일기(熱河日記)』가 그의 대표저서가 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박지원에게 중국 여행은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 1780년(정조 4)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과 열하 등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집필한 열하일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논리로 사상을 전개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논리로 새로운 문체를 제시한 박지원의 대표저서이다. 중국에 다녀오기 전부터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연구하고 토론했던 것들을 중국 여행에서 확신하고 체계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1766년(영조 42)에 북경을 방문한 벗 홍대용(洪大容), 1778(정조 2)년에 북경을 방문한 이덕무와 박제가를 통해 들은 중국에 대한 정보는 큰 도움이 되었다. 홍대용이 중국 선비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한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의 서문을 써 준 바 있고, 중국에서 돌아온 후 읽어본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가 자신의 열하일기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기꺼이 『북학의』 서문을 써 주었다. 아마도 박지원은 『열하일기』가 당시 조선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저술하였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북학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문체로 문명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박지원의 북학론은 청나라에 대한 양가감정의 위에서 제기된다. 적대적 감정은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로워진다는 조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점은 북학론을 얘기할 때 항상 같이 거론되는 박제가의 북학론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2 가계와 생애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때 사간을 지낸 중시조 박소를 비롯하여 그의 손자인 박동량(朴東亮)은 선조대 공신이었고, 박동량의 아들 박미(朴瀰)는 선조의 부마였던 명문 거족이다. 박미의 증손이자 박지원의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호조·병조참판, 지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사후에 장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박필균의 일족인 박필성(朴弼成)은 효종의 사위이고, 박지원의 삼종형 박명원은 영조(英祖)의 사위로 왕실과 가까운 인척관계를 이어갔다. 이에 비해 박지원의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아무 벼슬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양육하였고, 스물네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집안 형편은 어려워졌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2월 5일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박필균의 3남1녀 중 장남인 박사유와 함평 이씨 창원(昌遠)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1752년, 영조 28)에 전주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장인에게 『맹자』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받았고, 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비롯하여 경사, 제자백가서 및 천문·지리 등을 배웠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지우요 학문적 동지였으며, 박지원을 스승처럼 여기고 따랐다. 문장을 평론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박지원의 글을 잘 이해해주고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하였다.

18세(1754년, 영조 30)에 「광문자전」을 시작으로 30대 초반까지 「마장전」·「예덕선생전」(1756년, 영조 32, 20세), 「민옹전」(1757년, 영조 33, 21세), 「양반전」(1764년, 영조 40, 28세), 「김신선전」(1765년, 영조 41, 29세), 「우상전」·「역학대도전」·「봉산학자전」(1767년, 영조 43, 31세)을 차례로 지었다. 이른바 9전으로 알려진 한문소설들인데 청년기 박지원의 사회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주로 불우한 중인들과 이름 없는 민초들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풍자하면서 사회모순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이 과거 공부를 하고 벼슬길에 나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기의 내적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을 제외한 나머지 7개의 소설이 『연암집』 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32세 되던 해(1768년, 영조 44) 백탑(白塔)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덕무, 서상수(徐常修), 유득공,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여 교유하고, 박제가, 이서구 등이 제자로 들어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백탑시사를 결성하였는데 유득공, 서상수, 윤가기(尹可基), 이희경(李喜經), 박제가, 백동수(白東脩), 이서구 등 젊은 청년들에 홍대용, 박지원, 정철조(鄭喆祚) 등이 함께 하였다. 약 십여 년 간 백탑시사의 일원들과 활발한 교유와 창작활동을 하였다. 1771년(영조 47, 35세)에는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 등과 함께 북으로는 개성, 평양, 천마산,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지를 유람하였다. 훗날 은거하게 되는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을 이때 발견하였다. 1774년(영조 50, 38세)에 이희경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의 시문을 엮어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을 펴내었는데 전하지는 않는다.

