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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형[尹元衡]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외척(外戚), 세상을 혼탁하게 하다

1509년(중종 3) ~ 1565년(명종 20)

윤원형 대표 이미지

속무정보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명종(明宗)의 숙부인 윤원형은 인종(仁宗) 사망 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반대파인 대윤(大尹) 세력을 축출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체제 속에서 권력을 강화했다. 문정왕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명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윤원형의 권력 전횡, 백성 수탈은 심화되었다. 결국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에 급속히 몰락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윤원형의 관직 진출과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대립

윤원형은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윤원형은 전횡을 휘두른 대표적인 외척으로 유명하지만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아니었다. 윤원형은 중종 재위 시절인 1533년(중종 2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김안로(金安老)가 세자[후일의 인종(仁宗)]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윤원형을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함께 파직‧유배시키면서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은 이후 재기해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후 좌승지·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중종 치세 후반인 1543년(중종 38) 대사간 구수담(具壽聃)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경원대군(慶原大君)[후일의 명종]의 외숙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의 당여(黨與)가 대립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실제로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이 은밀하게 윤원형 형제와 결탁하여 중종을 동요함으로써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고, 유관(柳灌)이 중심이 되어 세자의 보호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대윤과 소윤은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대‧소윤의 정치적 대립은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인종의 재위 기간 중에는 상대적으로 대윤과 사림세력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되었고, 소윤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때 윤원형은 공조참판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전의 잘못으로 인해 탄핵당하면서 외척이라는 이유로 임명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사하면서 정국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후사가 없는 인종의 뒤를 이어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것은 명분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명종은 즉위 당시 12세였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소윤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되었고,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3 을사사화와 윤원형의 권력 강화

윤원형은 윤임을 모함하기 위해 “인종의 병이 위중할 때 임금의 아우인 경원대군을 추대하는 것을 원치 않고 계림군(桂林君) 이류(李瑠)를 세우려고 했으며, 유관과 유인숙(柳仁淑)도 이에 협력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윤임을 곤경에 빠뜨리고 문정왕후와 함께 대윤을 공격할 기회를 찾았다. 마침내 문정왕후가 윤원형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대소윤의 갈등이 정국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윤원형은 중종 말기부터 소윤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던 훈구세력인 이기‧정순붕 등을 끌어들여 사화(士禍) 정국을 이끌었다. 윤임‧유관‧유인숙은 명종 즉위에 불만을 갖고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역모의 죄명이 씌워졌고,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3인을 중죄로 다스릴 것을 결정하여 결국 이들 3명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어서 윤임과 관련된 많은 대윤 인사들까지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했으며, 사형‧유배‧파직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른바 을사사화였다.

문정왕후는 을사년에 종사(宗社)를 지킨 공이 가장 큰 신하로 윤원형을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에 따라 윤원형을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을사사화로 대윤의 핵심세력을 제거한 윤원형은 이후 거침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런데 2년 뒤인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서 발견된 익명의 벽서(壁書)에 있었다. 벽서에는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는 수렴청정 중인 문정왕후를 향한 직접적인 비판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이 사건의 원인을 을사년의 당, 곧 대윤 세력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못한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을사사화로 사형에까지 이르지 않고 유배, 파직 된 이들이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주공격목표였다. 이로써 송인수(宋麟壽)가 사사(賜死)되었고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 등 명망 있는 사림 인사들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윤원형은 어떠한 견제세력도 없이 권력을 농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윤원형은 집권세력과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이나 불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저항세력을 처단하는 사건 처리의 중심에 윤원형이 있었다.

4 문정왕후 수렴청정기 윤원형의 언론 장악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윤원형은 주요 정치기구를 수중에 넣고, 그 위세로 사헌부와 사간원에 친한 인물을 진출시키거나 언관을 강제로 제압하는 형태로 언론을 좌우하였다. 훈구와 척신의 비리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언론 삼사(言論 三司)는 훈척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훈척은 각 관서 사이에 형성되었던 기존 관계를 무너뜨리면서, 홍문관이나 사헌부‧사간원을 조정하여 비협조적인 관리들을 축출하였다. 윤원형은 1552년(명종 7) 3월 최측근인 윤춘년(尹春年)을 대사간에 배치하였다. 최측근 인물의 언론직 진출을 통해 윤원형은 단일체제 구축을 위한 권력 장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후 윤춘년은 삼사(三司)의 장관을 두루 역임하고, 시종‧대간직 인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언론을 좌우하였다. 그리하여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는 언론을 폄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정국 운영 체제 유지를 위해 복무하였다.

