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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李愃]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세자

1735년(영조 11) ~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 대표 이미지

융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어린 시절의 사도세자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조선](正祖)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선(愃)이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윤관(允寬)이다.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집복헌에서 영조와 후궁 영빈(暎嬪)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8년(영조 4)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태여서, 원자의 탄생을 모두 고대하던 때였고, 영조도 삼종 혈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세자가 빨리 조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 영조는 일찍부터 세자에 대한 후계자 교육을 시작하였다.

태어난 지 이태만인 1736년(영조 12) 3월에 양정합(養正閤)에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조현명은 왕세자가 효묘의 모습을 매우 닮았다고 하였다. 영조가 궁관에게 『서경』의 문왕세자편을 병풍에 써서 올리게 하였는데, 그 중에 ‘왕(王)’자를 보고서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기를 가리켰고, 천·지·부·모 등 63글자를 풀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37년(영조13)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효경과 소학의 글을 뽑아 강독하게 하였고, 이 해 가을에 사부와의 상견례를 거행하였다.

당시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나이답지 않은 면모가 종종 보인다.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라는 글자를 공부하면서, 입고 있던 화려한 옷과 구슬 장식을 한 비단 모자를 사치하다며 벗어버렸고, 이후 무명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또 저녁을 함께 먹다가 영조가 부르자, 입안에 넣었던 밥을 즉시 뱉고 대답을 하면서 일어났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소학』의 구절을 들어 설명했는데, 이를 보고 영조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아이가 몸으로 체득하는 공부를 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은 나이 어린 세자가 지녔던 남다른 자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되곤 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 속에서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고, 이러한 어린 시절의 압박이 훗날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영조는 세자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켰을 뿐 아니라 일찌감치 세자에게 조정의 일을 경험하게 하려 하기도 했고, 여러 예식에 참여시켜 왕실의 예법을 익히게 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세자가 행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자의 자질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를 해나갔다. 1739년(영조15) 세자가 만으로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임금의 자리를 세자에게 넘겨주고 물러나겠다고 했다가 다시 명령을 거두어들였다. 1742년에는 종묘에 참배하는 의식에 세자를 참여시켰는데, 겨우 여덟 살인 세자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모두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육상묘에 거둥할 때에도 세자와 함께 하며, 도성민들의 세자에 대한 민심을 읽었다. 이해 3월에 성균관에서 입학하는 의식을 치렀다. 1743년 3월에는 관례를 행하였다.

1744년 1월에 가례를 치루고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빈궁으로 맞아들였다.

2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

이렇게 어린 시절에 세자에 책봉되고 영조와 따로 떨어져 지내면서 저절로 생기게 된 소원한 감정이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고 꼽기도 한다. 훗날 정조는 직접 지은 사도세자의 행록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도 그 중에는 1747년 궁궐 안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으로 피하게 했는데 세자가 매일 문안드리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지내는 것을 홍상한(洪象漢)이 아뢰어 영조가 다시 돌아오게 한 일이나, 그해 겨울 또 경덕궁으로 피접하였는데 다음 해 봄에 문안드릴 것을 청했으나 영조가 그만두라고 하여 문안드리는 궁관이 갈 때마다 꼭 함께 아뢰도록 하였다는 일화 등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영조와 세자간 불화의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이렇게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만날 수 있고, 중간에서 만남을 권유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영조와 세자의 사이에는 친밀함이 부족했고, 날로 그 정도가 심해져 갔다는 것이다. 세자가 두 번째 경덕궁으로 피접갔을 때 영조가 만남을 거절한 것은 당시 숙종 어진을 모사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자신을 대신하여 인원왕후를 잘 모시는 것이 자신에게 효도하는 것이라며 한 때의 만남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어리지 않은 세자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혜경궁은 이상의 일화들을 불화의 증거로 들고 있지만 훗날 임금이 될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한편 『한중록(閑中錄)』에서도 전하는 부분이지만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에게 세자궁의 일을 맡겨둔 것도 영조와 세자가 불화하게 된 데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고 정조도 인정하고 있다. 궁인들은 우선 영빈이 세자를 낳기는 했지만 사친일 뿐이고 군신의 의리가 있는 만큼 자주 만나서는 안된다고 하여 영빈과 세자의 접촉을 방해했다. 영조가 자주 임어하지도 못하게 하고 허튼 소리를 퍼뜨려 양궁 사이를 이간질했다. 화평옹주가 중재하여 세자의 처소를 저승전(儲承殿)에서 영조의 처소와 가까운 경춘전(景春殿)으로 옮기게 하여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오래지 않아 옹주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영조와 세자의 불화는 바깥 조정이 있는 이들도 걱정할 정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세자에 대한 왕의 불평은 공개적으로도 표현되었다. 1748년 5월 영조는 왕세자를 불러 시좌하도록 명한 후 한나라 무제와 한 고조, 문제를 비교하여 누가 나은가를 묻고는, 왕세자가 분명 무제를 더 좋아할 것인데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며 질책했다. 또 왕세자가 지은 시를 보고 기가 너무 승하다고 폄하하여, 시독관 이이장이 변명해주기도 했다.

