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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후[神懿王后]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

1337년(충숙왕 6) ~ 1391년(공양왕 3)

신의왕후 대표 이미지

태조비 신의왕후 추상존호 옥보

e뮤지엄(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첫 번째 비(妃)이다. 안변(安邊) 한씨(韓氏)로서 할아버지는 한규인(韓珪仁), 아버지는 한경(韓卿), 어머니는 삭녕(朔寧) 신씨(申氏)이다. 그녀는 1351년(공민왕 즉위)에 이성계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1391년(공양왕 3)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의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자녀는 6남 2녀를 낳았고, 그들 중에 정종과 태종이 있었다.

2 고려 말, 장수 이성계의 부인이 되다

신의왕후 한씨는 1337년(충숙왕 6)에 안변 한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가문은 중앙정계에서 활약하기보다 영흥(永興) 지역에서 기반을 갖고 있던 세가(世家)였다. 할아버지 한규인, 아버지 한경 등의 관직은 조선 건국 이후 추증을 받은 것이다.

신의왕후 한씨는 1351년(공민왕 즉위) 15세에 2살 연상인 17세의 이성계와 혼인하였다. 이후 40년의 부부생활을 하며 이방우(李芳雨), 이방과(李芳果, 정종),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태종), 이방연(李芳衍),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등의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들은 고려 말에 이미 장성하였다. 이방원은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방연은 1385년(우왕 1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다만 이방연은 어머니 한씨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두 딸은 어렸던 듯하다. 조선 건국 후인 1396년(태조 5)에 맏딸 경신공주가 이거이(李居易)의 아들 이백경(李伯卿, 후에 이저(李佇)로 개명)에게 출가했고, 둘째 딸 경선공주는 1393년(태조 2)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심종(沈悰)과 혼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1391년(공양왕 3)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는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다. 1392년 조선 건국시 태조 이성계는 부인의 상례을 치르고 있었으며, 삼년상을 마친 때는 1393년(태조 2) 11월이었다. 건국 이후 절비(節妃) 시호와 제릉(齊陵) 능호를 받았다.

신의왕후가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관련 기록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후’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찬미(讚美)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여성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전근대 여성으로서 으레 갖추어야 할 덕목을 잘 수행하였음이 서술되어 있다.

태종 즉위 이후 권근이 지은 제릉 비문에 따르면, ”태상왕(太上王, 태조)께서 처음에 장상(將相)이 되어 수십년 동안 전투에 나서면서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后, 신의왕후)가 힘을 다하여 집안을 다스려 성공하도록 하였고, 성품이 투기(妬忌)하지 않아서 시첩(侍妾)에게도 예(禮)로 대접하였으며, 많은 아들을 의리로써 가르쳤다.“고 평가하였다.

3 ‘향처’ 신의왕후와 ‘경처’ 신덕왕후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왕비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이 신의왕후 한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이다. 고려시대에는 법제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고려 후기에 원의 영향으로 일부다처의 사례들이 늘어났다. 고려 말의 무장 이성계도 첫 번째 부인이 생존했을 때 두 번째 부인을 맞았다. 두 번째 부인 강씨의 혼인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아들 이방번(李芳蕃)의 나이를 고려하면 우왕대 초 즈음이 아닐까 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비들의 위상을 어떻게 정리할 지는 주요한 쟁점이었다. 1396년(태조 5)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한 이듬해에 명나라에서 온 황체의 칙위조서(勅慰詔書)에서는 신덕왕후를 ‘수비(首妃)’로 칭하였다. 이는 비록 대외적인 인식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도 신덕왕후는 세자 이방석의 생모이자 ‘유일한’ 왕후로서 위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상왕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수비’는 신의왕후로 바뀌어졌다. 1409년(태종 9) 권근이 지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비문에는 신의왕후가 ‘수비(首妃)’, 신덕왕후가 ‘차비(次妃)’로 표기되었다.

후대에는 신의왕후를 ‘향처(鄕妻)’, 신덕왕후를 ‘경처(京妻)’로 거론하기도 했다. 1669년(현종 10)에는 경연에서 송준길(宋浚吉)이 고려 때에 ‘경처’와 ‘향처’의 존재를 거론하며 이성계의 두 부인을 대입하였다. 그리고 정약용(丁若鏞)의 『대동수경(大東水經)』에도 송시열(宋時烈)이 신의왕후를 ‘향처’, 신덕왕후를 ‘경처’라고 일컬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두 부인의 출신지 혹은 혼인할 당시의 거주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부인이 모두 ‘처(妻)’의 지위에 있으면서 각기 거주지도 달랐던 듯하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때 신의왕후가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신덕왕후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다가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동북면으로 함께 피신했다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이처럼 고려 말에 일부다처의 풍습이 있었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이성계의 혼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성계가 신의왕후의 가문인 안변 한씨와의 혼인을 매개로 동북면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한편, 신덕왕후 가문인 신천(信川) 강씨(康氏)와의 혼인을 통해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기반을 다졌다는 견해이다.

4 정종, 태종 즉위 이후의 추숭

신의왕후는 사실상 왕비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반면, 신덕왕후는 실제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고, 건국 직후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각 아들들의 정치적 운명이 갈리면서 두 왕후의 사후 위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신덕왕후의 아들 이방번, 이방석이 죽임을 당한 반면, 신의왕후의 아들 이방과(정종), 이방원(태종)이 연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의 권력 변동은 두 왕후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1398년에 즉위한 정종은 생모 절비를 신의왕후로 추존하였고, 신의왕후를 봉안한 사당의 이름을 인소전(仁昭殿)으로 정했다. 그리고 태종은 1404년(태종 4) 제릉에 비문을 건립하여 생모의 위상을 제고하였다. 물론 비문의 찬자인 권근은 신의왕후의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지만, 그보다 왕후가 낳은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때의 비(碑)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비는 영조대와 고종대에 조성된 2기가 세워져 있다.

태종은 제릉의 규모도 점차적으로 확장시켰다. 제릉은 해풍군(海豊郡, 현재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치속촌(治粟村)의 언덕에 조영되었다. 1407년(태종 7) 허조(許稠)의 상소에 따라 ‘일반민과 다름없는’ 제릉을 개수하기로 하고, 박자청(朴子靑)에게 역사를 맡겼다. 이듬해 1408년(태종 8) 제릉에 난간석을 두르고 석인 등을 배치하는 공사를 마무리했고, 여느 왕과 왕비보다 훌륭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1408년(태종 8)에 태상왕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두 왕후에 대한 위상을 극명하게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인소전에 태조와 신의왕후를 함께 모시면서 그 이름을 문소전(文昭殿)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신의왕후의 시호를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높였다. 그에 비해 신덕왕후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계모(繼母)’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은혜를 입은 것이 전혀 없었음을 역설하였다. 도성 내에 있던 정릉(貞陵)도 도성 밖 사을한산(沙乙閑山,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자리)으로 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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