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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李汪]

볼모생활에서 의문의 죽음까지, 비운의 왕세자

1612년(광해군 4) ~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 대표 이미지

고양 소경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인조[조선](仁祖)의 맏아들이자 왕세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9년 동안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에 돌아온 후 사망하였다.

2 조선에서의 생활 : 병자호란까지

소현세자의 이름은 왕(炡)이며, 1612년(광해군 4년) 1월 4일 당시 아직 능양군이었던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조선](宣祖)의 증손자이자 후일 원종[조선](元宗)으로 추존되는 정원군의 손자로, 그의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인조는 일개 왕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역시 왕위와는 거리가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12살이던 1623년 능양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그의 입지는 한순간에 급변하였다. 반정을 일으킨 그 해 소현세자는 원자가 되었으며, 1625년(인조 3년) 14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인조는 세자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여, 소현세자가 원자일 때부터 오윤겸(吳允謙), 이정구(李廷龜), 정엽(鄭曄), 정경세(鄭經世)를 원자의 보양관으로 임명하고, 당시 산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을 원자를 가르치는 강학원의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소현세자가 정식으로 세자가 된 이후에도 이원익(李元翼), 윤방(尹昉),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을 시강원의 관원으로 삼아 세자의 교육을 보강했다. 소현세자는 명실상부 차기 조선의 왕으로서 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살았던 시기는 북방의 후금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으며, 그의 일생은 그 영향을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으로 받게 되었다. 16세이던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키자, 아버지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고, 자신은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군량미를 거두고 의병을 모집했으며, 무사를 뽑아서 후금과의 전선으로 올려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분조 활동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그는 강석기(姜碩期)의 딸 강빈(姜嬪)과 혼인하였다.

소현세자는 1625년에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이후 칙사를 맞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등의 문제로 명의 승인을 오래도록 받지 못하였다. 결국 10년 가까이 지난 1634년(인조 12년)에 명으로부터 정식으로 세자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의 위치는 더욱 탄탄해진 것처럼 보였다. 1636년(인조 14년) 3월에는 세자비와의 사이에 원손이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러나 세자로서 첫 시련을 안겨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어 다시금 소현세자에게 위기를 불러왔다. 원손이 태어난 바로 그 해 12월, 청군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해 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윤방과 김상용(金尙容)에게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 원손,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데리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 부득이하게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남한산성은 곧 청군에 포위되었고,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고립된 성에 틀어박히게 된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전세를 타개할 방법이 없게 되자 마침내 조선 조정은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항복의 조건이었다. 청은 정묘호란의 경험을 교훈삼아 더욱 철저한 항복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는 세자를 인질로 내놓을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청이 제시한 조건에는 왕의 장자와 또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삼고, 여러 대신들은 아들이나 동생을 인질로 삼으며, 인조의 신상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인질로 삼은 왕자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문제는 척화신을 내보내는 것, 인조 스스로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과 함께 강화협상의 주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형세가 더욱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적진으로 갈 척화신을 모집하는 등 항복을 준비했고, 소현세자 역시 스스로 성을 나가겠다는 글을 비변사에 내리게 된다.

결국 병자호란이 조선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1월 30일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성을 나서 그길로 청군 진영에 들어갔다. 이어서 2월 8일 빈궁 및 봉림대군을 대동하고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 좌부빈객 박황(朴潢), 우부빈객 박로, 보덕 이명웅(李命雄), 필선 민응협(閔應協), 문학 이시해(李時楷), 사서 정뇌경(鄭雷卿), 설서 이회(李禬) 등의 시종 관원과 함께 청의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의 세자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년에 이르는 장기간 조선을 떠나게 된 것이다. 세자를 전송하면서 인조는 예친왕에게 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우도록 부탁하고, 세자에게는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는 간절한 분부를 내렸다.

3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 조선과 청의 사이에서

소현세자는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임시로 들어갔다가 5월 7일 새로 지어진 심양관소에 들어갔다. 이후 9년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인질 생활의 시작이었다.