1772년(영조 48, 36세)에 가족들을 경기도 광릉 석마향 처가로 보내고 전의감동에서 혼자 기거할 즈음에는 주변의 인물들 즉,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이 자주 찾아왔다. 항상 서로 만나면 며칠씩 묵으면서 고금의 치란과 흥망의 까닭과 제도의 연혁, 농공의 이익과 폐단, 산업 경제, 산천과 국방, 천문, 관상, 음악, 초목과 새, 짐승, 육서와 산수 등을 관용하고 포괄하여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박지원은 과거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20대 중반 경 북한산에서 독서하며 김이소(金履素)와 함께 잠깐 과거공부를 한 적이 있었고, 34세에 (1770년, 영조 46) 소과 초시에 응시하여 초장과 종장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소과 복시에서는 응시하기만 하고 답안은 제출하지 않았다. 이후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박지원은 과거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또 일정한 스승도 없었다.

1778년(정조 2, 42세) 연암협에 은거하였다. 정조대 초반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인 홍낙성(洪樂性)의 일파로 몰려 생활은 어려워지고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개성유수로 부임한 유언호(兪彦鎬)의 도움을 받았고 홍대용과는 서신을 교환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또 국내외의 농서들을 두루 읽고 초록해 두었는데 훗날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44세)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나갈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따라갔다.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이 해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된 여행이었다.

돌아온 후 바로 『열하일기』 집필을 시작하였다. 한창 『열하일기』를 집필하고 있을 때 농기구, 얼룩소 2마리, 공책 20권, 돈 200민 등을 보내주면서 격려해주었던 홍대용은 『열하일기』를 탈고하던 해(1783년, 정조 7)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홍대용의 사망을 애통해하며 홍덕보묘지명을 지었는데 친구 정철조를 위한 제문과 함께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글이다.

친구인 이조판서 유언호의 천거로 50세(1786년, 정조 10)라는 늦은 나이에 선공감 감역(종9품)으로 첫출사하였다.

이후 53세(1789년, 정조 13)에 평시서 주부(종6품)로, 55세(1791년, 정조 15)에 한성부 판관(종5품)으로 승진하였다.

이에 연암의 품계가 원칙없이 올라간다고 유한준(兪漢雋)이 소를 올리자, 종6품으로 강등되어 안의현감으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약 5년간의 안의현감 시절은 이용후생에 기반을 둔 북학론을 민생현장에서 직접 실천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박지원에게는 좌천이라기보다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 송사를 엄격히 처리하고, 아전들의 상습적 횡령을 근절하였다는 칭송을 들었고, 안의현의 흉년을 구제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등 수령으로서의 기본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인정을 받았다.

60세(1796년, 정조 20)에 안의현감의 임기를 마친 후 계산초당을 짓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기로 하였으나 곧 제용감주부에 임명됨에 따라 그 계획은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1797년, 정조 21, 61세)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는 천주교도들이 많은 면천에 부임하여 이들을 개종케 하라는 정조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었다. 앞서 1795년(정조 19, 59세) 정조가 이가환(李家煥)을 충주목사로 보내 천주교를 금하게 하자 박지원은 천주교의 소굴에 천주교를 비호하는 수령을 임명함으로써 더욱 이를 조장할 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임하면서 천주교도들의 개종을 어떻게 이끌었는지는 면천군수에 부임한 후 관찰사에게 올린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99년(정조 23, 63세)에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정조의 어명에 부응해서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었다. 문체반정의 과정에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문제되어 정조가 속죄를 권고하는 뜻을 비치자 이에 순정한 문체로 지어 올린 의미가 있다.

1800년(정조 24, 64세)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가 곧 사직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말년을 계산초당에서 보내다가 1804년(순조 4, 68세) 별세하였다.

