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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安鼎福]

실학자, 민족사학의 길을 열다

1712년(숙종 38) ~ 1791년(정조 15)

1 격동의 시대, 전통의 수호자

안정복(安鼎福)의 호는 순암(順庵), 자는 백순(百順)이다. 그는 독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으며,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 등 당대 유명한 실학자들의 가르침을 더해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으로부터 내려오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학문은 당대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조선](正祖)를 가르치는 자리까지 올랐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안정복의 저술한 역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성호 이익의 문인들을 이끌었던 그는 서학에 물드는 동문들을 염려하여 서학(西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역동하는 시대 사회의 변화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려 하였던 학자이다.

2 쇠락한 남인 가문의 병약한 아이

안정복의 본관은 광주(廣州)로 조선 후기에는 남인(南人)에 속하였던 가문이다. 광주 안씨의 시조 안방걸(安邦傑)이 고려 시대에 광주에 봉군(封君)되어 본관을 광주로 하였다고 한다. 광주 안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뛰어난 인물을 여럿 배출하였다. 조선 초에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던 안성(安省)은 청백리에 뽑히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지기도 했다. 1510년(중종 5) 부원수로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안윤덕(安潤德)도 안정복의 선조이다. 안윤덕의 증손 안황(安滉)은 선조[조선](宣祖)의 매부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그는 외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모와 처자를 버리고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서울로 돌아오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그 공을 기려 공신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들 안응원(安應元)을 6품으로 올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안정복의 가문은 점차 영락하였다. 안황의 손자이자 안정복의 고조부인 안시성(安時聖)은 단지 현감을 지냈을 뿐이며, 증조부 안신행(安信行) 또한 빙고(氷庫)의 별검(別檢)이라는 말직에 머물렀다. 조부 안서우(安瑞羽)는 1694년(숙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지만, 남인(南人)이 실권을 잃고 난 후 말년에는 태안군수, 울산부사 등의 지방관을 주로 맡았을 뿐이었다. 또한 안정복의 부친 안극(安極)은 병약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처사로 지냈으니, 안정복의 가문은 숙종 대를 지나면서 남인이 정치적으로 힘을 잃게 됨에 따라 함께 쇠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정복의 모친 전주 이씨는 이익령(李益齡)의 딸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 된다.

안정복은 1712년(숙종 38) 12월 25일 충청도 제천현에 있는 친척 집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부모는 조부 안서우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해 3월 모친 이씨가 붉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침상 주위를 감싸는 태몽을 꾸고는 안정복을 잉태하였다. 그가 서울이 아니라 제천에서 태어난 이유는 10월에 안서우가 가속을 거느리고 제천 친척의 집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12월 25일 새벽에 모친이 붉은 반점이 있는 표범을 가슴에 안는 꿈을 꾸고는 놀라 깨어났는데, 이날 저녁 안정복이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안정복은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는 4살이 되었던 1715년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외가에서 살다가 2년 뒤인 1717년 다시 외할머니를 따라 전라도 영광에 있는 외가 농장으로 옮겨갔다. 1720년(숙종 46)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조부 안서우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이 어린 안정복을 이끌고 서울, 광양,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옮겨 다닌 이유는 아무래도 그의 건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울 외가에 있던 1716년 마마를 앓았다고 하는데, 비록 공해가 거의 없었던 때라고는 해도 사람이 많은 서울보다 한산한 광양의 농장이 병치레를 하는 아이에게 좋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광양에 내려가 있을 때인 1719년에는 다시 홍역을 앓게 되었는데, 1720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을 봐서는 큰 탈 없이 회복된 모양이다.

