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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梁誠之]

해동의 제갈량

1415년(태종 15) ~ 1482년(성종 13)

양성지 대표 이미지

김포 양성지 묘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출생과 가계

양성지(梁誠之)는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초명은 성장(誠長)이었다.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로 할아버지는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양석융(梁碩隆),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양구주(梁九疇)다. 1415년(태종 15) 양구주와 전주부윤(全州府尹) 권담(權湛)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아버지 양구주의 첫째 부인은 철원부사(鐵原府使) 장원경(張原卿)의 딸로서 1남 1녀를 낳고 죽었고, 양성지의 어머니 권씨는 2남을 낳았으니 첫째가 양성지고 둘째는 양신지(梁信之)다.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일찍 돌아가셔서 경기도 양지(陽智)에 묻혔는데, 전처인 장씨가 이곳에 합장되었다. 양성지의 생모인 권씨는 친정 쪽인 강원도 횡성에 묻혔다.

양성지의 이복누이는 이색(李穡)의 손자인 이전명(李專明)에게 시집갔으며, 양성지의 외할아버지인 권담은 권근(權近)의 7촌 조카다.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는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으며, 그 아들 권람(權擥)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세조의 집권을 도운 핵심 측근이다. 15세기 대표적 문신인 서거정(徐居正)은 권근의 외손자이자 양성지와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한편, 1444년(세종 26) 서거정이 과거를 주관할 때 양성지가 시험에 참여함으로써 좌주-문생의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양성지는 15세기 당대 명신들과 가까운 관계로서 특히 외가 쪽으로 권근 집안과 가까워서 학문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양성지는 외가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외조부 권담의 가계를 정리한 〈몽암권공고사기(夢庵權公故事記)〉를 쓰기도 하였으며, 세조에게 권근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서거정이 양성지를 위해 몇 편의 글을 써준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양성지의 처는 변상근(邊尙覲)의 딸이다. 변상근은 변안열(邊安烈)의 손자로서, 최해산(崔海山)과 함께 화포 제작에 관여한 인물이다. 부인 변씨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양원(梁瑗), 군수(郡守) 양수(梁琇), 동부승지(同副承旨) 양찬(梁瓚), 장흥고(長興庫) 령(長興庫令) 양호(梁琥)이며, 딸은 송질(宋軼)에게 시집갔는데 송질은 중종대 영의정에 올랐다.

2 관직에 진출하다

양성지는 6세에 책을 읽기 시작하고 9세에 글을 지었다고 전한다.

평생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었으며, 한번 들으면 모두 기억하는 총명함을 지녔다고도 전한다. 27세인 1441년(세종 23) 진사·생원 두 시험에 이어 식년 문과까지 을과로 잇달아 급제한 것은 그의 재능이 비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과 급제 후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주부를 역임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듬해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기주관으로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해 『고려사(高麗史)』를 고쳐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 이듬해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에 전임,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제학으로 취임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제술에 참여하는 등 세종대 주요한 관찬 기록물 제술에 참여하였다.

1464년(세조 10) 구현시(求賢試)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했으며, 1469년(예종 1) 지중추부사·홍문관제학·춘추관사를 겸직해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대사헌에 재임하다가 지춘추관사가 되었고, 1481년(성종 11) 홍문관대제학으로 승진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임금이 2품 이하의 당상(堂上) 문신(文臣)을 전정(殿庭)에 모아서 시(詩)와 논(論) 각 1편 씩을 시험하였는데 양성지가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초배(超拜)되었다가 1482년(성종 12) 68세의 나이로 일기를 마쳤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이처럼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명의 임금의 치세에 걸쳐 양성지는 중요한 직임들을 역임하였으며, 세조가 그를 ‘자신(세조)의 제갈량(諸葛亮)’으로 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성종대 양성지가 죽을 무렵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양성지는 널리 알고 기억력이 좋아 글을 잘 지었지만, 실질적인 데는 어둡고 식견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겁이 많고 나약하여 직언을 절대 하지 않았으며, 판서에 재직 중일 때에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판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글을 올려 여러 가지 건의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이러한 것들도 실제적으로는 쓸모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16세기경까지 국왕에게 아첨하며 말은 많으나 쓸모 있는 말은 없었던 인물로 평가되었던 양성지는 정조대 이르러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재조명받게 되었다. 양성지는 국왕의 어제 시문 등을 교감하여 보관하는 장소로서 규장각을 설치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할 때 바로 이러한 그의 주장이 주목된 것이다.