소현세자에게 인질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청은 소현세자를 자신들의 제국의 일부인 조선의 상징으로 여겨 각종 행사에 참여시켰다. 봉림대군과 함께 청 조정의 조회에 참석해야 했으며, 황제 홍타이지가 사냥하러 갈 때도 따라가야 했다. 황제를 비롯한 여러 왕들이 여는 연회에도 자주 참석하였으며, 청의 통제 하에서 그들과 일정한 교류도 해야 했다. 특히 몽골의 왕공 및 티벳 불교 승려와 청 조정의 접촉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는 청의 풍속 및 의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자는 청이 명을 침공하러 원정할 때 역시 동참을 요구받았다. 명에서 노획해 온 물건들을 전시하는 자리에도 소현세자를 불러 직접 노획물을 보게 하였으며, 1642년에는 금주·송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명의 이부상서 홍승주가 변발을 하고 청의 복색을 입고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는 명의 세력이 후퇴일로에 있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1644년에는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까지 들어가서 명이 멸망하는 현장을 목도하였다. 이때 북경에 머물고 있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친교를 맺어 대화를 나누고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이를 통해 얻은 서양의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 등을 조선에 가지고 오는 등 서양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오랜 인질 생활은 소현세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청의 강요에 의해 사냥이나 원정에 동행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승마를 오래도록 하느라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음식이나 습관이 너무나도 낯선 심양 땅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소현세자는 잦은 병치레에 고생하였다.

청에서 소현세자와 실무상 가장 많이 접촉한 것은 이전부터 조선에 관한 일을 담당해 오던 용골대와 조선 출신으로 청에서 통역을 맡고 있던 정명수(鄭命壽)였는데, 이들은 교섭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세자에게도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는 소현세자에게 정신적으로 피로를 안겨 주었다. 한 번은 용골대가 세자를 협박하다시피 하였고, 소현세자가 화를 내며 자신이 인질로 와 있어도 한 나라의 세자임을 강조하여 용골대가 사과한 일까지 있었다.

1639년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관원 강효원(姜孝元), 정뇌경 등이 조선에 해를 끼치는 정명수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이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그들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끝내 실패하였고, 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피로인들을 마주치는 것도 세자에게는 고역이었다. 소현세자 개인적으로도 어머니 인열왕후 및 장인 강석기의 사망, 어린 딸의 죽음 등이 큰 상처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쌓이고 쌓여 한 번은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소현세자를 괴롭힌 것은 조선과 청의 사이에 끼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대변해야 하는 난제였다. 청에서는 소현세자를 대 조선 교섭의 주요 창구로 활용하면서, 조선에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소현세자를 추궁하고, 중요 현안을 세자에게 알려 보다 쉽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또한 단순히 청의 입장을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자의 직권으로 조선 관원들에게 지시를 내림으로써 일을 처리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642년에는 용골대가 세자의 직권으로 명과 몰래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은 전 선천부사 이계(李烓)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반면 조선에서는 소현세자에게 이국에서 굳은 절개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양관소에서 보내오는 정보에 의지하여 대청관계를 꾸려 나갔으며, 세자가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고 나아가 가능한 한 문제를 조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상반된 기대에 부응해야 했던 것이다.

양국 사이에 끼인 미묘한 입장에서, 소현세자는 나름대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소현세자의 심양관소에서는 꾸준히 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심양장계(瀋陽狀啓)』로 남아 있다. 또한 청에 잡혀간 피로인들을 속환하는 데 양국의 입장을 절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의 군병을 징발할 때는 청에 조선의 곤란한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일례로 1640년(인조 18년)에는 용골대와 정명수가 조선 내부에서 수군을 징발하는 데 반대하는 자가 있지 않았는지를 묻고, 청에서 도망간 사람들을 조선에서 숨겨주고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세자는 최대한 조선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아울러 1641년 김상헌 등이 청에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청에 끌려오자 청에서는 척화신들을 심문하는 자리에 소현세자를 참여시켰는데, 소현세자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음식을 넣어주는 등 그들의 구호를 위해 신경을 썼다. 소현세자는 척화신들을 구하기 위해 청 태종에게 청원하여 신익성(申翊聖) 등을 구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심양관소의 역할이 커지면서 그 규모도 팽창하였다.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소의 인원은 초기부터 500명이 넘는 대규모였으며, 관소를 관리하기 위해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을 두어 임무를 나누는 등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구색을 갖추었다. 관소에 딸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청과의 외교적 문제를 절충하고, 청의 유력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이 비용은 대부분 조선에 전가되었는데, 이는 병자호란으로 피폐해 있던 조선에 큰 부담이 되었다.

심양관소에서는 비용을 일부 자체적으로 마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청에서는 심양관소의 식량 및 비용을 전액 지원해 주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비용을 마련하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1641년 말부터는 땅을 떼어 주고, 관소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심양관소에서는 곤란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조선에서 잡혀 온 피로인들을 사들여 이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였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왔을 때 심양에 남겨놓은 곡물은 4700여 석, 농사짓는 일꾼은 16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현세자 자신은 최대한 민감한 문제를 피하고자 노력했고, 대부분의 경우 부왕 인조에게 결정을 맡기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그가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재량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청에서는 제반사를 심양관소를 통해 처리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조선에서 보내는 사람과 물자는 대부분 심양관소를 거쳐 청에 들어갔다. 조선에서도 심양관소에서 보내오는 정보에 따라 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청과 가까운 지역의 지방관들은 청에 관련한 사안에 대해 그때그때 내려오는 소현세자의 지시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는 조청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조선을 위해 노력한 바가 컸다.