안정복은 어렸을 때 마마와 홍역을 연이어 앓고 자주 거처를 옮겼던 탓에, 다른 대학자들처럼 어려서부터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는 10살이 되어서야 학문을 배울 여유를 갖게 되어, 비로소 『소학(小學)』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록 사정이 있어 학문에 힘쓰지는 못하였어도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어릴 때부터 영특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안정복이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매일 천 마디의 말을 기억하는가 하면, 한 번 스쳐 읽은 것이라도 그 즉시 암송하였다고 한다. 13세이 되자 이미 책에서 1년의 일수를 계산한 글을 보고서는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다음해의 달력을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조부 안서우가 지방의 수령을 맡게 되면서 안정복의 떠돌이 아닌 떠돌이 생활은 계속되었다. 1725년(영조 1) 조부를 따라 울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조부가 울산부사에서 물러나 전라도 무주로 거처를 옮겼으므로 안정복의 거주지는 1년 사이에 다시 바뀌었다. 그는 조부 안서우가 별세하여 장례를 치르는 1735년까지 약 10년 동안 이 곳 무주에 정착하여 살게 된다. 처음으로 안정된 거처에서 생활하게 된 안정복은 1729년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으며, 1732년 21살 때 아들 안경증(安景曾)을 얻었다.

안서우가 별세하자 부친 안극은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덕곡(현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에 있는 선영으로 옮겨왔다. 근기 지역은 당시 새로운 경향을 선도하는 학문의 중심지였으나, 이곳에 와서도 그는 따로 스승을 모시며 가르침을 얻지는 않았다. 『성리대전(性理大全)』, 『심경(心經)』 등을 읽으며 나름의 견해를 정리하여 도설을 만들기도 하였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글로 엮기 시작하여 『하학지남(下學指南)』, 등을 집필하였다. 결국 그의 전반적인 견해는 독학으로 완성된 셈이다.

3 유형원과 이익과의 만남

독학으로 스스로의 견해를 확립한 안정복이지만, 그에게도 스승의 가르침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접한 것이 바로 유형원의 유작이다.

안정복은 이미 무주에서 거주할 무렵부터 유형원의 학문에 대해 익히 들어왔으나, 그 상세한 내용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유형원이 은거한 곳이 전라도 부안이므로 비록 가깝다고는 할 수 없으나 무주와 같은 호남에 속하기 때문에 유형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차에 1744년(영조 20) 서울에서 유형원의 증손 유발(柳發)을 만나 비로소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얻어 읽게 된 것이다. 안정복은 『반계수록』을 읽고 ‘천리(天理)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어주는 책’이라며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유형원의 사상에 흠뻑 빠져 『반계수록』 외의 다른 유형원의 유작들을 섭렵하였다.

유형원의 저작을 만나 그 후손으로부터 상세한 설명까지 들었으나 안정복은 아직 가르침에 목말라 있었다. 이미 유형원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직접 얼굴을 맞대고 들려주는 가르침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학문이 어떠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도 매우 궁금했던 차였다. 당대 학문의 중심지 근기 지방에 살고 있던 안정복이었기에 배움의 기회는 당연히 찾아왔다. 그는 무주에서 광주로 이사한 지 10년째 되는 1746년 경기도 안산에 은거하며 명성을 얻고 있던 성호 이익을 찾아갔다.

안정복의 나이 35세, 누군가의 가르침을 청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이익과 만난 첫 날 그들은 늦은 밤까지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안정복의 술회에 의하면, 이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스승 이익과 직접 대면한 것은 겨우 나흘에 불과했다. 그러나 단지 나흘일 지라도 가르침에 목말랐던 안정복에게는 매우 중요한 기회였으며, 계속되는 스승의 편지는 그에게 학문의 방향을 일깨워주었다.

이익과의 만남 이후 안정복은 자신의 학문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추구해 온 학문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학자 이익이 증명해 준 것이다. 또한 이익은 자기 문하의 여러 학자들을 안정복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안정복은 그들과 교유하면서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천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4 역사서의 새로운 지평, 『동사강목』

안정복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정통으로 삼았다. 스승 이익은 이황의 언행록, 『이자수어(李子粹語)』의 편차를 안정복에게 맡기기도 했다. 또한 젊었을 때부터 『하학지남』을 저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정복의 학문적 경향은 올바른 예(禮)의 실천에 주안점이 있었다. 그는 스승 이익과의 첫 대면 현장에서도 예의범절에 신경써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다.

