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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神德王后]

조선 최초의 왕비

미상 ~ 1396년(태조 5)

신덕왕후 대표 이미지

정릉(貞陵)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비이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가 1391년(공양왕 3)에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 신덕왕후는 태조의 유일한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책봉되었다. ‘신덕(神德)’은 사후에 내려진 존호(尊號)이다.

신덕왕후의 본관은 곡산(谷山, 信川)이고, 아버지는 강윤성(姜允成)이다. 강윤성은 찬성사(贊成事),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지만, 1357년(공민왕 6)에 채하중(蔡河中)의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신의왕후 소생으로는 정종, 태종 등 6남 2녀가 있고, 신덕왕후는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이고, 딸 경순공주(慶順公主)는 이제(李濟)와 혼인했다. 이방석은 조선 건국 직후 세자에 책봉되었지만, 이방석을 비롯하여 이방번, 이제 모두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했다. 경순공주는 출가(出家)하였다.

2 조선의 첫 왕비가 되다

조선 건국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고, 부인 강씨 역시 왕비가 되었다. 이때는 첫 부인 한씨의 삼년상이 행해지고 있었던 중이어서 실질적인 조선의 첫 왕비는 현비, 즉 신덕왕후가 되었다. 이후 왕비의 위상에 맞는 조처들이 이어졌다. 신덕왕후의 3대가 봉증(封贈)되었고, 본향인 곡주(谷州)가 곡산부(谷山府)로 승격되었다.

신덕왕후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자기 소생 막내아들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었을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당시 공신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이와 공로가 있는 인물로 세자를 청했지만, 태조는 신덕왕후가 이방석의 형인 이방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방번의 인물됨을 꺼려한 공신들이 신덕왕후 소생이어야 한다면, 이방번보다 조금 나은 ‘어린 서얼[幼孼]’ 이방석을 세자로 추천하였다는 것이다.

위의 『태조실록』 기록은 왕위계승이 부적절했다는 평가 아래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방석을 ‘어린 서얼’로 설명한 것부터 신덕왕후를 태조의 후처(後妻)가 아닌 첩(妾)으로 인식했던 태종대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나 공로를 배제하고 신덕왕후의 의중만 고려한 세자 책봉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담겨져 있다.

건국 이후 신덕왕후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다. 대부분은 불교 행사와 관련된 기록이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함께 법회를 구경하러 다니거나 불경을 같이 듣는 일이 잦았다. 불교를 믿었던 태조는 불사를 자주 개최하였고, 주로 왕비와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덕왕후는 왕비의 지위에 오래 있지도 못했다. 즉위 초부터 병이 있었고, 결국 1396년(태조 5)에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왕비의 장례를 치르면서 권근(權近)에게 부인에 대한 감정을 풀어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관직에 있을 때부터 조선 건국의 과업을 이루기까지 왕후의 내조가 많았고, 이후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충고하고 도와주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신덕왕후의 죽음을 어진 재상[良佐]을 잃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후 태조는 왕후가 묻힌 정릉을 자주 찾아가며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국은 요동쳤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이 변란은 신덕왕후의 아들들과 사위를 모두 죽음으로 내몰았다.

3 조사의의 난

세자였던 이방석의 죽음에 반기를 든 세력도 있었다. 안변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는 신덕왕후의 친족으로서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조사의의 난의 발생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특히, 그 배후에 태조가 개입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실록에서는 태조의 안위를 우려하고 있을 뿐 난에 개입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태조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없지는 않다. 난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9일에 태조는 조사의의 군대가 있었던 곳과 가까운 함주로 향하였다. 즉, 태조는 조사의의 군대 뒤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러한 이동 경로는 태종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조사의와 태조의 협력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태조의 아문인 승녕부(承寧府)의 당상관 정용수(鄭龍壽), 신효창(申孝昌)이 태조를 호종하는 중에 조사의와 협력하였던 것도 태조의 개입이 있었음을 짐작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난은 1402년(태종2) 11월 5일에 동북면 안변에서 발생하여 이후 강원도 북단과 서해도까지 확산되다가 27일에 정부군에 의해 서북면 안주(安州)에서 평정되었다. 이로 인한 관련자들의 처벌은 태종대 내내 지속되었을 정도로 여파가 심각하였다.

4 신덕왕후와 태종

태종에게 태상왕 태조는 부왕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긴장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태조가 세상을 떠날 무렵까지만 해도 신덕왕후의 왕비로서의 위상은 확고한 편이었다. 신덕왕후 사후에 명에서 온 칙서를 보면 강씨를 ‘수비(首妃)’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대외적인 인식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 왕실의 유일한 왕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칭호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권근(權近)이 지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비문에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가 ‘수비(首妃)’, 신덕왕후 강씨가 ‘차비(次妃)’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돌아가신 신덕왕후가 계모(繼母)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물었는데, 유정현(柳廷顯)은 신덕왕후 혼인 당시에 신의왕후가 생존했기 때문에 계모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게다가 태종은 신덕왕후에게 갚을 만한 의리와 은혜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다만 부왕 태조가 사랑하던 의리를 생각하여 어머니에 준하는 격식으로 제례를 지내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인식은 세종, 세조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17세기 현종대에 이르러 신덕왕후의 위상에 변화가 있게 되는데, 송시열(宋時烈)의 주장에 따라 신덕왕후가 종묘 태조의 묘정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이 무렵에는 신의왕후와 신덕왕후의 위상을 거의 동등하게 보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 〈경연일기〉에서는 1669년(현종 10)의 경연에서의 대화가 서술되어 있다. 당시 현종은 신덕왕후가 여타의 계비(繼妃)와는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였고, 송준길은 고려 말의 다처제 풍습을 경저(京妻), 향처(鄕妻)로 표현하며 신덕왕후를 잠저 때의 경처로 논하였다.

5 정릉이 옮겨지다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직접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능지를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7년(태조 6) 1월에 ‘언덕과 산이 감싸서 풍수가 길하게 호응하는’ 길지인 취현방(聚賢坊) 북쪽 언덕에 정릉을 조성하였고, 그 동쪽에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도 건립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면 정동(貞洞) 일원에 정릉과 흥천사가 조성되어 있었다. 신덕왕후의 능을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도성 안에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태종은 신덕왕후와 관련한 제도, 의례 등을 모두 바꾸었다. 먼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 현재 정릉은 성북구 정릉로에 있다. 당시 의정부에서는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 것에 반해 정릉만 성안에 있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냈고, 태종도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정릉을 옮기고 나서 옛 터에 남은 돌로 광통교(廣通橋)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지금도 청계천의 광통교를 가면, 신덕왕후 능에 사용했던 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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