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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부[沈德符]

고려 말의 무장, 조선 건국을 맞다

1328년(충숙왕 15) ~ 1401년(태종 1)

심덕부 대표 이미지

청송 찬경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심덕부(沈德符)는 1328년(충숙왕 15) 청송 심씨(靑松沈氏)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득지(得之), 호는 허당(虛堂), 노당(蘆堂), 허강(虛江)이다. 아버지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심용(沈龍)으로, 심덕부는 음서로 입사(入仕)하였다. 이후 예의판서(禮儀判書), 서해도원수, 판밀직사사 등을 역임했으며, 왜구 토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1388년(우왕 14)에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389년(공양왕 1)에는 공양왕 옹립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1390년(공양왕 2) 심덕부가 이성계를 죽이려 한다는 데에 연루되어 유배되지만, 이듬해 풀려나 정계 복귀하였다. 조선 건국 후 그는 한양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역은 경기도 연천에 있으며, 시호는 정안(定安)이다.

2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다

심덕부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후 승진하여 공민왕 말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고, 우왕대에는 밀직부사로서 동강원수(東江元帥),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을 거쳤으며, 이후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 찬성사 등을 역임하면서 원수(元帥)의 직을 겸하였다.

그는 무장으로서 왜구 방어에 공헌하였다. 1350년(충정왕 2)부터 본격화된 왜구 침략은 우왕대에 제일 극심하였고, 고려는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筒都監)에서 화약·화포 등을 제작하며 맞섰다. 화약무기는 1380년(우왕 6)에 진포대첩(鎭浦大捷)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그해 왜구는 지금의 군산 지역인 진포를 거점으로 고려의 내륙을 침략하였는데, 도원수(都元帥) 심덕부,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 부원수(副元帥) 최무선(崔茂宣) 등이 맞서 적선을 불사르고 포로들을 되찾았다. 이때 왜구는 내륙으로 퇴각했고, 운봉(雲峰, 지금의 남원 지역) 전투에서 이성계의 군사들에 의해 섬멸되었다.

하지만 왜구의 침략은 그치지 않았고, 곤양(昆陽, 지금의 사천 지역), 관음포(觀音浦, 경상도 남해에 있는 포구) 등에서 전투가 이어졌다. 심덕부는 1385년(우왕 11)에는 찬성사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의 직을 맡아 동북면에 침략한 왜구를 북청(北靑), 함주(咸州) 일대에서 토벌하였다. 그러나 단주(端州)에 침략한 왜구와의 전투에서는 패하였다. 또한 동북면의 홍원(洪原)에서 왜구에 맞서 싸웠지만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으며, 결국 이성계의 군대가 왜적을 유인하여 무찔렀다.

3 위화도회군에 가담하다

1388년(우왕 14) 2월, 명은 기존에 원에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고 그곳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였다. 고려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결정하였는데, 이성계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벌이 추진되었다. 우왕은 최영(崔瑩)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고 5만여 명의 군사를 구성하였다. 다만 이때 최영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평양에 머물렀다.

출정했던 군대는 위화도에 주둔한 채 회군을 청했으나, 결국 왕명을 받지 못하고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이성계는 최영을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 심덕부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 속해 있었다. 심덕부가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나타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2년 뒤 회군공신 책봉 교지에 심덕부 등의 휘하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어 그가 회군에 적극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에 다시 책봉이 행해진 회군공신 맨 앞에 심덕부가 있었다.

4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자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하였다. 즉위 과정을 보면, 회군할 때 이성계와 조민수는 왕씨의 후손을 세우기로 의논했음에도 조민수가 이색(李穡)의 동의를 얻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고 했다. 이후 전제(田制) 개혁을 두고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영의 조카 김저(金佇)가 우왕의 복위를 꾀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변안열(邊安烈),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등이 유배되는데, 이들이 전제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김저 사건의 진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 세력은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설을 명분으로 ‘가짜’ 창왕을 폐위하고 ‘진짜’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옹립에 참여한 사람은 이성계와 심덕부를 비롯하여 지용기(池湧奇), 설장수(偰長壽), 박위(朴葳),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성석린(成石璘)이다. 이상의 9명은 공양왕을 즉위시킨 공로로 공신(功臣)에 책봉되었다.

5 왕조 교체를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다

공양왕대는 왕조 교체를 이루기까지의 정치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와 관련한 각종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이다. 일례로 1390년(공양왕 2)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가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이고, 이성계가 명을 공격하려 하며,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처벌될 것’이라는 내용을 명 황제에게 알렸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 반대세력이 주로 처벌되었는데, 김진양(金震陽)은 사건 자체의 조작설을 언급했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한편, 윤이·이초 사건의 여파는 심덕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윤이·이초 사건 때 도망쳤던 김종연(金宗衍)이 심덕부와 지용기(池湧奇)가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이성계가 심덕부를 국문하지 말도록 청하였지만 심덕부는 순군(巡軍)에 스스로 찾아가 갇히기를 청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심덕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결국 탄핵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391년(공양왕 3) 심덕부는 풀러나 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심덕부의 유배기간이 얼마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훗날 그의 졸기(卒記)에 ‘근거 없는 말[卑語]’이었다고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심덕부의 이성계 제거 모의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때 심덕부에 대한 탄핵은 공양왕을 옹립했던 구공신(九功臣) 내에서 왕조 교체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당시 심덕부와 같이 논란이 되었던 지용기는 결국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성계 세력의 왕조 교체를 끝까지 저지하려 했던 정몽주 역시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반면 심덕부는 왕조 교체를 원했던 이성계의 뜻을 수용했던 듯하다.

6 조선 건국 후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런데 심덕부는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는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 결과 추대에 참여했던 배극렴(裵克廉), 조준 등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던 한편, 심덕부는 『권중화개국원종공신녹권(權仲和開國原從功臣錄券)」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393년(태조 2)에 다시 책봉이 이루어진 회군공신에는 제일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얼마 후 아들 심종(沈淙)이 경선공주(慶善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조와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다.

태조대 심덕부의 활동은 도성 건설 부문에서 두드러졌다. 1394년(태조 3)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判事)로 임명되었다. 권중화·정도전·남은·김주(金湊)이직(李稷) 등과 함께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였고, 김주와 더불어 한양에 머무르며 건설 과정을 관리·감독하였다. 정종 즉위 이후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 좌정승 등을 역임하였으나 1400년(정종 2)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1401년(태종 1)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408년(태조 8)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이 충녕군의 장인이 되었다. 연이은 왕실과의 혼인으로 가문이 번성했지만, 시련도 컸다. 태종 말년 심종은 유배된 이방간(李芳幹)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다가 유배지에서 병사했고, 세종 즉위 후 심온은 국구(國舅)가 된 영광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강상인(姜尙仁)의 옥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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