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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왕조의 문화적 기틀을 세우다

1397년(태조 5) ~ 1450년(세종 32)

세종 대표 이미지

세종대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출생, 세자 책봉, 즉위

세종(世宗, 1397년~1450)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이름은 도(裪)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세종은 태종[조선](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 준수방(俊秀坊)의 태종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 5월 3일에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충녕군 시절이던 1408년(태종 8) 2월 16일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온(沈溫)의 딸과 혼인했는데,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처음에 태종은 1402년(태종 2) 4월 맏아들 제(禔)를 원자(元子)로 책봉했다가 2년 후인 1404년(태종 4) 세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 적장자(嫡長子) 상속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자의 난(王子-亂)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태종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장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정비(正妃)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맏아들 양녕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하지만 세자 양녕은 학업에 소홀했으며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등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부득이 맏아들 세자를 폐위하고 대신 일찍부터 학문에 독실했고 정치적인 능력도 갖추었던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세자 책봉 2개월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세종의 국정 운영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단, 태종은 군사권만은 세종이 3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직접 관장할 것을 천명하였다.

세종은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이 서거하면서 명실상부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세종은 재위 전반기에는 부왕 태종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6조로부터 직접 업무를 보고받고 지시를 내리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다가. 1436년(세종 18)부터는 의정부에서 먼저 심의한 후에 국왕의 재가를 받는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었다. 한편, 세종은 1421년(세종 3) 10월 맏아들 향(珦)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1445년(세종 27)부터는 세자에게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도록 하고 자신은 각종 문화 사업에 전념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 동안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의 확립, 국가 재정의 충실, 영토의 확장, 민생의 안정, 문화의 발달 등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국왕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에서는 세종이 이룩한 여러 업적들을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2 집현전 설치와 인재 양성

집현전(集賢殿)은 세종대 정치·사회적 안정과 문화적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관이었다. 집현전은 원래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 ‘집현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이며, 송(宋)나라에서도 당의 제도를 따라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집현전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조선 초기 정종대에도 설치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집현전은 유명무실한 기구에 그쳤으며, 명실상부한 학술 기관으로서의 집현전이 등장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은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성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학술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였다.

세종대에 집현전이 설치된 것은 1420년(세종 2) 3월이다. 설치 초기 집현전은 주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국왕·세자와 함께 유가(儒家) 경전(經傳)과 역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1428년(세종 10)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 사업을 수행하였다. 집현전에서의 학술 연구는 고제(古制) 연구와 서적 편찬 사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제 연구는 조선의 상황에 맞는 유교적 의례(儀禮)·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를 연구하는 것으로,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집현전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추진되었다. 서적 편찬은 고제 연구 및 여타 학술 활동의 결과물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하는 사업이다.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은 약 40종에 달하며, 연구 분야도 유학(儒學)이나 의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역사·문학·어학·군사·지리·의학·농업·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으며, 이들이 장기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로, 집현전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政務)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종 8) 12월에 처음 실시됐으며, 문헌 기록으로는 1426년(세종 8)을 포함하여 모두 세 차례의 사가독서 실시가 확인된다.

집현전은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계기로 설치된 지 37년 만에 혁파되었다.

이처럼 집현전은 존속 기간이 비교적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중에 관학(官學)의 중심 기관으로 역할하면서, 세종대의 학술·문화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이 기간 중에 약 100명의 학사들이 집현전을 거쳐 갔는데, 이들은 집현전 혁파 이후 세조~성종대에도 계속 관료로 활동하면서 15세기 문물·제도 정비의 완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3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최만리(崔萬理)·김문(金汶) 등이 새 문자의 창제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더욱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의 반포를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를 만든 목적과 각 문자의 의미 등을 상세히 설명한 해례(解例)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4 예악(禮樂)과 법제(法制)의 정비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건립된 조선은 유교적 예악정치(禮樂政治)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예(禮)’는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고 ‘악(樂)’은 조화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분수와 질서를 지키면서 살지만 그 가운데 상하 간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와 악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유교 정치의 실현을 추구했던 세종대에 국가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추진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의례의 정비는 새 나라 조선의 위상에 걸맞는 의례의 제도를 확정하는 것으로 태종대 의례상정소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고 세종대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는 길례(吉禮 : 국가 제사), 가례(嘉禮 : 국가의 경사), 흉례(凶禮 : 왕실의 장례), 빈례(賓禮 : 사신 영접), 군례(軍禮 : 군사 관련 의례) 등 다섯 가지[오례(五禮)]로 나누어지는데, 태종~세종대에 추진된 오례 정비의 결과가 정리된 것이 바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세종대에 정비된 오례의 내용은 이후 세조~성종대의 보완·정비 과정을 거쳐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간행·반포로 최종 귀결되었다.

