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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安堅]

〈몽유도원도〉를 그리다

미상

안견 대표 이미지

몽유도원도(복제품)

국립중앙박물관

1 개관

안견은 조선 초기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안견이 남긴 작품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가 있는데, 그가 그렸다고 확실하게 평가받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적벽도(赤壁圖)〉,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어촌석조도(漁村夕照圖)〉, 〈연사모종도(煙寺暮鍾圖)〉 등 몇 점의 작품은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등을 비롯한 작품들은 실물 없이 관련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2 출생과 화공으로서의 삶

안견의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이고, 호는 현동자(玄洞子), 주경(朱耕)이다. 출생과 사망년도는 불분명하다. 출생은 1400년 무렵, 사망은 1460∼1470년 즈음으로 추정되지만,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본관은 지곡(池谷)인데, 가문이나 신분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당시 그림 그리는 것을 천한 재주로 평가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화공(畵工) 안견의 신분은 낮았으리라 여겨진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일정한 품계까지 한정하여 관리를 임용하는, 즉 한품서용(限品敍用)이 적용된 것을 보더라도 짐작 가능하다. 그는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관직이 무반 4품까지 올라갔지만, 그 이상은 불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 화공들의 승진이 논의될 때 종종 제약이 되었다. 안견과 같이 훌륭한 화원도 4품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이 선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안소희(安紹禧)가 1479년(성종 10)에 아버지가 화공이라는 이유로 사헌부 감찰(監察)에 제수되지 못했던 것도 안견의 신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안소희가 청요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안견의 아들로서 화업을 계승하지 않고 문과 급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안견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세종대였다. 세종은 안견을 아꼈고, 세종의 셋째 아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안견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였다. 안평대군은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서화 수집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동진(東晋)의 고개지(顧愷之), 당(唐)의 오도자(吳道子), 송(宋)의 곽충서(郭忠恕), 원(元)의 조맹부(趙孟頫)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작품 2백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의 회화를 시대별로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것은 조선인 화공 안견의 작품이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안평대군이 소장한 서화 목록을 서술해 두었고, 그중 안견의 작품으로는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등 수십 편이 있다.

당대 최고의 서화 수집가인 안평대군과의 교유는 그가 그림을 많이 남기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신숙주의 언급에 따르면, 안견은 안평대군을 통해서 수많은 옛 회화들을 볼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그림들의 장점만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서술도 덧붙였다.

3 조선 전기 최고의 걸작,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그림과 더불어 안평대군의 글씨로 써진 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이 있고, 박팽년(朴彭年), 신숙주, 최항(崔恒), 서거정,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연(河演) 등 21인의 발기(跋記)가 붙어있다. 그리하여 세로는 38.7㎝이지만, 가로가 106.5㎝에 달한다.

〈몽유도원도〉발문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안평대군이 1447년(세종 29) 4월 20일에 꾼 꿈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어느 숲의 층층의 산봉우리, 깊은 골짜기를 거닐다가 산 속 노인이 일러준 대로 가보니 신선이 사는 것 같은 마을에 복사꽃이 만발하게 피어있었다. 때마침 마을에 도착해 있었던 신숙주, 최항과 어울려 도원의 정취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꿈에서 깬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준 후 그림을 그리게 했고, 안견은 3일 만에 작품을 완성해냈다.

〈몽유도원도〉는 꿈을 화폭에 옮겼기 때문에 왼편으로부터 오른편으로 감상해야 한다. 그림은 안평대군의 꿈길을 따라 걷듯이 묘사되어 있는데, 왼편 계곡의 초입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중앙에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골짜기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복사꽃이 흐드러진 산 속 마을 광경이 있다. 이와 같은 안견의 산수화는 안평대군과 당대 최고 문사들의 문장, 글씨와 어우러져 하나의 종합 예술이 되었다. 즉,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 최고의 시, 글씨, 그림이 집약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안견이 안평대군의 명으로 그린 그림은 여러 작품이 있었던 듯하다. 안평대군은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시문을 나누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하루는 성삼문, 임원준(任元濬)과 함께 강에서 술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문종]이 시를 쓴 쟁반에 귤을 담아 보내주었다. 세종도 조부인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탄 여덟 마리의 말을 그리도록 하여 안견이 〈팔준도(八駿圖)〉를 제작하였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찬문(贊文)을 짓도록 하였다.

4 안견에 대한 평가

안견이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어떻게 화원이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남아있는 기록은 그의 회화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이다.

우선 신숙주는 안견의 산수화를 필적한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하였고, 성현(成俔) 역시 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표자로 안견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김종직(金宗直)은 시문을 통해 안견의 산수화가 그려진 족자에서 연무(煙霧)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감흥을 느끼며 고려 이령(李寧) 이후 최고 경지에 이른 화원이라고 평했다.

16세기 이후에도 안견의 그림을 보고 시문으로 감회를 나타내는 문인들이 있었다. 조식 (曹植)은 안견의 화법이 신묘하니 동국(東國)의 오도자(吳道子)라고 칭할 만한다고 평하였다. 허목(許穆)은 안견의 산수도첩(山水圖貼)을 수십 년 만에 다시 보며 처연한 감정을 느꼈다는 표현을 하였다. 선조대의 문장가였던 최립(崔岦)도 안견의 그림들을 감상할 기회가 꽤 있었던 듯하다. 백여 년 뒤 지난 안견의 그림은 색이 바라고 종이도 찢겨 나가 너덜너덜 해졌지만, 그의 오묘한 그림 속에 나오는 나무 하나, 바위 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그림과는 색다르다고 평가하였다.

5 안견 화풍의 영향

조선 초기 회화는 중국의 여러 화풍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이곽파(李郭派) 화풍이다. 이곽파는 북송대 이성(李成), 곽희(郭熙)가 완성한 산수화 양식으로서 중국과 조선 화단에 영향을 끼쳤다. 안견은 이곽파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안평대군이 수집한 회화의 특징들을 종합하여 나름 독창적인 산수화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런 만큼 조선 중기까지 안견의 화풍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람들이 많다. 양팽손(梁彭孫), 석경(石敬), 신사임당(申師任堂), 이정근(李正根), 김시(金禔), 이흥효(李興孝), 이징(李澄)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많은 화원들이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1570년(선조 3)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도 안견 화풍을 따르고 있다.

지금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들이 만든 화풍을 ‘안견파(安堅派) 화풍’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화단에서 안견의 영향이 컸음을 의미한다.

한편,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화승(畵僧) 슈우분[周文]의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도 안견의 화풍과 닮아있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는 조선의 대장경(大藏經)을 구하고자 종종 사절을 보냈는데, 슈우분은 1423년(세종 5)에 온 사절단에 속해 있었다. 이후 슈우분의 그림은 무로마치 막부의 화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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