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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申景濬]

국학의 기틀을 다진 실학자

1712년(숙종 38) ~ 1781년(정조 5)

신경준 대표 이미지

도로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생애와 가족관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12년(숙종 38) 4월 15일 전라도 순창의 남산에서 태어났다.

신경준의 가문은 순창의 명문가인 고령 신씨로,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그의 직계 10대조이다.

신말주는 순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순창에서 거주해왔다.

순창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명문가였지만, 그의 가까운 직계 선조들은 대체로 한미한 직책을 얻는데 그쳤다. 신경준의 고조인 신극순(申克淳)은 인조[조선](仁祖) 대에 말단직인 참봉을 지냈고, 증조부 신운(申澐)은 벼슬을 한 이력이 없다. 사실 신운보다는 그의 형제인 죽당(竹堂) 신유(申濡)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으며, 소북의 이름난 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준의 조부는 숙종[조선](肅宗) 대 찰방을 지낸 신선영(申善泳)이다. 아버지 신뢰(申洡) 역시 벼슬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진사 이의홍(李儀鴻)의 딸이다.

신경준은 5세에 《시경》을 읽었고, 15세에 이미 문장을 이루었을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미 23세인 1734년(영조 10) 한시에 대하여 보고 들은 이론을 정리하여 시 짓는 법을 설명한 「시칙(詩則)」을 지을 만큼 글에 대한 이해가 해박하고 글 짓는 능력도 뛰어났다.

또한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은 그가 서울의 최신 학문을 접하고, 이를 통해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 자주 거처를 옮겼다. 27세가 되던 1738년(영조 14) 경기도 소사로 이주하여 3년간 거주하였는데, 시를 지어 그 소회를 표현하고, 당시의 철학적 사유를 문답 형식의 글로 남겼다. 30세가 되던 1741년(영조 17)에는 충청도 직산으로 이주하여 다시 3년간 거주하면서 「직주기」 등을 남겼다.

그 후 1744년(영조 20) 다시 순창의 옛 집으로 돌아온 그는 10여 년간 그 곳에 머무르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성취한 학문의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그 결과물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나 『강계고(彊界考)』 등의 적극적인 저술활동으로 나타났다.

중년 이후로는 관로도 트이기 시작했다. 그는 43세가 되던 1754년(영조 30) 지역 향시에 응시하였고,

뒤이어 여름에는 회시에 응시하여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순창에서 침잠하던 시기의 저작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가적 편찬 사업을 담당할 적임자로 뽑혀 중용되었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시작된 벼슬자리였으나 몇 변의 굴곡을 경험하면서도 사헌부 장령, 사간, 동부승지, 제주목사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말년까지 정계에 남아있었다.

신경준은 총 세 번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은 광주 이씨로 이형만(李亨晩)의 딸이었는데, 그 사이에서는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강릉 최씨로 최돈오(崔惇五)의 딸이었으며, 둘 사이에 이영갑(李永甲)에게 시집간 딸 하나를 두었다. 세 번째 부인은 평창 이씨로 이광집(李光潗)의 딸이었으며 슬하에 장남 신재권(申在權)과 차남 신두권(申斗權), 그리고 이호연(李浩淵), 윤치정(尹致鼎)에게 시집간 딸 둘을 두었다. 그의 아들이나 사위들이 출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 조선 후기 사상적 변화와 신경준 :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학문

명말청초 중국에서는 커다란 사상적 변화의 흐름이 몰아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의 변화가 그 것이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출판문화가 발달하고 서양 세계의 지식과 학문적 방법론이 유입되면서, 지식의 양이 늘어나고 또한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달라졌다. 즉,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대표되던 형이상학적 경향이 퇴조하고 보다 실증적인 학문이 발달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 사상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자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 기조는 변하지 않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사변적인 담론이 오고갔지만, 일각으로부터 뚜렷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학문적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지식인들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에 준거하여 어떠한 지식이 옳은 것인지 증명하려 들었고, 또한 실생활에서 편리함을 제공하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지식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서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실질적인 삶의 터전인 ‘조선’의 것 자체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역사, 지리, 언문 등에 대한 다양한 저작들이 등장하였으며,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가 제작되었고, 회화에서는 조선의 실제 경치를 그림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화풍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시기 활동했던 인물 중에서도 신경준의 위상은 다소 독특하다. 그에게서는 사승관계나 특정 학파와의 연계성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그의 학문적 경향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강계고』는 고대사에 대한 저술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특히 그 지리적 정보가 정확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때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방대한 역사적 지식을 참고하여 고대 여러 국가들의 경계나 지명을 현재 위치에 비정한 역사지리학적 저술이다.