그 해 겨울에는 조정에 임할 때 기상과 달리 뒤에서 남몰래 음란한 짓을 한 한나라 성제를 들어 세자에게 발놀림을 무겁게 하고 식색의 욕망을 다스리라고 경계하기도 했다.

1749년 1월 이렇게 세자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정무를 대리하도록 하였다.

1749년 1월 27일 15세의 세자는 시민당에 나아가 대리청정의 조참의식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당상을 만나 정무를 처리했다. 이 자리에서 팔도에 백성들의 생업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고, 서울과 지방의 혼례나 장례를 제 때에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관청에서 돌보아 주도록 하는 등 민생을 위한 마음씀을 보였다.

그러나 정무의 재결은 모두 영조에게 아뢴 후에 허락을 받아 처리해야 했고, 영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처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1749년 7월에서야 한 달에 여섯 차례의 차대 중 두 번을 왕을 옆에서 모시고 차대하도록 한 전규를 없애도록 하였다.

1752년 영조는 육순의 하례를 받지 않겠다며 잇달아 전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고, 세자가 한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거적자리에서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청했는데도 고집하였다.

영조가 북한산성의 행궁에 행차하겠다고 하자 세자가 이렇게 추운 날에 왕이 행차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인삼차를 올리게 하자 영조가 결국 마음을 돌리고 앞서의 명령을 취소하였다. 1755년 을해 역옥이 발생하자 영조가 죄수들을 친국했는데, 세자에게 옆에 앉아서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도록 했다.

1756년 5월에 왕세자의 정당인 낙선당에 화재가 났다. 당시 세자가 술을 지나치게 마신다는 말이 영조의 귀에 들어갔고, 낙선당의 화재 또한 세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은 깊어만 갔다. 영조가 근래의 일을 자신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신하가 없다고 불평했고, 김상로는 세자도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세자의 잘못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이에 이이장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위해 허물을 숨겨준다는 말을 들어,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무라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김상로를 비판하였다.

이렇게 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회복시키고 화해를 도모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깊은 골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 발병, 임오화변, 뒤주 속에서의 죽음

1757년 2월과 3월에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세자는 정성왕후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면서, 인원왕후의 상을 당한 영조를 위로하고 집상과 발인을 모두 정성스럽게 하였고, 정성왕후의 지문을 직접 지어 간직하고 있었다. 그 뒤로 세자의 병이 더욱 심해졌는데도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혼전 제사를 빠뜨리지 않고 거행했다고 한다.

1758년 세자의 병으로 인한 과오가 더욱 심해지자 영조가 춘방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한 후 명정전 월대에 임어하고, 세자는 시민당에서 거적을 깔고 대죄하였다. 영부사 이종성(李宗城)은 영조에 맞서서 세자의 과오를 과도하게 꾸짖는 영조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과실이 있더라도 드러내지 말고 가르쳐 고치도록 하라고 진언하였다.

1759년에 훈련도감에 『무기신식(武技新式)』을 반포하였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놀이를 할 때면 늘 병위를 진설하였으며, 병가의 서적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당한 방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저승전에 있었는데,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한 것을 사도세자는 15~6세에 무렵부터 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고 한다. 평상시 연구하였던 바에 의거하여 18가지 기예에 대한 글과 그림을 함께 담은 책을 편찬한 후 훈련도감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1760년 7월에 온천에 행행했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1761년 4월에는 관서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왔는데, 관학 유생들이 동궁의 유람을 경계하는 상서를 올리고, 서지수(徐志修)와 서명응(徐命膺) 등이 걱정하는 글을 올리는 등 논란이 빚어졌다.

