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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李叔蕃]

강력한 권력을 누리다 정계에서 축출되다

1373년(공민왕 22) ~ 1440년(세종 22)

이숙번 대표 이미지

마천목 좌명공신녹권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숙번(李叔蕃)의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이다. 아버지는 이경(李坰,), 어머니는 판서를 역임한 남휘주(南輝珠)의 딸 영양 남씨(英陽南氏)이다. 이숙번의 어머니는 전 남편 윤공(尹控)의 자식들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이숙번과 함께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된 윤자당(尹子當)과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다. 부인은 정총(鄭摠)의 딸 청주 정씨(淸州鄭氏)이다.

이숙번은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18세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2)에 치러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태종의 집권에 기여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에 연이어 책봉되며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하였으나, 1416년(태종 16)에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의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비행과 관련된 구종수(具宗秀)와 사사로이 교류했다는 이유로 함양(咸陽)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20여 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440년(세종 22)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에 있다.

2 두 차례 왕자의 난에 적극 참여하다

이숙번은 1393년(태조> 2) 20세에 문과 급제한 후 좌습유(左拾遺)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된 계기는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태종은 당시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에게 무기를 준비하도록 하여 변란에 참여시켰다. 이미 이방원과의 긴밀한 교유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숙번이 언제 어떻게 이방원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 측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 이숙번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격 발탁되었고, 정사공신에도 책봉되었다. 이숙번은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개성에서 전투가 발생했을 때에도 무기를 갖추고 교전하였다. 이때 이방간의 군사가 이숙번에게 집중적으로 화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교전이 끝난 후 이방간에게 변란의 이유를 물을 때에도 이숙번이 나서서 교섭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이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이숙번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동지좌군절제사(同知左軍節制使)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태종 즉위 후에는 좌명 1등공신에도 책봉되었다. 당시 29세에 불과했던 이숙번은 6번째의 위차(位次)에 해당할 정도로 큰 공을 인정받았고, 이후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3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다

태종 즉위 후 이숙번은 안성군(安城君, 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총제(摠制), 참찬의정부사,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 의정부찬성사 등을 거쳐 1412년(태종 12)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하계)의 관품을 받았다. 이후에는 병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숙번은 문과 급제자였지만, 군사적 재능이 남달랐던 듯하다. 왕자의 난과 같은 정변에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태종 집권 이후에도 대부분 군사 관련 직임을 수행하였다. 태종과 함께 군사를 관장할 책임자를 발탁하거나 군사 훈련 및 군량 마련 대책을 논의하는 등 건국 초기 군정과 군령의 계통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태종의 사냥이나 강무(講武), 격구(擊毬)에 자주 동행하였고, 조선 건국 이후 처음으로 실시한 무과(武科)의 동감교관(同監校官)을 맡기도 했다.

주로 군직을 맡았던 만큼 국가의 기간 시설 구축에도 관여하였다. 1406년(태종 6) 종묘 재궁(齋宮) 건설 감독, 1408년(태종 8) 교량 수리 업무를 담당하는 교량 돈체사(橋梁頓遞使), 1411년(태종 11) 경회루 연못 공사 감독 등을 맡았다. 이외에 군선(軍船) 바닥에 석회(石灰)를 발라 배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숙번은 태종대에 벌어진 정치적 쟁점들을 처리하는 데에도 앞장 섰다. 특히, 민무구(閔無咎) 네 형제의 불충이 논란이 될 때마다 탄핵에 앞장섰다. 민무질(閔無疾)은 태종에게 ‘이숙번이 자기 형제들을 해치려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숙번은 1415년(태종 15)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 형제의 처벌 요청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태종이 전위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만류하는 관료들 중에는 항상 이숙번이 있었다. 특히, 1406년(태종 6) 태종은 이숙번을 불러 밤마다 꿈에 모후(母后, 신의왕후 한씨)가 나타나 “너는 나를 굶기려 하느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전위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때 이숙번은 태종의 의중을 조정에 알려 관료들의 전위 반대를 공론하였다. 1409년(태종 9)에도 전위 표명 후 닫힌 궁궐 문을 밀치고 들어가 선위(禪位)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이때 이숙번은 “사람의 나이 50이 되어야 혈기가 쇠하니, 50세가 되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이숙번의 언급에 따르면 태종의 선위 시기는 7년 뒤인 1416년(태종 16)으로 정해진 셈인데, 공교롭게도 그해 이숙번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4 그는 왜 정계에서 축출되었을까

