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태종 17) ~ 1468년(세조 13)
세조(世祖)는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이다. 1455년부터 1468년까지 1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 전기의 각종 제도들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왕이 된 과정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무력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잡고 단종[조선](端宗)의 왕위를 찬탈 하였다는 사실은 후대에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측근들을 중심으로 과도하게 공신(功臣)을 양산하여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세조는 1417년(태종 17) 당시 충녕대군(忠寧大君)이었던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유, 자는 수지이다. 1428년(세종 10)에 처음 진평대군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함평대군으로, 또 진양대군으로, 다시 또 수양대군으로 재차 봉해졌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봉호인 수양대군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세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형은 아버지 세종의 뒤를 이어 조선 5대 임금이 된 문종[조선](文宗)이며,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이 그의 동생들이다. 수양대군이 태어나고 이듬해 8월에는 아버지인 세종이 태종[조선](太宗)에게 선위를 받아 즉위하게 된다. 이보다 앞서 6월에 태종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세자 시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봉한 뒤 불과 두 달 만에 일어난 일이다.
수양대군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괄괄하고 호방하였다. 특히 말타기나 활쏘기 등 무예에 어릴 적부터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항상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녔고, 사냥에 쓰이는 매 날리는 것을 좋아하여 매를 얻으면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수양대군이 불과 13살 때 봄철 무예 연습에서 그가 사슴에게 활을 일곱 발 쏘았는데 그것이 모두 사슴의 목에 관통이 되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부왕 세종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규표를 들고 북한산(北漢山) 보현봉에 올라가 해 지는 것을 관측하게 하였다. 삼각산은 산세가 매우 험하고 바위가 많아 같이 간 사람들 모두 눈앞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 주춤거리고 엎어지며 산을 내려왔지만, 수양대군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쉽게 내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남다른 기상과 출중한 실력을 드러냈기 때문에 세종은 이를 자랑스러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하였다. 수양대군 같은 왕자들을 비롯한 종친세력이 정치적 야망을 가질 경우 자신이 몇 십 년간 기초를 다진 조선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국정 운영의 원칙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급하고 괄괄한 성격을 잘 제어하라는 뜻으로 품이 넓은 옷을 입으라고 권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부왕인 세종을 도와서 불교서적을 번역하고 간행하는 일, 악보를 정리하는 일 등을 하였으며, 형인 문종은 그에게 《병요(兵要)》와 《무경(武經)》을 주해하고 《음양서(陰陽書)》를 바로 잡는 일을 부탁하였던 만큼 수양대군은 무예를 비롯한 음악, 불교, 어학 등의 다방면에서 깊은 조예를 보였다.
그러나 문종이 왕위에 있을 때만 해도 수양대군의 대외적 활동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간간히 여진족의 귀화정책이나 병법에 대해 문종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자암 중창을 건의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조정의 일에 간여하며 소위 정치를 시작한 것은 1452년(문종 2) 5월 문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왕이 어려서 정사를 직접 돌볼 수 없는 경우에는 왕실의 어른이 도와주게 되어있는데, 선왕의 비인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보통의 방법이다. 그러나 당시 왕실에는 이러한 일을 할 만한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왕의 숙부들을 비롯한 종친세력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단종의 가장 큰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 바로 아래인 안평대군 두 세력의 경쟁은 눈에 띄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즉위한 해 7월에 홍윤성(洪允成),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의 핵심 세력을 규합하고 이후 안평대군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각종 국사의 처리에는 정무에 익숙하지 않은 왕을 보좌하고 조언해 주는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의정부 대신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단종이 직접 즉위교서에 “내가 어리고 정사에 어두우므로 모든 사안을 의정부, 6조와 상의하겠다.”라고 밝히고 6조의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의정부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켰다.
급기야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통해 관직인사를 농단하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들의 자손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등의 추문이 돌기에 이르렀다. 김종서는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바로 앞서 언급한 김종서 세력의 부패상은 수양대군 세력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었다.
1453년(단종 원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휘하의 세력들과 함께 자신의 집 후원에 모여서 거사를 할 뜻을 알리고, 종복인 임어을운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죽였다. 그리고는 곧장 그 날의 입직승지 최항(崔恒)을 불러 김종서 세력이 ‘불궤한 짓을 공모하여’ 그를 먼저 처단하였으며, 나머지들도 모두 토벌하고자 한다고 알렸다. 이윽고 황보인을 비롯하여 안평대군에게 동조하던 관료들은 그날 밤 모두 살해당하거나 축출당하는 등 철저히 숙청당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며, 이는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두 유력한 종친을 둘러싸고 대신 및 관료들이 개입되어 벌어진 권력쟁탈전의 성격을 지닌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바로 그 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군사와 나라의 모든 중요한 사무를 위임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 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로 임명되어 군사와 인사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수양대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어서 수양대군에게 협조하였던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정창손(鄭昌孫) ,박종우(朴從愚) 등과 휘하에 있던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등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관직과 막대한 노비, 토지를 수여하였다.