문제는 이렇게 소현세자가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점점 부왕 인조의 경계를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현세자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4 부왕 인조와의 갈등과 최후

인조는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절개를 지키며 조선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경우에 따라서 청의 입장을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과의 교섭을 위해 많은 비용을 조선에 청구하고 있었고, 그 생활도 절개를 지키는 검소한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를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소현세자가 백랍과 망건을 구하여 의주부윤이 제주도에 공문을 보내어 실어오자, 인조가 화를 내며 강관들이 제대로 간하지 않았음을 꾸짖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청이 인조를 입조시키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인조가 반청적인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병자호란 때 잃었어야 할 왕위를 유지시켜 주었는데도 청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힐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심양의 소현세자는 친청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인조에게 비쳐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는 청에서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소현세자를 대신 세울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청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성구(李聖求)는 청이 칙사를 파견하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인조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으며, 홍서봉(洪瑞鳳) 역시 인조가 충혜왕(忠惠王)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또한 청 태종의 참모 범문정이 인조가 항복했을 때 세자로 왕위를 교체했어야 한다고 후회했다는 말까지 전해졌다.

인조의 의구심은 점점 더 강해져, 급기야는 소현세자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심양관소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1644년(인조 22년) 초 소현세자는 두 번째로 귀국하였는데, 이는 강빈의 아버지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전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이 친가에 가서 곡을 하지 못하게 막는 몰인정한 처사를 자행하며 노골적으로 냉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료들도 인조를 비판하였으나, 인조는 법 밖의 예이고 외람한 일이라고 대답하였을 뿐이다.

이는 1640년(인조 18년) 소현세자가 첫 번째로 귀국하였을 때 서로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인조는 또한 임광(任絖)과 같이 소현세자의 곁에서 잘못을 간할 인물을 심양관소에 보냈으며, 심양관소의 관원들을 대거 교체했다. 아울러 세자에게 꾸지람을 받아도 끝까지 그의 잘못을 깨우친 환관 김언겸을 세자가 귀국할 때 딸려보내기도 했다. 소현세자 역시 부왕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평양에서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아 마치 정식 과거와 같이 하여 부왕을 더욱 자극하였다.

소현세자는 1644년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북경에 가서 명의 멸망을 본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청의 입장에서는 북경을 점령하여 중국 본토로 들어간 이상 조선에 대해 기존보다 경계할 필요성이 줄었으며, 또한 조선에 대한 회유라는 목적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국에 있는 부왕과의 골은 이미 매우 깊어져 있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청에서 다른 뜻을 가지고 세자를 내보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조선에 영구 귀국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그다지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인조는 신하들이 세자를 맞이하여 진하하는 것조차 막았다.

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체질도 강건하지 못하여 많은 병을 앓았다. 게다가 부왕인 인조의 냉대는 그의 건강에 해가 되면 되었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지는 몰라도 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4월 23일에 학질에 걸리더니, 불과 사흘 만인 4월 26일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였다. 그가 오랜 고생 끝에 본국에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리고, 의관들 역시 함부로 치료하다가 세자가 급사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피를 흘리고 있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하여,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부르고 있기도 하다.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그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처벌을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장례를 박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파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이에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료들이 반대하였음에도, 인조는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였다. 나아가 강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녀를 사사하고 그녀의 집안을 멸족시키는 강빈옥사(姜嬪獄事)를 단행하였으며,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을 제주도에 귀양보내 셋 중 하나만 살아남는 비참한 지경에 빠뜨렸다.

이는 소현세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인조가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모를 강빈 및 그의 아들들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나아가 제거하려고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조소용(趙昭容)은 강빈과 사이가 나빴는데, 그녀의 획책도 강빈을 사사하는 데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후 소현세자의 자손들은 왕위에서 멀어졌으나, 종통(宗統)을 잇는 상징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역모 때 추대의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때 희생된 밀풍군 탄(密豊君 坦)이다. 또한 소현세자 대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것은 이후 예송(禮訟)의 단초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서양 문물을 수용할 가능성을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제정세는 그를 끝까지 괴롭혔고, 결국 그의 능력은 왕위에서 펼쳐보이지 못하고 시들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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