예컨대 윤원형은 자신의 측근 인물이나 자신의 천거를 반대하였던 임형수(林亨秀)나 권응정(權應挺)을 각각 삭탈관작토록 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친윤원형계인 이감(李戡)을 천거해주지 않은 허엽(許曄)도 ‘종가(宗家)를 고쳐지으면서 벌였던 부정 혐의’를 빌미로 최측근인 대사헌 윤춘년을 동원해 1553년(명종 8) 9월 탄핵‧파직시켰다. 이조‧병조 낭관으로 윤원형의 인사 행태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친윤원형계 인물의 진출을 막은 인물들을 체제 저항 인물로 지목하여 축출하였던 것이다. 윤원형은 반훈척적 성향의 낭관을 제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측근 인물을 진출시켰다.

한편 수렴청정기 문정왕후는 불사(佛事)에 힘쓰면서 많은 비용을 소모하였다. 수령으로 나가 있는 척리(戚里)들이 사적(私的)으로 진상(進上)하여 그 비용을 조달하였으며, 먼 인척들까지도 문정왕후에게 진상하였다. 이에 ‘내가(內價)’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문정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내전(內殿)의 부패는 심화되었다. 부패는 매관매직 풍조로 이어졌는데, 이는 윤원형이 국정을 담당하면서 형성된 뇌물에 의한 인사행정이 재상들에게까지 파급되고 고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5 명종의 친정(親政)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윤원형의 전횡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1553년(명종 8)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렴청정기에 윤원형을 핵심으로 하는 훈척세력이 형성된 이후 훈척세력은 주요 정치 기구를 장악한 채 친정 이후에도 정치를 주도하였다.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나와 원형이 아니었다면 상(上)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라는 말로써, 명종과 자신 및 윤원형의 정치적 관계를 새삼 확인하였다. 문정왕후는 사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면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윤원형 역시 권력 유지를 위해 필요할 때마다 정국에 개입하였다.

친정 직후인 1553년(명종 8) 10월에 의정부 좌찬성인 윤원형은 서얼 허통 논의를 주도하였다. 대신들조차 윤원형에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논의에 찬동하였다. 최측근인 윤춘년은 사헌부의 장으로서 반대 언론을 봉쇄하였다. 윤원형의 논의에 따라 양첩자(良妾子)의 경우에만 손자 세대에 이르러 허통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친정 초기 상황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어서 “안에서는 대비가 일을 결단하고 밖에서는 윤춘년이 그 의도에 따라 시행하며, 윤원형이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으로 정치를 전제(專制)하여 명종이 제지당하는 상황”은 일정 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윤원형은 1551년(명종 6) 9월 우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사직을 요청하여 체직된 후 1554년(명종 9년) 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후 영경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558년(명종 13) 3월 병조판서에 재임명되는 등 사실상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측근인 윤춘년은 홍문관부제학과 사헌부대사헌에 번갈아 제수되었고, 윤원형이 추천한 최우(崔堣)와 이언경(李彦憬)은 각각 사헌부장령‧홍문관전한에 진출하였다. 즉 윤원형은 의정부와 이조‧병조를 핵심 기반으로 하면서, 홍문관과 사헌부를 지지기반으로 삼았던 것이다.