지리와 관련된 저술로는 『도로고(道路考)』와 『산수고(山水考)』, 『사연고(四沿考)』, 『가람고(伽藍考)』 등을 들 수 있다. 『도로고』는 전국 각 지역의 도로에 대하여 알려진 정보가 실제로 정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쓴 저술이다. 능행로를 포함한 전국의 주요 도로와 각지의 주요 시설까지의 거리는 물론 역로, 해로 등 전국의 도로망을 총망라한 정보를 담고 있다.

『사연고』는 한반도 사방의 물길인 압록강·두만강과 동·서·남해의 연안교통로에 대하여 정리한 글이다. 『산수고』는 전국의 산과 강을 각각 12산과 12수로 분류하여 이해한 저술로 『산경표(山經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람고』는 전국에 있는 사찰의 위치와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한편, 신경준은 언어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였다. 그는 『훈민정음언해』에서 훈민정음이 체계적으로 이해되지 못하여 제작된 의도만큼의 실용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훈민정음의 음운을 나름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앞서 언급한 「시칙」도 역시 음운학에 기초하고 있다.

3 관직생활 : 재야의 고수,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신경준은 43세에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초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관로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호남지방에서 이름난 학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1754년(영조 30) 증광시(增廣試)가 치러질 때 호남지방의 시험관으로 홍양호(洪良浩)가 내려왔는데, 그는 부시험관을 맡은 호남의 수령 둘에게 지역에 이름난 명사가 있는지 물었고 그들은 모두 순창의 신경준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홍양호와의 인연은 그 뒤로도 지속되어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듬해인 1755년(영조 31) 신경준은 승정원의 대리 임시직인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 이어 1756년(영조 32) 휘릉(徽陵)의 별검에 제수되었다.

3년 뒤인 1759년(영조 35)에는 예조와 병조의 좌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등의 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우부승지,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또한 충청도사, 장연현감, 북청부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등의 외직을 맡기도 하였다.

1781년(정조 5) 7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간 조정의 여러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관직생활을 했지만, 막상 조정에서는 절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문집 『여암유고(旅菴遺稿)』를 살펴보면 편집상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드러진 교류를 보인 인물은 드러나지 않고, 그가 써주거나 받은 행장이나 묘갈명 등은 거의 가족을 위한, 혹은 가족에 의한 것이었다. 문집에서 그나마 두드러지는 존재는 만사(輓詞)와 묘갈명을 써 준 홍양호 정도이다.

정치적인 비호세력이 없다는 것은 곧 순탄한 관직생활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두 번이나 귀양형에 처해졌었다. 첫 번째 귀양은 55세가 되던 1767년(영조 43)의 일이었다. 이 해에 신경준은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순창에 머무르며 서둘러 한양에 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면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약 7개월간의 귀양생활 끝에 이듬해 2월에 방면되었다.

두 번째는 1770년(영조 46) 최익남(崔益男)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조의 낭관을 지낸 최익남이 상소하여 세손은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여 효를 다해야 하며, 영의정 김치인이야말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가 크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조정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경준은 동부승지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승지로서 최익남의 상소를 아무 생각없이 받았다는 이유로 관계가 중한 것으로 의심되어 수원으로 3년간 유배형에 처해졌다.

비록 굴곡은 있었을지라도, 신경준의 행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오랜 기간 초야에서 다져온 그의 실력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영조(英祖) 대에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나 『속대전(續大典)』 등 대규모의 국가적 편찬 정리 사업이 연달아 행해지고 있었다. 『문헌비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를 주관할만한 적임자를 찾고 있었는데, 능은군 구윤명(具允明)은 신경준은 전례와 고사에 매우 밝다며 그가 쓴 『강역고』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은 신경준을 비국(備局)의 낭청직에 추천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경준은 『동국문헌비고』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문헌비고』의 「상위고」는 신경준의 『강역지』에 의거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여지고」의 구성과 저술에는 신경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영조 역시 이 사업에 있어서 신경준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경준이 지리, 천문, 역법 등 다방면에 걸쳐 박식한 것에 놀라워하며, 해박한 재원이라고 칭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공이 많은 것은 신경준이라고 하며 그를 공공연하게 치켜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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