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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조선의 왕, 붕당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다

1552년(명종 7) ~ 1608년(선조 41)

선조 대표 이미지

구리 동구릉 목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선조의 즉위와 사림의 정계 진출

선조가 국왕으로 즉위할 무렵인 16세기 중반은 훈구·척신 계열이 권력을 점차 잃어가고, 성리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사림들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면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국정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던 시기였다.

선조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 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이자 중종(中宗)의 손자로, 1552년 11월 11일에 한성의 안달방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명종[조선](明宗)이 총애하여 하성군(河城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1567년(명종 22) 조선의 1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 사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던 윤원형(尹元衡)의 관작 삭탈로 시작된 구체제 개혁이, 선조 즉위와 함께 더욱 가속화되었다. 윤원형, 이기(李芑) 등과 관련된 인물들의 축출이 본격화되었다. 심통원(沈通源)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서울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밖에 다수의 척신계 인물들에 대한 제거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정치적 복권이 대규모로 단행되었다. 유희춘(柳希春), 노수신(盧守愼) 등이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화를 입었던 권벌(權撥)과 이언적(李彦迪)을 포함하여 이미 사망한 25명이 직첩을 돌려받아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에게 시호를 내리고 증직하였으며, 또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삭탈함으로써, 사화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였다.

선조는 즉위 초부터 좋은 정치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을 구심점으로 하며 스스로 ‘사림(士林)’이라 불렀던 신진세력들과 덕망 있는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이(李珥)의 《동호문답(東湖問答)》도 독서당에서 제출된 것이다.

과거시험을 통한 관직 진출만으로는 덕망 있는 선비를 조정에 불러들이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덕망 있는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고, 그런 가운데 조식(曺植)·성혼(成渾)과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관직에 발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인적 쇄신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서적을 간행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내의 개혁과 더불어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매듭지었다.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고려 말 권신이었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술되어 있는 것을 사신인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고치도록 했던 것이다.

2 기축옥사와 붕당정치

1575년(선조 8)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사림은, 후배 사림인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東人)과 선배 사림인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으로 양분되어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율곡 이이는 동서의 보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등으로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기축옥사는 선조의 의지로 더욱 확대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동인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인은 서인에 대해 온건한 입장인 남인(南人)과 강경한 입장인 북인(北人)으로 다시 분열하였다.

3 임진왜란의 발발

1583년(선조 16) 여진족 번호인 니탕개가 난을 일으켰다. 선조는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로 임명했고, 무관 오운(吳澐)과 박선(朴宣)을 기용하였으며, 당시 병조판서 이이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니탕개 난을 토벌토록 했다. 이때 신립(申砬), 이순신(李舜臣) 등이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선조의 신임을 얻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각지의 전투에 이들이 투입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부산으로 침략한 왜군에 맞서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사투를 벌였으나 패하였고, 이후 일본군은 세 개의 길로 나뉘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북상했다. 선조는 신립 장군을 보내 왜군을 막게 했으나,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일본군은 서울 가까이 북상했다.

당시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에게 아들이 없어 세자 자리가 비어있었다.

전쟁의 위태로움 속에 선조는 급히 공빈 김씨(恭嬪金氏) 소생의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선조는 한성부를 버리고 급히 피란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올라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세자는 전장을 돌며 격문을 전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했으며, 병사를 모집하러 갔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전라도 해안의 경비를 맡고 있던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해군의 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전세가 점차 반전되었다. 거기에 1593년(선조 26)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지원군이 합류했다. 조선과 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1593년(선조 26) 4월, 일본군이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나자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선조는 훈련도감을 설치하도록 명함으로써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백성들이 굶주려 죽음에 이르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자 선조는 자신에게 제공되는 음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으며, 전쟁 중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게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함으로써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1597년(선조 30) 다시 한 번 일본군이 침입하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조는 재차 명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군과 명군이 합세하여 일본군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이순신 역시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일본군을 대파했고,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퇴각했다가 완전히 철수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월산군(月山君)의 집인 정릉동 행궁에 거처하였다. 이후 궁궐 중건 논의가 이어졌고, 창덕궁(昌德宮)을 우선 중건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도성의 관청들도 함께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물자 조달이 어려웠고, 공역에 따른 민심의 동요와 같은 부담 때문에 궁궐 중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선조는 정릉동 행궁을 부분적으로 늘리는 수준에서 지내게 되었다.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하고, 1602년(선조 35) 7월 새롭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역시 협소한 정릉동 행궁에서 책봉례를 거행한 후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4 임진왜란 이후 전란 극복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복구하기 위한 작업과 함께 다양한 사회적인 일탈 현상으로 인해 흔들리는 조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전란 기간 공을 세운 신하나 순절자 등을 확정하고 이들을 공신으로 녹훈하는 작업이 전후 복구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선조는 전쟁 극복의 주된 원인을 명나라 원병에서 찾았으며 조선 장수의 전공은 해상의 이순신과 원균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선무공신(宣武功臣)보다는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명나라군의 참전을 성사시킨 호성공신에게 더 큰 공을 돌렸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선무공신 등의 공신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하고 전후 복구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이항복(李恒福), 정곤수(鄭崑壽), 이순신, 원균(元均), 권율(權慄) 등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606년(선조 39)에는 인목왕후 소생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났으나, 선조는 재위 41년이 되던 1608년(선조 41)에 57세의 나이로 정릉동 행궁에서 승하하면서 영창대군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했다.

5 선조 집권기의 대내외적 격변

선조 때는 조선 안팎으로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를 예우하여 걸출한 성리학자가 배출되면서,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문치주의의 절정을 꽃피웠다. 그러나 사림이 정권을 잡으면서 기성사림과 신진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을 형성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양태로 변하였다. 성리학에서는 군자들의 붕당형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에 사림정치가 붕당정치를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였다. 선조 때에 형성된 붕당정치는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성리학에서 추구한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상이 현실화 된 것이기도 했다.

밖으로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이하여,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통일을 이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임진왜란에 대처해야 했다. 이순신, 권율과 같은 명장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거기에 명나라의 원조가 더해지면서 선조를 중심으로 한 조선 정부는 전쟁에 필사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조선 전역이 전쟁터가 되면서 조선은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명에서 청으로 왕조 교체,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정권 교체가 있었으나, 조선은 선조와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에 의해 전란을 수습하며 조선왕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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