자기 세력화한 정치 기구를 활용한 청탁 인사가 고착화됨에 따라, 친인척 관계로 결집된 소윤세력을 제외하고는 윤원형을 섬기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의 세력이 결집되었다. 특히 1557년(명종 12)에는 윤원형이 영중추부사 겸 이조판서로서, 삼정승과 함께 비변사 도제조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1558년(명종 13)까지 의정부‧육조를 세력권 안에 두었다. 이를 기반으로 병‧수사 및 오위도총관까지 측근 인물로 채우고, 비변사도 훈척 계열의 인물을 압도적으로 배치하였다. 훈척은 윤원형을 종주(宗主)로 모여 결속을 공고히 하면서, 모든 국사를 반드시 윤원형에게 아뢰어 결정하였으므로 ‘일국(一國)의 위복(威福)이 모두 그의 수중(手中)에 장악’되어 있는 형세였던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간석지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개발 지역은 황해‧평안도로 북상하고 있는 추세였다. 재상들은 비옥한 간석지를 차지하기 위해 임지로 부임하는 수령에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제방을 쌓고 개간하는 일 뿐만 아니라, 곡식의 종자를 공급하고 운반하는 일까지 해당 지방관과 긴밀한 협조를 맺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윤원형은 ‘간석지를 많이 막고 연해 및 내륙 읍의 좋은 밭을 차지하여 관가(官家)로 하여금 종자를 공급케 하고 수령이 농사를 감독하게 하며, 백성은 모두 경작의 노비로 삼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백성을 수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은 데는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鄭蘭貞)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정난정은 정윤겸(鄭允謙)과 관비(官婢)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로 윤원형의 애첩이었다가 1551년(명종 6) 정실부인 김씨를 내쫓아 독살한 후 정경부인(貞敬夫人)까지 올랐던 조선시대 대표적 요녀(妖女)로 평가받았다.

6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명종은 심연원(沈連源) 등의 지지 세력을 형성하여,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점차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윤원형에 대해서도 그 독주를 견제하려는 심중을 드러내었다. 윤원형의 최측근 고위 관료인 윤개(尹漑)를 축출하고, 병을 핑계로 우의정 윤원형이 사직을 청하자 이를 그대로 수락하였다. 윤원형은 우의정에서 면직된 후 영중추부사 및 연경연사의 위치에 있다가 1563년(명종 18) 정월 영의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실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명종은 그 사이 인사를 통해 윤원형 세력 약화를 위한 정치 구도 재편에 박차를 가하였다. 문정왕후의 압력으로 이조판서에 임명하지 못했던 심통원(沈通源)을 1560년(명종 15) 정월 우찬성에 기용함으로써 명종은 인사 주도의 의지를 나타냈고, 윤원형과 윤춘년은 각각 관직에서 물러났다. 몇 달 후에 있었던 정승직 임명에서도 명종은 윤원형을 배제하고 심통원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명종이 성장하면서 왕권 강화의 의지를 드러내 보임에 따라 점차 견제를 받게 된 윤원형이 급격히 몰락한 계기는 바로 문정왕후의 사망이었다. 1565년(명종 20) 4월, 20년 간 절대 권력을 행사해온 문정왕후가 사망했다.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2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사헌부를 시작으로 문정왕후의 최측근이었던 승려 ‘보우(普雨)’에 대한 탄핵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원형은 보우의 처벌을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보우를 제주도에 귀양 보내는 조치가 완료되자, 과거 청산의 칼끝은 곧바로 현직 영의정 윤원형에게 향했다. 대사간 박순(朴淳)은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처음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며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상소가 계속되자 명종은 윤원형을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했다. 삼사, 판서 전원, 좌‧우 정승의 요구가 계속되자 명종은 윤원형을 파직하고 조정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때 영의정에 임명된 이준경(李浚慶)은 윤원형을 귀양 보내어 공론을 진정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명종은 끝내 윤원형에게 귀양형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명종은 귀양형이 아닌 방귀전리(放歸田里), 곧 벼슬을 빼앗고 자기 고향으로 내치는 조치를 내렸다. 탄핵 후 24일 만에 맞은 결과였다. 비록 윤원형은 귀양의 형벌에 처해지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그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 그는 부인 정난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의 시골집에 가 있었지만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음독자살했고, 그 5일 뒤에 윤원형도 자살하고 만다.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 4월 사망한 뒤, 20여 년에 걸친 그녀의 힘으로 뒷받침되었던 강력한 권력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 해 11월 급격히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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