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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포[朴苞]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다

미상 ~ 1400년(정종 2)

박포 대표 이미지

김영열좌명공신교서 및 회맹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박포(朴苞)는 조선 건국과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간(李芳幹)의 편에 섰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

두 차례 공신에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적’으로 세상을 떠난 만큼 그의 가계나 관력 등이 상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가족관계는 그의 외할아버지 김광재(金光載)의 묘지명(墓誌銘)에서 확인된다. 묘지명에는 김광재의 딸이 내부부령(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출가하였고, 박문수의 아들 박포는 진사(進士) 출신으로 전의녹사(典儀錄事)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개국공신과 정사공신에 책봉되다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을 위시한 관료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으로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한 지 하루 만이었다. 추대를 권하는 관료들 중에는 박포도 있었다. 한 달 뒤 그들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

박포는 개국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행적 때문인지 『태조실록』에는 주로 처벌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1393년(태조 2)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부인 현빈(賢嬪) 유씨(柳氏)가 폐위된 사실을 논했던 대간과 형조의 관료들이 국문을 받았는데, 당시 겸사헌중승(兼司憲中丞)이었던 박포 역시 연루되었다. 이때 많은 관료들이 귀양을 갔지만, 박포를 비롯한 공신들은 처벌을 면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변중량(卞仲良)이 조준·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의 정권과 병권 장악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가 하옥된 일이 있었다. 그때 변중량은 “박포 역시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하여 여러 번 성변(星變, 별의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언급하였고, 이에 박포 또한 변중량과 함께 국문을 받았다가 죽주(竹州, 경기 안성)에 안치되었다.

그후 박포가 언제 해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396년(태조 5) 그는 중추원 소속 관원으로서 서북면 황주(黃州)의 수령을 겸하였고,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때에는 죽성군(竹城君)의 군호로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이방원(李芳遠) 등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왕자들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세자 이방석을 폐위하였고, 태조의 양위를 이끌어냈으며, 정도전·남은 등의 관료도 제거했다. 당시 박포는 이방원 측에 가담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된 후 지중추원사 의흥삼군부 우군동지절제사(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나타냈다 하여 죽주로 유배되었다. 다만 박포의 귀양 조치는 금방 풀렸던 듯한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정사공신에 책봉되었고, 관직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였다.

3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주살되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하였다면, 제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인 이방간과 이방원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여기서 승리한 이방원은 곧바로 세자에 책봉됨으로써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하였고, 약 10개월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한 후에는 그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조처들이 행해졌고, 이는 훗날 실록 편찬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왕자의 난 역시 정안공(靖安公) 이방원의 집권을 타당한 것으로 설명하고, 그 대척점에 있었던 회안공(懷安公) 이방간의 행위는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기술되었다. 『정종실록』에 수록된 제2차 왕자의 난에 대한 서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셋째 이방의(李芳毅), 넷째 이방간, 다섯째 이방원 등 세 형제를 다음과 같이 비교해 놓았다.

임금(정종, 이방과)이 적사(嫡嗣)가 없으니, 동복 아우가 마땅히 후사가 될 터였다. 익안공(益安公, 이방의)은 성품이 순후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다. 방간은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배우지 못하여 광망하고 어리석었다. 정안공은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며 경서(經書)와 이치에 통달하여,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귀부하였다.

성품이 ‘순후한’ 이방의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반면, ‘어리석은’ 이방간은 왕이 될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이방원은 건국과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이 많을 뿐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그의 권력욕에서 비롯한 반면, 이방원은 이방간과의 대립보다 화해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모습으로 기술되었다. 『정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제2차 왕자의 난의 전개 과정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방간은 자신의 처조카 이래(李來)에게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보통사람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 당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방간을 제지하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래는 자신의 좌주(座主)인 우현보(禹玄寶)에게 방간의 거사를 알렸고, 우현보는 자신의 문생인 이방원에게 알렸다. 이에 이방원은 하륜(河崙)·조영무(趙英武) 등과 함께 대응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방간은 이방원이 자신을 해치기 전에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개경 내성의 동대문으로 향하였다. 한편, 이방원은 이방간과의 대립을 거부하고 화해를 도모하려 했지만, 결국 이지란(李之蘭)·이화(李和)의 군대를 내어 방어하도록 하였다. 개경의 도로에서 양측의 군대가 교전하였다. 정종도 교서를 반포해서 방간의 철군을 명했지만, 방간은 명에 따르지 않고 교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교전은 이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박포는 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이슬과 같으니, 먼저 〈정안군 이방원을〉 쳐서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언급하며 이방간의 거사를 충동한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의 처우에 대한 불만을 내세웠다. 자신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외방으로 내쳐진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결국 그는 관직을 삭탈 당했고, 장 1백 대를 맞은 후 청해(靑海,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곧이어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회수당했으며, 함주(咸州, 함경도 함흥)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확정짓는 사건이 되었다. 이방원은 정종의 동생이지만 세제(世弟)가 아닌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며, 전국의 군사를 관할하게 됨으로써 강력한 병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박포가 회안군(懷安君)을 꾀었던’ 것은 각 왕자와 공신들에게 사병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세자 정안군으로부터 나왔고, 이는 사병 혁파 조치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세자 이방원은 왕위에 올랐다.

한편, 죽임을 당한 박포는 제2차 왕자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 규정되었다. 회안군의 본심이 아니라 박포에게 현혹되어 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적’이 된 그의 자손들은 관노가 되었다. 훗날 세조대나 성종대에 그의 후손들에 대한 방면이 논의되기도 하지만, 매번 반대에 부딪쳐 이뤄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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