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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安平大君]

몽유도원도에 담긴 조선 왕자의 꿈

1418년(세종 1) ~ 1453년(단종 1)

안평대군 대표 이미지

몽유도원도(복제품)

국립중앙박물관

1 세종의 세 아들 –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세종의 아들들 중 가장 출중한 셋을 꼽으라고 한다면 별로 주저하지 않고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일찍이 장남(훗날 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대리청정을 맡기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도 국정을 보필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각별히 아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또 세종의 특별 지도를 받으며 박학다식하고 시서화악(詩書畵樂)을 두루 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였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이 즉위한 지 한 달 여 만인 1418년(세종 즉위년) 9월 태어났다. 위로는 큰형 문종과 한 살 위의 형인 수양대군이 있었다. 1421년(세종 3) 네 살 때 요절한 숙부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갔고, 1428년(세종 10) 열한 살에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이듬해인 열두 살에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의 장인 정연은 세종조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세종의 측근 총신이었다. 이처럼 안평대군은 안팎으로 든든한 배경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왕실의 주요 일원이었다.

2 안평대군, 예능과 재력으로 일세를 풍미하다

세종시대는 조선 500여 년 역사의 첫 번째 태평성대라고 할만하다. 부왕 태종이 다져놓은 조선의 기틀 위에 수성을 맡은 성군 세종이 선도하여 정치, 사회, 문화 발전을 이루어나간 시기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안평대군이 왕실의 일원으로서 물려받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의 예술혼과 감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안평대군은 시서화 삼절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택인 인왕산 기슭의 비해당(匪懈堂)과 별장인 담담정(淡淡亭), 꿈속에 본 도원과 비슷한 곳을 찾아 지은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시제(詩題)로 하여 집현전 문인들과 수창하며 비해당사십팔영, 담담정십이영, 무계수창시와 같은 연작시를 비롯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 작품은 거의 소실되었고 몇 편만이 다른 사람의 문집에 흩어져서 전해질 뿐이다. 안평대군의 시에 대해서는 ‘깊이 체득하여 독실히 좋아했으므로 그 시법의 오묘함이 월등하였다.’고 박팽년이 극찬한 바 있다.

안평대군은 시도 뛰어났지만 글씨는 더욱 일품이었다.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인 송설체를 따르면서도 그를 능가하여 ‘안평체’라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정조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국조의 명필 중에서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나서 이 글자가 매우 좋아 활자로 주조하고 싶다는 뜻을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앞서 문종이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사하여 ‘경오자(안평대군자)’를 주조하였지만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처형된 후 바로 녹여졌다.

안평대군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그의 그림을 보았다는 당시의 기록들이 있다.

안평대군은 본인이 직접 예술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귀한 작품들을 널리 수집하였다. 1445년(세종 27) 10여 년간 모은 자신의 서화 소장품을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이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화기(畵記)」가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실물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안평대군이 갖고 있던 최고 걸작들의 목록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값지고 방대한 소장품들은 당대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신숙주의 「화기」에는, “안견(安堅)이 고화를 많이 열람하여 그 요령을 다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안평대군이 조선초 문화예술계의 중심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였던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안평대군에 대한 인물평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다소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면모도 그려져 있으나 안평대군이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은 더욱 뛰어났으며 서법은 천하제일이고 또 그림과 음악도 잘했다는 평가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단종실록』에 나오는 안평대군 평가는 다소 악의적이다. “(안평대군) 이용은 시문과 서화를 좋아하고 소예에 능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 조 때부터 권세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간사한 소인이 이에 아부했는데 이현로(李賢老)가 으뜸이었다.” 계유정난으로 처형된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매도해야 했던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하다.

최항(崔恒)은 명나라 사신 예겸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찬양하여 지은 시에 조선 문인들이 화답한 비해당 시축(詩軸) 서문에서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존경할 만큼 지극한 부귀를 지녔음에도 담박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선함으로 즐기며 인에 의해 예를 즐기는 자’라고 하여 안평대군의 인품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3 안평대군의 꿈, 몽유도원도는 말한다

〈몽유도원도〉는 오늘날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시서화 작품이다. 1447년(세종 29)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가깝게 교유하고 있던 당대 최고의 화원 안견에게 그 꿈을 그리게 하였다. 안견은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도원기를 썼다. 도원도와 도원기가 완성된 후 안평대군은 꿈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박팽년을 불러 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에게 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거작으로 완성되었다. 현재 표구된 순서는 신숙주, 이개(李塏),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金守溫), 만우, 최수의 순이다.

유토피아 즉 이상향의 모태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꿈꾸고 노래하고 그렸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도 그 수많은 유토피아 환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너머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안평대군 자신도 도원기에서 마치 예지몽인양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와 무릉도원을 동행한 자는 박팽년, 신숙주, 최항이다. 그들 중 신숙주와 최항은 안평대군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는데 〈몽유도원도〉 찬문에서 가장 상세하게 도원을 묘사하며 은거하고자 하는 안평대군의 선택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은거의 꿈을 접고 정치 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린 단종을 남기고 문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어린 임금을 지키는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급선무이자 중대한 일이었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 등이 단종의 보호세력이 된 상황에서 안평대군은 이들과 연대하였다. 단종의 편에 선 연대세력의 가장 큰 난관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안평대군은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손잡은 김종서, 황보인 일당의 반역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날 밤 김종서와 황보인은 죽임을 당했고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압송되었다가 며칠 후 교동도로 이송되어 사사되었다. 안평대군은 시신이나 무덤도 발견되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고, 안평대군의 자취들 역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의 저택 비해당은 물론 그곳에 수집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서적과 서화 작품들이 남김없이 사라졌고, 그가 직접 쓰고 그렸던 시문서화 작품들 역시 거의 다 사라졌다. 무계정사도 파괴되었다. 문인과 예술가로서의 그를 평가하고 기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4 안평대군을 추억하는 길

안평대군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복권되었다. 숙종 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계유정난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던 것에 힘입었다.

영조는, “안평대군은 다만 글 잘하여 이름이 드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됐을 뿐입니다. 그가 어찌 왕이 되겠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있어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이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관작이 회복됐으니 마땅히 안평대군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라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을 듣고 숙종도 안평대군의 글씨를 사랑하였다고 하며 복권을 허락하였다. 이어 영조는 안평대군에게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희생된 자들을 직접 선정하여 이들의 위패를 영월 단종의 장릉에 모시고 단종과 함께 제사 지내게 했다. 특히 순절한 왕자와 대신, 사육신 등 충신 32인의 관작과 시호를 적은 위패를 ‘충신지위(忠臣之位)’라 명명하고 안평대군을 제일 앞에 모셨다. 또 안평대군의 제단에 바치는 치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안평대군의 복권과 추모는 이렇게 이루어졌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몽유도원도〉가 있어서 안평대군의 꿈과 생각을 느낄 수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유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에서 빌려와 특별전시할 때에만 애태우며 간절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여 어느 시점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뒤 일본의 유력 가문을 전전하며 유랑하다가 현재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밝혀졌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몽유도원도〉는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 1929년 9월호에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현존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일본 정부에 등록된 중요 예술품이었고, 그 논문은 〈몽유도원도〉를 ‘조선 고금을 통틀어 제일의 화가 안견과 서가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 제일의 문사, 충신, 명신, 명인이 모두 등장하는 대작’ 이라고 평가하였다. 안평대군의 작품이 거의 다 사라진 상황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시서화 작품 〈몽유도원도〉의 가치를 우리가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안평대군을 올바로 추억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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