세종대에는 예악 정치에서 또 하나의 축인 음악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 정비, 악기(樂器) 제작, 향악(鄕樂) 창작, 정간보(井間譜)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세종은 종래의 불완전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해 박연(朴堧) 등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고, 편경(編磬)·편종(編鐘) 등의 아악기를 새로 만들며, 조회(朝會)·회례(會禮) 및 국가 제례에서 사용할 아악을 제정하게 하였다. 또, 세종은 직접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봉래의(鳳來儀)」 등의 음악을 작곡하여 국가 의례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한편,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간보(井間譜)이다.

한편, 조선은 성문법(成文法)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법치(法治) 국가를 지향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건국 초부터 법전(法典) 편찬이 추진되어, 1397년(태조 6)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이 편찬되었고, 1408년(태종 8)에는 『경제육전』 이후의 법령들을 모은 『속육전(續六典)』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법전 편찬의 흐름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먼저 1422년(세종 4)~1428년에 『속육전』 이후 시행된 조례(條例)들을 정리한 『신속육전등록(新續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는 『경제육전』 이후 편찬된 『속육전』 계열 법전들의 내용과 그 이후 시행된 조례들을 종합·정리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과 『육전등록(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5 과학 기술의 발전

세종대에는 천문, 의학, 농업 등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먼저 천문 분야를 살펴보면, 세종은 1432년(세종 14)부터 장영실(蔣英實)·이천(李蕆) 등에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각종 천문 관측 기계들을 제작하게 하여 1438년(세종 20)에 모두 완성하였다.

그리고 1434년(세종 16)에는 경복궁 안에 석축 간의대(簡儀臺)를 축조하고 이곳에 관측 기계들을 비치하여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測雨器)가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가 마련되었다. 한편, 세종은 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 결과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1442년)과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1445) 등이 편찬되었다.

의학 분야에서 세종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학사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연구하게 하여, 2년 만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또, 1445년(세종 27)에는 역시 집현전에 명하여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집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농업 분야에서 세종은 삼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농사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사짓는 방법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삼남에서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농사 방법들을 종합·정리하게 했는데, 그 결과물이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이밖에도 인쇄술 분야에서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활발히 추진되어 경자자(庚子字, 1420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 병진자(丙辰字, 1436년) 등이 만들어졌다. 또, 군사 분야에서는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각종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고, 1448년(세종 30)에는 화포 제작 및 화약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편찬되었다.

6 공법(貢法) 시행과 북방 개척

세종은 민생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추진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법(貢法)의 시행이다. 공법 이전에는 관리가 매년 풍·흉작을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했으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관의 부정으로 폐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개정한 것이다. 세종은 1436년(세종 18)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다.

공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기본 세율을 1/20로 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문무백관으로부터 촌민에 이르기까지 약 17만 명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등 민생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4군 6진 개척이다. 즉, 세종은 빈번한 침입과 약탈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유역에는 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 등의 4군을 설치했고,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경성·회령·종성·경흥·온성·부령 등의 6진을 개척하였다. 그 결과 세종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으로 확정되고 그 이남 지역이 우리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대업이 이루어졌다.

7 불우한 가정사와 질병의 고통

이상과 같이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이었지만, 세종 개인의 삶에는 많음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먼저 즉위 초반 장인 심온이 처형되고 처가가 풍비박산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태종이 상왕의 군사권 행사에 이견을 보였던 강상인(姜尙仁) 등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로 심온을 지목하여 처형한 것이다. 태종은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였지만, 세종에게는 처가를 잃는 아픔이었다.

세종은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먼저 잃는 아픔도 겪었다. 먼저 1424년(세종 6)에 맏딸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잃었으며, 1444년(세종 26) 12월에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이, 한 달 후인 1445년 1월에는 일곱 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연달아 서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446년) 4월에는 왕비 소헌왕후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수많은 질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병에 관한 기사가 약 50여 건에 이르는데, 20대 후반부터 서거할 때까지 각종 질환에 시달렸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질병은 그가 정치 체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하고 세자에게 정무를 대리하도록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은 이상과 같은 불우한 가정사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를 다하였다. 그 결과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은 찬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건국된 지 50여년 밖에 안 되었던 조선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450년(세종 32) 2월 4일 세종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저(私邸)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2월 17일에 영응대군 집의 동별궁(東別宮)에서 향년 5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같은 해 6월 경기도 광주(廣州) 헌릉(獻陵) 서강(西岡)에 장사지냈다가, 1469년(예종 1) 3월에 여주(驪州) 서북성산(西北城山) 자좌(子坐) 자리(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이장했으며, 능호(陵號)는 ‘영릉(英陵)’이다. 시호(諡號)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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