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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온[沈溫]

세종의 장인,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

1375년(우왕 1) ~ 1418년(세종 즉위)

심온 대표 이미지

심온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심온(沈溫)의 자는 중옥(仲玉)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그의 아버지는 심덕부(沈德符)이고, 어머니는 인천문씨 문필대(門必大)의 딸이다. 심온은 순흥(順興) 안씨 안천보(安天保)의 딸과 혼인하여 3남 6녀를 낳았다. 그 중 장녀가 소헌왕후(昭憲王后)로, 세종의 비이다. 하지만 심온은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로서의 위상을 누리지도 못한 채 강상인(姜尙仁)의 옥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2 가문과 출사

청송심씨 가문은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 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심덕부는 고려 말에 이성계와 더불어 많은 전공을 세웠고, 위화도회군에도 동참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궁궐, 종묘, 사직 등의 한양 건설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한 가문 배경으로 왕실과도 연이어 혼인을 맺었다. 처음 왕실과 혼인한 사례는 1393년(태조 2)에 심덕부가 여섯 번째 아들 심종(沈淙)을 태조의 둘째딸 경선공주(慶善公主)에게 장가보냈던 일이다. 이후 심종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기도 했다. 하지만 1416년(태종 16)에는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치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던 이방간(李芳幹)과 사사로이 연락하고 선물을 받았다는 사유로 유배되었다. 이때 심온도 아우 심정(沈泟)과 함께 사헌부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한편, 심온의 큰아들 심준(沈濬)은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휼(閔無恤)의 딸과 혼인하여 왕실의 외척과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온은 1386년(우왕 12)에 맹사성(孟思誠), 길재(吉再) 등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당시 12세였기 때문에 고려 말에는 특별한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별도로 문과에 합격한 기록은 없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대에는 병조의랑, 공조의랑을 역임하였고, 정종대에는 대호군 직을 맡았다.

태종 즉위 후에도 관직 생활을 이어갔고, 1407년(태종 7)에는 승정원 대언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1408년(태종 8)에 자신의 딸을 충녕군(忠寧君)에게 시집보냈고, 이후 승진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였다.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거쳐 1413년(태종 13)에는 대사헌(大司憲)까지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총제(摠制)와 같은 군사 직임도 맡았다.

대체로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한 편이지만, 종종 위기도 있었다. 1415년(태종 15)에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의 판사를 맡았다가 업무 처리와 관련하여 파면되는 일도 있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일로 하옥되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궁을 몰래 나가 구종수(具宗秀)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논란이 되었는데, 구종수와 친밀한 사이였던 심온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뢰지 않았음이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잠깐씩 논란이 되었고, 심온은 건재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위 충녕대군의 즉위와 더불어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 되었다.

3 세종의 장인이 되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우는 조치는 매우 신속하게 행해졌다. 의용위(義勇衛)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설치했는데, 의용위의 경우는 세자에게 군사 지휘를 분담하여 영을 내릴 수 있게 한 기구였고, 세자익위사의 경우는 공신이나 재상의 아들들을 속하게 함으로써 세자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상왕은 양위(讓位)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였고, 1418년(세종 즉위년) 8월에 세종이 즉위하였다. 곧이어 명에 태종의 양위를 알리는 일과 관련하여 사신들이 파견되었는데, 국구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었다. 그가 명으로 출발한 시기는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심온이 명 사행을 떠날 때의 모습은 국구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상왕 태종, 세종, 소헌왕후가 각기 환관을 보내 심온을 전송하였고, 전송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실록에는 심온이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도 되지 않아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였다.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도성이 거의 비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심온이 조선에서 국구로 살았던 시기는 이 사행에서 돌아오는 그날까지 약 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4 강상인의 옥에 휘말리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상왕 태종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일단 태종은 군사와 관련한 중요한 일들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세종 즉위 초기에는 병권 외에도 외교, 인사 등 여러 부문에서 정치적 결정을 하였다. 심온을 사은사로 정하고, 그가 명으로 출발한 직후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로 임명한 장본인 역시 태종이었다.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한 때는 심온이 명으로 출발하기 약 10일 전이다. 향후 상왕으로서 병권을 행사하겠다는 태종의 명에도 불구하고, 병조참판 강상인 등이 군사 관련 업무를 세종에게 보고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태종은 강상인이 세종에게 그 아우 강상례(姜尙禮)의 관직을 요구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조선 건국 이후 왕위계승은 제1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등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태조와 정종이 양위를 했고, 그들은 왕위를 계승한 뒤에도 태상왕(太上王), 상왕(上王)이 되어 후계 왕의 정치운영을 지켜보았다. 태종 역시 양녕대군의 실행(失行)으로 인해 폐세자 조치가 전격적으로 행해진 이후 곧바로 세종에게 양위를 했다. 연이어 태상왕, 상왕의 존재가 있던 상황에서 상왕이 병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관료들에게 있어서 무척 생소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태종의 거침없는 성향을 알고 있었음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자신의 병권 장악을 수용하지 않은 병조의 관리들을 문책하였다.

강상인 외에도 병조의 관료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병조 판서 박습(朴習), 참의(參議) 이각(李慤), 그리고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까지 국문을 받았다. 이 사건의 후속 처리 과정에도 상왕이 깊숙이 개입하였다. 국문이 이어지다가 며칠 후에 박습, 강상인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라는 이유로 면죄하였고, 강상인은 고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병조에서는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상왕에게 먼저 아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대간에서는 박습, 강상인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강상인을 관노로 붙이는 선에서 옥사는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약 두 달 후에 태종은 강상인의 일을 언급하며 관련자들을 다시 불러들이도록 했고, 이후 혹독한 국문이 재개되었다. 새로운 관련자들이 늘어났고, 거기에는 심온의 동생인 심정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모자로 심온이 지목되었다. 박습의 자백에 따르면, 심온, 강상인 등이 병권을 두 곳에 나눌 수 없음을 논의했고, 이 때문에 병조에서 군사와 관련된 일을 세종에게 아뢰었다고 하였다.

모든 논란은 심온에게 향했다. 그가 귀국하기 전에 강상인 등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심온의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들까지도 처벌되었다. 1418년 말에 귀국한 심온은 곧바로 국문을 당했고, 하루 만에 자진할 것을 명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국구가 된 지 석 달만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후 세종대 초기의 국정 운영은 상왕 태종과 국왕 세종이 함께 참여하는, 이른바 ‘양상통치(兩上統治)’ 체제가 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약 4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한 가운데 점차 권력은 세종에게 안정적으로 이양되었다. 하지만 세종 초기의 심온 제거는 매우 폭압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연구자들은 심온 제거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밝혀왔다. 심온의 권력 확대를 사전에 포착한 태종이 강상인의 옥을 통해 심온을 제거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태종의 외척에 대한 경계가 심온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의견도 있다.

태종 사후 세종은 심온의 집안을 다시 보호하려 하였다. 1424년(세종 6) 소헌왕후는 외할아버지 안천보의 집에 거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426년(세종 8)에 세종은 소헌왕후의 어머니 안씨와 그 자녀들을 천안(賤案)에서 빼주었다. 문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심온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자손들의 벼슬길도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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