이후 정조의 관심이 더해져 1791년(정조 15) 그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을 규장각에서 인출하게 되었다.

양성지를 주목하게 된 데에는 규장각 설치의 연원을 세조대 그의 상소에서부터 찾으려 했던 것도 있었지만, 초기 규장각 각신 중 상당수가 양성지의 외예를 자처했다는 점도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양성지의 정치사상

양성지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점을 보여주는데, 우선 동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이 아니라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다. 그는 기자도 인정하였으나 그보다는 단군을 더욱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도 배울 것을 역설하여, 『삼국사기』,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 등도 과거에서 시험을 치룰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 의례에 대해서도 매우 독특한 의견으로 나타나는데, 원구단 제천례를 행할 것을 주장했다는 점이라던가 악진해독 및 명산대천 제례 대상을 전면 재조정하자는 주장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예악의 측면에서 우리 나라(속악)와 중국의 악부(樂部 : 아악) 외에 또 번부악(藩部樂)이란 것을 따로 설치해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소중화 사상의 한 발현으로서 그의 천하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삼한이 중국과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하여 만리나 되는 땅을 가진 땅이므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서하나 몽골 등이 국속을 유지하였던 방법 등을 참고하여 고유의 풍속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적극적으로 문물을 배워오게 하자고 하는 등 중국 문화 수용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한편 그 자신이 문신이면서도 군비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우리나라에는 문묘는 있으나 무묘(武廟)가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워 역대의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하는 등 당대 기준에서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양성지가 군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449년(세종 31) 토목(土木)의 변 때문이었다. 토목의 변은 명의 영종(英宗)이 달단(韃靼)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1년 만에서야 풀려났던 사건이다. 그는 1450년(세종 32) 비변 10책을 통해 군정 개혁론을 펼쳤는데, 1) 군사의 숫자를 늘리고 이를 위해 호구법을 재정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2) 부대를 개편하고 이를 지원하는 보법 체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3) 성보를 수축하고 무기를 정비하며 군량미를 축적하는 등에 대한 방법들을 상소하였다.

그는 세종대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참여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연변방수도(沿邊防戌圖)』는 매우 정확하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측량한 지도가 없던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실록을 비롯한 각종 문적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것과 함께 사고(史庫)의 입지 문제를 언급하고, 전국에 산재한 서판(書板)의 현황을 파악하게 하는 등 도서 관리를 체계화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농사의 근본은 지력(地力)을 잘 이용하는 데 있으므로 개간 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水田)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직업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에 여가가 있을 때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건의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일이 이상에 치우친 듯 하지만 전혀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생을 위해 소극적으로는 민폐를 제거하고, 적극적으로는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킬 여러 가지 건의를 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각 도·군·현에 의료 기관의 설치를 주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질병은 백성들의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그나마 서울에는 의원들이 있어 병을 진단하고 약을 주기도 하지만 지방에는 그렇지 못해 촌의 백성들이 한번 질병에 걸리면 그 괴로워함은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방의 크기에 따라 의원의 수를 정해 전의감(典醫監)에 와서 의술을 연구한 뒤 각 지방에 돌아가 병을 돌보게 하고, 감사에게 그 성적을 보고하게 해 상벌을 주면 이처럼 좋은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사회 정책에 대하여도 한층 진보적인 의견을 가졌다. 예컨대,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며, 노비에게만 힘든 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등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비의 폐지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당시 시대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풍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과거 시험에 대하여도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다.

4 평가와 관련 도서

그의 사상은 당대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독특한 것들이 많으며 실제로 실천되지 못할 만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15, 16세기에 그의 주장이나 사상이 실질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한 것이 당연하였다. 또한 인품이나 출사 당시의 행적 등에서 모두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16세기 사림들에 의해 대표적인 훈구 세력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규장각 설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하면서 군주를 황극으로 보는 그의 군주관 등 기타 여러 사상 역시 재조명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조대부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혁들이 일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는 그가 살았던 가까운 시대와 18세기 이후를 비교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저서로는 문집인 『눌재집(訥齋集)』 외에 주의(奏議)에 관한 10전과 어명으로 엮은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동국도경(東國圖經)』·『농잠서(農蠶書)』·『목축서(牧蓄書)』·『유선서(諭善書)』·『황극치평도(黃極治平圖)』·『팔도지도(八道地圖)』·『양계방수도(兩界防戍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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