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은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충’(忠)이라는 유교의 가치를 목숨 바쳐 실천하였지만 박팽년이 충신으로 인정받고 복권이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조선후기 숙종(肅宗) 때였다. 그 전까지 그는 공식적으로는 세조를 시해하려 한 역적이었다. 후대에 사육신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여러 문인들에 의해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기록되었고, 현재 그에 관한 이야기는 『용재총화』 『추강냉화』 『조야기문』, 『연려실기술』 등의 야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료들은 ‘충신 박팽년’의 모습을 뚜렷하게 전하고 있다.

더불어 박팽년은 세종대부터 세조대까지 중앙 조정에서 매우 인정받던 문인이자 관료였다. 특히 그가 세종(世宗)의 전폭적인 신임 하에 집현전에서 학문적으로 크게 인정받으며 조선전기의 학술과 유교문화 확립에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다. 박팽년은 역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지었던 글들이 문집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해지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몇 편의 글이 남겨졌다. 이 때문에 문인으로서 박팽년의 진면목을 직접 살펴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집현전에서의 활동상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것은 다행이기도 하다.

박팽년(朴彭年)은 1417년(태종 17)에 출생하여 1456년(세조 2) 사망하였다. 본관은 순천이며, 난 곳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지역인 회덕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박중림(朴仲林)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이다. 박중림은 주변으로부터 평소 사려가 깊고 과묵하고 경서에 해박하다는 평가를 받아 단종 대에 김종서(金宗瑞)의 추천으로 대사헌의 자리에 올랐다.

박팽년도 이러한 부친의 성품과 학문적 재능을 이어받았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25명 중 9등으로 급제하고, 1442년(세종 24)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가독서에 선발되어 삼각산 진관사에서 공부하였다. 사가독서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관청에 근무하게 하는 대신 원하는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게 한 휴가제도이다. 특히 세종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이 기회를 집중적으로 제공하였는데, 박팽년이 사가독서의 혜택을 입을 때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이석형(李石亨) 등이 같이 선발되었다. 이들도 당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손에 꼽히는 인물들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박팽년이 그중 으뜸이었음을 말해준다. 성삼문은 문장이 호방하나 시에는 모자랐으며, 하위지는 대책문과 상소는 잘 지어도 시는 지을 줄 몰랐고, 유성원(柳誠源)은 타고난 재주로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견식이 넓지 못하였으며, 이개는 문장이 맑고 탁월하였고 시도 역시 정묘하고 뛰어났으나, 동료들은 모두 박팽년을 집대성이라고 칭하니, 그의 경술과 문장 필법이 모두 훌륭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박팽년은 집현전에서 정자·교리·직제학 등을 역임하며 21년간의 관료 생활 중 16년을 집현전(集賢殿)에서 근무하였다. 세종대 정치문화와 제도의 마련, 이를 위한 유학의 발달을 목표로 국가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국립 학술기관인 집현전은 국가 엘리트를 양성하는 중심 기관이자 조선 전기 학술의 중심지였다. 집현전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각종 학술사업이 추진되었다. 가장 중요한 업무는 경사(經史) 연구와 경연 담당이었다. 역사와 지리·의약·천문·어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서적의 편찬도 담당하였으며, 제도의 정비를 위한 중국 옛 제도의 연구, 의례 연구도 집현전에서 학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에 학사들에게는 특별한 대우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박팽년 역시 세종의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학문적 기량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집현전의 최말단인 9품 정자에서 최고 실무관인 부제학까지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다.

박팽년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서는 남겨진 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자세히 논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시와 산문 몇 편이 『동문선』에 전한다. 또한 그가 집현전에서 주로 담당했던 작업은 역사서의 편찬과 주해작업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역사에 해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의 훈의본인 『통감훈의』의 찬집관으로 참여하였고, 당나라 현종에 대한 고사를 모아놓은 『명황계감』의 편찬을 담당하였으며,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는 기전체 방식을 가미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하고 『동국정운』 편찬에도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어학에도 능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팽년은 문종과 단종이 각각 세자로 있을 때 이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단종 대에는 경연관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군주 교육을 지속적으로 담당하였을 만큼 박팽년은 당대에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다.

박팽년은 일찍이 세종과 문종에게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그는 이듬해인 1453년(단종 1) 10월 어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좌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박팽년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집현전에서 나와 관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김종서·황보인 등 고위 대신들과 수양대군·안평대군 등의 종친 세력은 각기 문종의 유언에 따라 어린 임금을 보호하겠다며 합종연횡 하였다. 박팽년 등의 집현전 출신 관료들은 이들 사이에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단종을 바른 정치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였다.

박팽년은 특히 단종에게 왕도정치를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종의 ‘성군’ 만들기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성학(聖學)을 강조한 것인데, 군주가 충신의 바른말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도 이 일환이다. 『국조보감』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단종과 경연장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박팽년이 언로(言路)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단종은 『논어(論語)』의 한 대목을 읽고 박팽년에게, “어떻게 한마디 말로 국가를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한마디 말이 국가를 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망하게 하는 것은 금방이라며, 임금이 바른말을 좋아해서 인재를 잘 등용해야지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이들을 가까이 한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 될 것이라 충고했다고 한다.