특이한 것은 정난공신에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대거 포함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수양대군 세력이 그동안 의정부 중심의 행정체제 속에서 관료조직 내에 쌓인 불만을 해결하면서 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으려고 한 시도로 파악된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김종서 등의 대신에 의해 행해지던 전단은 사라졌으나, 대신 수양대군과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의 손에 정치권력이 넘어가면서 정치적으로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장기간 지속되기에는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은 수양대군이 직접 왕이 되는 길 밖에는 없었다. 그의 왕위 찬탈은 계유정난에서 이미 필연적으로 내포된 결과였다.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이 양위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수양대군의 정치적 행보를 저지하려던 금성대군과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혜빈 양씨(惠嬪楊氏)를 유배 보내자고 중신들이 건의하는 자리에서 단종이 결단한 것으로, 사실상 단종에게는 강요된 양위였고 찬탈이었다. 세조 왕위의 도덕적 명분 부재와 정통성의 하자는 세조 재위 기간 동안 그늘처럼 따라다니는 부담이었다.
세조 조반에는 그의 즉위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의 저항과 이를 처단하는 세조의 대응이 반복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2일 이른바 ‘사육신사건’은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거사를 그들의 동지였던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을 통해 밤중에 급히 세조에게 고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의 주모자와 동조자들이 모두 잡혀 와서 고문을 당하다가 일부는 옥사하고 나머지는 형장에서 죽었다. 1457년(세조 3) 6월 27일에는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여러 사람들과 결탁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의를 꾀한다는 안동 관노 이동의 고변이 들어왔다.
이어 10월 21일에는 금성대군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단종은 스스로 목매달아서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세조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친동생들과 조카를 죽이고, 자신에게 반대하였던 관료들과 그들의 식솔을 대량 살육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하루는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가 나타나서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일갈하였고 꿈에서 깨보니 세자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조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상당한 죄책감을 가지고 괴로워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조의 개인적인 고통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수차례 반복된 역모 시도들이 가져다 준 정치문화의 변화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세조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해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조처들이 행해졌다. 시급한 것은 세조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다수 확보하고 그 관리에 힘쓰는 것이었다. 세조가 즉위한 해에는 2천 2백여 명에게 좌익공신(佐翼功臣),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책봉하여 녹훈하였으며, 이들에게는 잦은 가자(加資)와 대가(代加)가 행해졌다. 이렇게 양산된 수많은 공신들은 조선 중기 대토지를 소유하며 특권적인 관직 독점을 꾀하였던 한명회 등 훈구세력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또한 세조는 공신들과 잦은 술자리와 사냥, 군사훈련을 통해 일종의 단합대회를 하였는데, 이것이 지나쳐 군신간에 실수가 나오기도 하였다. 세조의 총신 양정이 오랫동안 북방에서 수고한 것을 치하하고 위로하는 주연에서 술김에 실수로 세조의 양위를 권유하였다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 급기야 그를 참수했던 사건이 그 예이다.
또한 세조는 세종 대부터 행해지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강행했는데, 이는 의정부서사제의 폐지를 반대했던 하위지에게 “내가 어려서 서무를 재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권을 아래로 옮겨보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했던 세조의 권력 강화 의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세조는 문종과 단종의 짧은 치세를 거치는 동안 지속되었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국정의 여러 사무들을 추스르려 하였다. 이는 세종 대부터 시작된 국가의 문물과 제도 정비를 이어나가는 것이기도 했으며, 조선의 전 국토와 백성에 중앙의 행정력을 미치게 하여 제민지배를 강화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1458년(세조 4)에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여 백성의 호구와 직역의 실태를 낱낱이 파악하려 한 것이 그 예이다. 세조는 이 해 4월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유서를 내려 군적을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고, 이틀 뒤에 호패법의 시행을 명하였다.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에 대한 부정부패 감시를 위해 1462년(세조 8)에는 전국에 분대를 파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세조는 통치의 기준을 제공하는 법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즉위 초에 세조는 최항 등에 명하여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육전(六典)을 수찬하게 하고 이에 대하여 틈틈이 보고를 받으며 친히 필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460년(세조 6)에 호전(戶典), 그 다음해에 형전(刑典)이 완성되어 1466년(세조 12)에는 완성이 되지 않은 채로 일단락을 지었는데, 이것이 예종[조선](睿宗)과 성종[조선](成宗) 대를 이어 완성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내내 최고의 기준이 되는 법전으로서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후속 법전들도 이 《경국대전》이 제공한 기본 원칙과 이념을 준수하는 수준에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세조대에는 그 동안 전현직 관리들과 그 가족들에게 나눠주던 과전(科田)을 현직 관리들에게만 지급하는 직전법이 실시되었다. 이는 점차 관원의 증가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진 것과 또 기존 지급받은 과전이 점차 사유화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세조는 군대 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지방의 육군을 진관체제(鎭管體制)로 편성하여 지역단위의 방어체제를 형성하는 등 각종 제도 정비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의 손자 성종 대의 풍요로운 태평성대의 거름이 되었다.
세조는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468년(세조 14) 9월 7일에는 병세가 위급해지자 서둘러 세자에게 전위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수강궁에서 승하하였다. 세조는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은 의경세자로, 후에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조선](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작은 아들은 예종으로 그 역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불행했던 세조의 개인사만큼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또한 조선시대 내내 엇갈렸다. 여러 야담집에서는 세조와 그를 따랐던 측근 신료들의 도덕적 부당함을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고, 특히 단종의 추복과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화 되었던 조선후기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