이숙번이 정계에서 배제된 이유는 무례와 불충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좌대언(左代言) 서선(徐選)이, 이숙번이 태종의 관직 임명을 비판했음을 아뢴 일이었다. 이숙번은 자신의 밑에 있던 박은(朴訔)이 우의정에 임명된 것에 불만을 나타냈고, 이에 박은을 비롯한 공신 관료들은 이숙번을 탄핵하였다. 구체적으로 지적된 잘못은 붕당을 만들지 말라는 태종의 말에 반감을 나타냈다는 것, 태종과 하륜의 국정 논의를 엿들었다는 것, 태종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 등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일단 그때의 처벌은 외방에 거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실록에는 이숙번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음을 곳곳에 서술하고 있다. 태종은 탄핵 이전에도 이숙번을 ‘권신(權臣)’으로 언급하였을 뿐 아니라 지신사(知申事, 승지) 유사눌(柳思訥)이 이숙번과 사사로이 교유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태종실록』에는 이숙번의 사위 강순덕(姜順德)이 초고속으로 승진했을 정도로 그의 ‘기세가 혁혁하였다’는 서술이 있고, 이숙번이 자신의 온천행에 갑사(甲士) 수십 명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

1417년(태종 17)에는 이숙번이 다시 서울로 잡혀 왔다. 이유는 세자 양녕대군의 비행과 관련된 구종수 등이 이숙번이 안치된 곳을 찾아가 사사로이 교유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이숙번은 다시 함양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그에 대한 탄핵은 세종의 즉위로 태종이 상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숙번의 말에 따르면, 태종은 그의 목숨 보전을 약속했다고 한다.

5 세종의 명으로 구술사를 풀어내다

이숙번은 유배에 처해진 뒤 서울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1438년(세종 20) 세종의 부름을 받고 한 차례 서울로 돌아왔다. 그를 부른 이유는 태종의 헌릉(獻陵) 비문에 기록된 문구가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정부 찬성 신개(申槩)는 헌릉 비문에 기록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한 내용 가운데 “태종께서 병기(炳幾)하시어 〈적도를〉 섬멸 제거하였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병기’라는 단어가 기미도 나타나지 않은 일에 대해 교묘하게 꾸며대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왕자의 난에 대한 실록이나 사초(史草)의 관련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시되었다. 세종은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 하에 옛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술(口述)을 받았고, 그 중에 이숙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배중인 이숙번을 한양으로 불러온다는 것에 대해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이 보기에 이숙번은 역사 기술을 보완하는 데 가장 적임자였다.

이숙번은 오랜 기간 태종의 곁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고려사』 개수와 같은 역사서 편찬에 참여한 이력도 있었다. 1414년(태종 14) 태종은 “공민왕 이후의 일에 사실이 아닌 것이 많다.”하며 재편찬을 명하였고, 이에 영춘추관사 하륜, 감춘추관사 남재(南在,), 지춘추관사 이숙번·변계량(卞季良)이 주축이 되어 개수가 행해졌다. 그러나 이때의 개수는 1416년(태종 16) 하륜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세종은 『고려사』 개수를 비롯하여 『정종실록』, 『태종실록』,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의 각종 역사 기록을 편찬하는 가운데 잘못 기록되거나 서술이 부족한 내용을 보완·수정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왕자의 난’에 대한 역사 서술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숙번을 불러와서 선공감(繕工監) 공관에 묵게 하였고, 도승지 김돈(金墩)을 시켜 당시의 일을 자세히 묻도록 하였다. 이른바 구술사(口述史) 방식의 역사 편찬이 행해진 것이었다. 이숙번은 며칠 간의 작업이 끝난 후 다시 서울을 떠났고, 세종은 이숙번에 대한 처벌을 조금 완화해 주었다. 이듬해인 1440년(세종 22) 이숙번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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