1762년 5월 22일에는 나경언이 환시들이 역모를 꾀한다는 내용을 적은 글을 형조에 올렸다. 영조가 즉시 국청을 설치하게 하고 친국하였는데 나경언이 소매자락에서 봉서를 꺼내 세자의 비행 10여조를 고했는데, 주 내용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5월 24일 영조는 흥화문에 나가 각전의 시민들을 불러서 세자가 시민들에게 진 빚에 대해 묻고 탕감해주도록 했다. 당시에 세자의 비행도 있었지만 동궁을 사칭하면서 도성 안 거리에서 여인을 강간하는 일까지 발생하여 왕실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왕세자가 대죄하고 있는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 안에 가두었다. 이 날 실록의 기사에서는 세자가 그 동안 저지른 잘못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했다. 세자의 자질이 본래 탁월하여 임금이 사랑했는데, 10여세 이후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지만 처음에는 대단치 않게 여겨 신민들이 모두 낫기를 바랐다. 1757년, 1758년 이후부터 병이 점차 심해져 발작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괜찮아지면 후회하곤 했다. 왕이 매번 엄한 하교로 책망하자,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고, 왕이 경희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양궁 사이가 더 멀어져 환관·기녀와 함께 놀러다니며 문안까지 폐하였다. 나경언이 고변한 뒤로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결심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났고, 영빈까지 세자의 일을 고하자 결국 폐세자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유언비어란 세자가 영조를 위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세자와 함께 다니며 비행을 종용한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佳仙) 및 서읍의 기녀 다섯 명을 참하였다.

폐서인되어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는 윤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죽은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 주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수은(垂恩)’이라는 사당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7월 23일에 양주 배봉산 갑좌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날 영조가 광중에 임어하여 어필로 신주를 썼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양자로서 종통을 승계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즉위한 날 영조의 뜻을 이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하였다.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종통도 소중하지만 아버지의 은혜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며 사도세자에게 융숭한 전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선세자에게 ‘장헌(莊憲)’이라는 시호를 소급하여 올리고, 궁호를 ‘경모(景慕)’, 원호를 ‘영우(永祐)’라고 고쳤다.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에 따르면, 사당의 제례는 태묘보다 한 등급 낮추었고, 원의 격식 또한 이에 준하였다. 1789년에는 영우원을 화성부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이는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로 정리되었다. 아들 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발병 이전의 어진 마음과 선정에의 의지 등을 자세히 밝혀 광증으로 인해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들이라는 오명을 씻어주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하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하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정조는 자신의 방식이야말로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효라고 생각했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죽고 나서도 거의 100년이 지난 1899년 11월, 장종으로 추숭되어 태묘에 들어갔고, 현륭원도 융릉으로 개칭되었다.

4 사도세자의 학문

정조는 1789년 직접 지은 사도세자의 행록에서 서연의 기록을 참조하여 세자의 학문의 뛰어남에 대해 서술하였다. 광증에 걸린 세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왕자, 사람을 거침없이 죽이고 기생과 놀러다닌 세자 등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한 사건과 관련하여 기억되는 모습과 달리 사도세자가 서연에 열심이던 시절 남긴 언행에서는 사도세자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정조가 모은 사실들을 따라가보자.

정조는 세자가 요순의 도에 대해 말한 대목을 언급하면서 주자성리학에서 말하는 요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강조하고자 했다. 순임금이 뛰어난 점이 천하를 가지고도 부모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졌던 점을 지적하고, 이윤(伊尹)이 이 도로써 백성을 가르쳤고, 백성들도 그로 인해 깨달았는데, 깨달음에 선후와 깊고 얕음이 있지만 깨달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요순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 성인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세자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또한 간언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맹자가 백리해(百里奚 : 백리해는 虞나라 사람이었는데, 晉나라가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을 치려고 하였다. 백리해는 우공에게는 간할 수 없음을 알고 우나라를 떠나서 秦나라로 갔다.)를 칭찬한 것을 비판했고, 임금은 한 사람의 군자를 써서 수많은 소인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도 하여 군주로서 인재를 바르게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굳은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했다. 인의(仁義)보다 더 큰 이익은 없다고 하고 관중(管仲)의 패도에 대해 공자와 맹자가 각기 다른 평가를 했지만 그 근본의 견해가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 등 통상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서도 세자가 식견을 보였다고 하였다.

현재 사도세자의 문집으로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한 권이 전하며, 어필과 어린 시절 그린 그림 등 유묵 수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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