박지원의 생애를 돌아보건대 많은 영향을 끼쳤던 계기별로 대략 나누어보면, 한문소설 창작을 통해 사회 비판을 하던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시기, 40대 초반 연암협에 은거하기 전까지 백탑파들과 교유하던 시기, 44세 연행 이후 청의 선진 문물에 눈을 뜨고 열하일기를 집필하던 시기, 50세 이후 사환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3 박지원의 이용후생 사상

이용후생은 『서경』의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 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이용이란 공업기술과 상업을 발전시켜 백성의 경제활동을 효율적으로 도모함을 말하고, 후생이란 의식주를 풍족히 하여 생활수준을 향상함을 의미한다.

박지원은 이용후생과 정덕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용이 된 연후에 후생이 가능하며 후생이 된 연후에 덕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즉 정덕은 이용후생 이후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제가도 이용후생에 대해 “이용하고 후생함에 하나라도 빠짐이 있다면 위로 정덕을 해친다.”라고 하였다. 즉 삶의 안정 없이 도덕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당대 북학파들에 의해 공유된 이와 같은 개념의 이용후생은 곧 그들의 새로운 학문적 지향, 새로운 학문적 목표였다. 음양오행론의 경우도 지나친 관념화를 비판하고 음양오행론 자체를 부정하여 오행은 실생활에서 이용후생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물질로 이해할 뿐이었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실용에 힘쓰는 것이다.

그는 안의현감 시절 이용후생을 실천하기 위해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을 뽑아 직접 지도하여 용미거 등 선진적인 농기구를 제작하여 실험해 보고나서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의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알았다.

또 백척오동각, 하풍죽로당 등 정각을 새로 짓고 담을 쌓을 때도 중국에서 본 것처럼 벽돌을 사용하였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온 후 계산초당을 지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지었다.

면천군수 재임시에 저술한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 역시 이용후생의 실천 결과물이다. 『과농소초』는 1799년(정조 23)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부응해서 제출한 글인데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농업 실정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삼아 농업기술의 혁신과 토지소유의 변혁이라는 자신의 농업개혁론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많은 농서를 초록하여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이 글에서 농민, 장인, 상인이 실업하게 된 것은 사가 실학을 하지 못한 과오에 있다고 지적했다. 즉 실학의 주체로서의 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의 학문이 농공상의 이치를 포괄해야 하고 농공상의 일도 사가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또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인데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것 역시 사대부들의 과오라고 하였다. 사대부들이 평생 글을 읽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제작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책을 껍데기로 읽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한민명전의」는 『과농소초』를 올리면서 덧붙여 올린 것인데 자신의 수령경험과 농민경제를 관찰한 견문을 통해서 토지소유에 대한 개혁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글이다. 이상적인 토지제도는 정전제이지만 정전제를 갑자기 실현하기는 어려우므로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하여 점진적으로 정전의 실질적인 내용을 현실화하자는 방안으로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정전제처럼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 소유에 한도를 정해 토지 점유를 막으면 상속, 매매 등의 방법으로 자연히 균분된다는 것이었다. 미온적인 개혁안이었지만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주장한 것은 탁월한 견해로 평가되었다.

그의 이용후생사상에서 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원사(原士)」에서 사를 정의하기를, 아래로 농·공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과 벗이 되어 지위로 말하면 정해진 등위가 없고 덕으로 말하면 보편적 규범을 행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가 독서를 하여 그 혜택이 사해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는 그림을 그릴 때 바탕과 같은 것이어서 천자로부터 서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사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서인으로부터 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로서의 자격을 갖춘 다음에야 자신의 직분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농·공·상 내부의 종적 질서를 부정하고, 농·공·상의 관계를 분업적, 직업적인 성격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상에 대한 말업관은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상공업의 부진은 해소되어 생산이 발달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이용후생을 바탕으로 그가 제기한 사회개혁론의 주요 내용은 토지겸병의 문제와 함께 신분제의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것으로 귀결된다. 공리공론을 일삼거나 무위도식하는 양반에 대해 풍자와 비판을 하고 적서차별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신분제와 양반에 대해 갖고 있던 그의 인식은 그가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작품에 담았던 올바른 사 의식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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