박팽년이 좌승지로 단종을 곁에서 보좌할 때 경상도관찰사 이숭지(李崇之)가 비파를 진상하였다. 그러자 박팽년은 정례적으로 바치는 방물 이외에 사적으로 진상하는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되며, 심지어 놀이도구로 쓰는 악기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며 비파를 돌려줄 것을 극력 간언하여서 단종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따랐다고 한다. 박팽년은 단종이 가끔 경연을 중지하고 활쏘기를 하는 등 학문에 소홀한 모습을 보이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경연은 군주가 학문을 배워서 성군의 자질을 연마하는 곳이자 국정 전반에 대해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서로 소통하는 자리였다. 군주는 성리학의 정치 이념에 따라 올바른 배움의 과정을 거치며, 이 과정에서 신하들의 언로를 보장해야 한다는 박팽년의 정치 이념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1454년(단종 2) 박팽년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이듬 해 4월에는 충청감사에 제수되어 외방에서 백성들의 삶을 돌보았다. 그러나 얼마 있지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그를 비롯한 집현전 출신의 관료들이 거취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예문관 제학, 형조참판, 중추원부사에 제수된 것으로 보아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지켜오던 성리학의 정치 이념이 세조의 집권 후에는 완전히 부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단적인 예로 세조는 언로를 철저히 막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공을 세운 소수의 측근들에만 의지한 폭압적인 정치를 구상하였다. 더구나 세조의 즉위는 무력을 앞세운 명백한 찬탈이었다. 박팽년을 비롯하여 그와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복위시키고 무너진 도덕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꾀하였다.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를 결심하고 경회루에 나와서 대보를 넘겨주는 절차 끝에 세조는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이 되었다. 박팽년은 이 일에 매우 분개하고 슬퍼하면서 경회루에 뛰어들어 자살 하려고 하였으나, 옆에 있던 성삼문이 “주상(단종)께서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며 만류하였다고 한다.

박팽년은 충청감사에서 형조참판으로 보직이 바뀌어 내직으로 돌아온 때부터 단종의 복위거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1일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행사에 왕과 상왕, 세자가 모두 참여하며, 여기에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나갈 것을 알고 이들을 포섭하여 연회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유일하게 칼을 들고 왕 곁에 설 수 있는 운검이 기회를 보다가 세조를 제거한다면 간단하게 성공이었다. 그러나 당일에 세자가 병으로 인하여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고,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말라고 세조가 명을 내림으로써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유응부 등 무신들은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하였으나, 박팽년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한 기회를 다시 마련하여 훗날을 기약하자고 했기 때문에 거사는 일단 보류되었다. 그러나 이날 밤, 계획이 틀어져 들킬 것을 불안하게 여긴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을 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성삼문이 먼저 압송당하여 공모자들의 이름을 밝히자 박팽년도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팽년은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칭하며 그의 신하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너는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하며 녹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이 일은 군주에 대한 반란이다.”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박팽년은 자신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쓴 적이 없으며, 받은 녹봉은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쌓아두었다고 받아쳤다. 세조가 확인해보니 과연 장계에는 ‘신(臣)’ 대신 ‘거(巨)’라는 글자가 있었고, 녹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박팽년은 심한 고신 끝에 6월 7일 옥중에서 사망한다. 후에 그의 시신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박팽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모두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으며, 그의 손자들도 모두 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역적으로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조는 임신 중이던 며느리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까지 하였다. 이씨는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마침 임신 중이던 이씨의 여종도 같은 때 딸을 낳았고, 여종의 기지로 자식을 바꾸어 박팽년의 손자는 살아남아 성종 대에 자수하고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팽년은 역적의 오명을 쓰고 죽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사람도, 정확한 묘소의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을 쓴 남효온(南孝溫)도 이들 무덤의 위치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육신의 묘역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박팽년의 후손인 박숭고가 ‘박씨지묘’라고 무덤 앞에 돌비석을 세웠으나 그 자신도 그 자리가 맞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에 대한 복권과 추숭 작업은 조선후기에 본격화 되었다. 효종대에는 박팽년·성삼문과 같이 충청도에 연고가 있었던 선비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며, 이 선두에는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 있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 숙종의 명에 의하여 사육신의 복권이 이루어지고 묘소와 사우에 치제가 베풀어졌다. 박팽년은 회덕의 정절서원, 홍주의 노은서원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서원에 배향된다. 1727년(영조 3) 4월에 영조(英祖)는 이조에 명하여 박팽년의 후손을 수소문해서 특별히 관직을 주라는 명을 내렸다. 이어 1783년(정조 8) 8월에는 드디어 박팽년의 아버지인 박중림에게 까지 시호가 내려진다. 이후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 여섯 명의 묘소는 국가의 지속적인 관리와 보호를 받으며 명실상부 조선을 대표하는 만고의 충신으로서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