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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睿宗]

아버지 세조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군의 자질을 갖추다

1450년(세종 32) ~ 1469년(예종 1)

예종 대표 이미지

창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세자에 책봉되다

예종은 1450년(세종 32)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파평윤씨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이다. 자는 명조(明照), 평보(平甫)이고 이름은 이황(李晄)이다. 1455년(세조 1) 열두 살 위의 형인 이장(李暲)이 의경세자에 책봉된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의경세자가 승하하자 세조는 적장손 월산대군을 세손으로 삼는 대신 둘째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1460년(세조 6)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였다. 그때 세자의 나이 11세, 세자빈의 나이 16세였다. 빈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으나 빈은 출산 후유증으로 죽었고 원손인 인성대군도 3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죽고 말았다. 빈의 시호는 장순(章順)이다. 1463년(세조 9)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세자 소훈으로 들였는데 1468년(세조 14) 예종이 왕위를 이은 후 왕비로 삼았으니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안순왕후와의 사이에 모두 2남 2녀를 두었으나 1남 1녀는 일찍 죽었고 현숙공주와 제안대군이 있다.

2 세자 시절 부왕 세조의 지도로 제왕학을 익히다

예종은 세자 시절부터 부왕 세조의 깊은 관심을 받으며 서연에 힘써 국왕이 되기 위한 학문과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부왕 세조에게 “세자는 육예(六藝)에 이미 통하지 않은 바가 없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부왕 세조는 이처럼 덕업을 일찍 성취한 영특한 세자를 위하여 『훈사(訓辭)』를 내려주었다. 『훈사』는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장은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이다.’이다. 다음 2장은 ‘신을 공경하여 섬길 것이다.’ , 3장은 ‘간언을 받아들일 것이다.’ , 4장은 ‘참소를 막을 것이다.’ , 5장은 ‘사람을 쓰는 데는 마땅히 그 마음을 취하고, 재주에서 취하지 말 것이다.’ , 6장은 ‘사치하지 말 것이다.’ , 7장은 ‘환관이 명령을 전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 명령을 전하는 자는 마땅히 바꾸어서 맡겨야 한다.’ , 8장은 ‘형벌을 삼가야 할 것이다.’ , 9장은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힐 것이다.’ , 10장은 ‘부모의 뜻을 좇을 것이다.’이다. 예종은 부왕의 엄격한 교훈을 받들어 『훈사』 10개 조항의 내용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또 예종은 부왕 세조의 뜻을 따라 서연에서 『효경』, 『대학』, 『논어』, 『상서』, 『시경』, 『통감』 순으로 교육을 받았다. 이뿐 만이 아니다. 금기할 음식에 대한 지도에 이르기까지 예종은 부왕 세조로부터 왕이 되기 위해 내적 외적으로 체화해야 할 덕목들을 전수받았다.

1466년(세조 12) 세조가 문묘에 제사를 지낼 때 예종이 아헌관으로 참여하였는데 모두 법도에 맞아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우리 성상의 아들이요, 우리 백성의 복이로다.” 라고 경하하였다고 한다. 세조의 병환이 위중해진 후에는 세자의 지위로 신숙주(申叔舟), 한명회, 구치관(具致寬) 등 원로대신들과 함께 서무를 보기 시작하여 모든 정무를 처리하였다. 이에 세조는 “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 라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3 조선 제8대 왕으로 즉위하여 14개월간 재위하다

예종은 1468년(세조 14) 9월 부왕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제8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재위 14개월 만인 1469년(예종 1) 11월 승하하였다.

준비된 국왕 예종이 이토록 허망하게 일찍 승하한 것은 부왕 세조의 병간호를 하느라 여러 달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아 생긴 후유증 때문으로 보인다. 부왕 세조가 병환으로 누운 후 밤낮으로 왕의 곁을 지키고, 또 처방을 찾느라고 여러 달 동안 밤을 지새우다가 부왕이 돌아가신 후에는 슬픔에 빠져서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이다.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이고,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능호는 창릉(昌陵)인데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다.

세조의 유명에 따라 즉위 초에는 원상제를 운영하였다.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박원형(朴元亨), 최항(崔恒), 홍윤성(洪允成), 김국광(金國光) 등을 원상으로 삼았다. 즉위하던 해에 역모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초 수정 사건이 빌미가 되어 사화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4 ‘남이의 옥사’와 ‘민수의 사화’가 일어나다

예종 즉위 후 한 달 여 만에 옥사가 일어났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되고 세조 말년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했던 태종의 외증손 남이(南怡)는 세조의 신임을 받은 용맹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한 유자광이 그를 고변하였다. 이른바 ‘남이의 옥사’이다. 그 결과 남이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강순(康純)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 난을 평정한 세력 39인은 익대공신(翼戴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역모사건의 배경은 예종 즉위 초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남이를 중심으로 강순, 구성군 준(龜城君 浚) 등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은 세력과 이시애의 난 때 역모를 꾀한다는 소문이 돌아 궁지에 몰렸던 한명회, 신숙주 세력과의 알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종이 즉위한 이듬해에는 사초와 관련된 사화가 일어났다. 1469년(예종 1) 4월 『세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를 수합할 때 사관의 이름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는 ‘사초실명제’ 원칙을 준수하였다. 이에 민수(閔粹)라는 자가 자신이 예전에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한명회, 신숙주 등에 대해 비판한 글을 남긴 게 문제가 될까 두려워 사초를 빼내어 고치기를 시도하였다.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은 사초를 빼내어준 기사관 강치성(康致誠)과 민수와 함께 사초 수정을 시도한 원숙강(元叔康)이다. 일이 발각되어 민수는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강치성, 원숙강은 처형되었다. 민수는 예종이 세자일 때 서연관이었던 인연과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참형을 면하였다. 이처럼 『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벌어진 사초수정 사건 역시 옥사로 귀결되었다.

5 예종 재위 시 주요 업적에 대한 정리와 평가

세자시절부터 꾸준히 제왕학을 익혀온 예종은 즉위 후에도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고 국무를 처리하는 가운데 경서와 사서를 열심히 강독하였다. 직접 『역대세기(歷代世紀)』를 펴내어 고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또 신숙주, 최항 등에게 명하여 태조 이래의 국난을 기록한 『국조무정보감(國朝武定寶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예종은 『국조무정보감』을 통해 세조의 즉위를 문제 삼는 논의는 반역이라고 못 박으면서도 ‘나의 시대는 험난했지만 너의 시대는 태평하게 하라.’는 부왕 세조의 말씀을 따라 계유정난에 연좌됐던 사람들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즉위 후 처음 하교한 내용을 보면 언로를 널리 개방하여 정사와 민생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을 왕의 중요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손수 쓴 편지로 구언하였고, 허심탄회하게 간쟁을 받아들였다. 또 재주와 덕을 갖추고도 산림에 묻혀 있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각 도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려 널리 인재를 찾도록 하였다. 아울러 효자와 열녀들을 찾아내어 기리도록 하였다.

한편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묘호가 없던 조선 제2대 국왕 공정대왕(恭靖大王)에게 안종(安宗) 혹은 희종(熙宗)이란 묘호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세조대부터 통일법전으로 편찬되고 있던 『경국대전』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승하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경국대전』의 완성 및 반포는 성종대로 미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성종대에 들어와서도 『신묘대전』, 『갑오대전』, 『을사대전』 등 몇 차례 보완을 거친 후 1485년(성종 16)에 반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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