또한 안정복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흐름에서 의리(義理)의 소재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사서의 편찬에 몰두하였다. 일찍이 유형원의 초고 『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접한 후 역사서 편찬의 뜻을 굳혔던 그는 스승 이익의 독려를 받아가며 1760년(영조 36) 『동사강목』을 완성하였다.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장구한 역사를 성리학적 역사 서술 방식인 강목체로 완성하면서 그는 조선 역사 서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전에도 우리 역사를 강목체로 서술한 역사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정복은 이러한 사서들도 모두 검토하고 주변 학자들의 조언 또한 받아들여 역사서의 지평을 새롭게 연 것이다.

5 학문 군주 정조의 스승

안정복은 부친의 안극의 상을 당하며 벼슬을 그만둔 후, 광주 덕곡에서 지내며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1762년에는 스승의 부탁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주요 내용을 가려 뽑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차하기도 하였다. 연구에 몰두한 안정복의 학문 수준은 점차 높아만 갔다. 결국 학문을 인정받은 안정복은 1772년(영조 48) 익위사의 일원이 되어 수년간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763년(영조 39) 스승 이익이 세상을 떠난 후 수차례 조정에서 내려준 벼슬을 마다하였으나, 중요한 보임을 거절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세손은 학문 군주로 유명하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정조였으니, 안정복은 정조의 학문 뿐 아니라 재위 중 정책에까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안정복으로 하여금 『동사강목』을 올리라고 하였던 사실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이 책에 관심을 보였으나 안정복이 초고에 불과하다며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왕명으로 올리라 한 것이다. 또한 정조는 『반계수록』을 읽고 유형원의 견해를 극찬하기도 하였는데, 물론 『반계수록』이 영조 대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이라 할지라도 안정복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6 사학(邪學) 비판, 정통 수호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안정복은 목천현감에 제수되어 자신의 학문을 동궁의 교육이 아니라 백성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평소 실천을 중요시해 온 안정복이기에 한 지역을 다스리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재임 기간 동안 선정을 베푼 그에 대한 칭송이 고을에 자자하였다. 그러나 1777년(정조 1) 아들 안경증이 사망한 후 이미 66세에 이른 안정복은 벼슬길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결국 1779년 그는 사직한 후 광주로 돌아갔다.

스승 이익이 타계한 후 성호학파는 안정복과 윤동규(尹東奎), 이병휴(李秉休) 등이 지탱하여 왔다. 그러던 중 1773년 윤동규, 1776년 이병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안정복은 성호의 문인들을 이끌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성호학파의 젊은 문인들은 점차 서학에 경도되는 이상기류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말년 안정복의 우환이 되었다. 성호 이익 또한 일찍이 서학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서학에 섞여 들어온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이단이라며 배척한 바 있다. 헌데 성호학파의 젊은 기대주들이었던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등이 서학에 대한 관심을 넘어 천주교 교리에 감화되기 시작하였으니, 성리학을 정통 학문으로 굳게 믿고 있는 유학자 안정복은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주교 신앙의 문제는 성호학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전 조선 사회에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극력 비판하였다.

지금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안정복의 행위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한 고루한 행위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믿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과 그 실천을 삶의 의미로 삼고 있던 안정복에게 천주교의 교리는 정통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정통의 수호자, 안정복의 면모는 학문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승 이익이 학문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니 꼭 선배들의 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하자,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나이 젊은 후배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지와 사려도 확고히 하지 못했으면서, 약간의 소견이 있다 해서 바로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며 ‘옛 사람들도 몰랐던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습성이 점차 자라난다면 이는 경박한 기상만 더해 줄 뿐, 덕을 쌓아가는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30대 중반까지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에 몰두했던 안정복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학문의 발전은 오히려 선현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며, 격동의 시대에도 정통으로 추앙되는 가치들은 기필코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격동의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정통을 수호하려고 하였던 안정복의 삶의 지표가 잘 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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