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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백전백승, 백의종군

1545년(인종 1) ~ 1598년(선조 31)

이순신 대표 이미지

이순신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이순신의 생애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의 무신이다. 무신으로 등용된 초기에는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 활약하였고, 일찍부터 장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원칙과 소신이 분명한 성격으로 인해 그를 질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직전 우수한 장수로 특별히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에서 수군을 기르며 전쟁가능성에 대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탁월한 전략,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연전연승했다. 이는 꾸준한 준비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응책 덕분이기도 했다. 그의 승리 덕분에 조선은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빛나는 전공은 그를 질시하는 세력의 견제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곧 자리에 복귀하여 무너진 수군을 재건했고 또 다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노량해전에서 퇴각을 꾀하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2 이순신의 유년기와 무신으로의 발탁

명종에서 선조로 이어지는 시기는 성리학을 깊이 익힌 사림들이 자신들의 학문을 정치로 펼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북방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들이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기도 했지만 그들보다 우수한 장수들이 이들을 격퇴하는 한편으로 무역과 관직수여를 통해 이들을 달래는 방책을 병행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조부 이백록(李百祿)이 기묘사화에 희생된 이후 가세가 기울었으며, 그의 부친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가풍은 엄격하였으며 학문과 문학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철저히 하였다. 정의감에 가득 차 불의를 참지 못하나 약한 자에게는 따뜻하게 대하던 이순신의 성격은 이러한 교육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572년에 훈련원에서 시행된 무과 별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실격하였다. 이후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함경도 지역 등지로 파견되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녹둔도(鹿屯島)에 부임하였을 때 오랑캐의 침입에 수적으로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여 피하였으나 이로 인해 죄를 입게 되었다. 이것이 녹둔도 사건(鹿屯島事件)이다. 이순신은 사전에 이를 예측하고 병력 충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전라도 조방장을 거쳐 정읍현감으로 재직했다. 1589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유홍(兪泓)에 의해 추천을 받았고, 비슷한 시기 유성룡(柳成龍)의 추천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관직생활도 조금 승진 속도가 붙게 되었고, 이후 만포첨사, 진도군수를 거쳐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이순신의 승진은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이루어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이 파격적인 임명에 대해 당시 조정에서는 반발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자마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여 착실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군사 훈련을 거르지 않았으며, 전쟁 발발 하루 전에는 거북선에서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을 발사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정도로 전쟁을 예측하고 대비한 이는 조선에서 이순신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의 승리

1592년 4월15일 술시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이순신에게 연락이 왔다. 4월13일 신시(申時)에 일본군의 무수한 함선이 부산을 침략했다는 소식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이끄는 경상좌수영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이순신은 이미 침략에 대비한 준비를 착실히 해왔으나 섣불리 출진하기보다는 전황을 지켜보는 동시에 승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전하는 쪽을 택했다.

5월4일 마침내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의 첫 번째 출진이 이루어졌고,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다. 5월7일 옥포 앞바다에서 첫 번째 해전이 이루어졌고 승리했다. 첫 번째 해전인 옥포해전이었다.

일본군의 함대는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약탈 중이었다. 이들은 이순신의 함대를 보고 배에 올라타 그 중 6척이 조선수군에 덤벼들어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함은 곧 이순신의 함대에 격파되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의 대선13척, 중선6척, 소선2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합포와 적진포에서도 해전을 벌여 일본수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5월9일에 본영으로 돌아와 이어질 전투준비에 힘썼다.

이후 일본수군이 사천에 정박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함대를 몰고 두 번째 출진을 감행하였다. 적선 10여척이 사천에 정박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쪽으로 향하던 중 적선을 발견하여 추격을 시작했다. 사천선창을 바라보니 적선과 일본군이 보였다. 일본군은 높은 구릉지대에서 공격을 감행했고 조선의 무기는 그 곳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마침 당시 조류는 썰물이었기 때문에 육지 가까이까지 판옥선이 진입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유인책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마침 밀물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그리하여 정박해 있던 일본군의 전함을 모두 불태웠다. 이것이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을 비롯하여 나대용 등이 부상을 입었는데, 나대용은 탄환에 맞았고 이순신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이 관통하였다. 다행히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6월2일에는 일본군이 당포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그 곳으로 가서 성을 약탈 중이던 일본군을 공격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합세한 이순신은 일본군 함대를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출진의 성과는 화려했고, 조정으로부터 전공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

전투결과가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은 이순신의 자급을 자헌대부로, 이억기를 가선대부로 올렸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에서의 연이은 패배소식을 듣고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전략을 바꾸어 대규모 수군을 동원해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였다. 이에 육지에서의 전투에 임하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투입하였으며, 해전에 잔뼈가 굵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합류하게 했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조직하고 함께 출동한 뒤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했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전선(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은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좁아 원하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를 전장으로 택했다.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친 공격을 퍼부어 대부분의 적선을 격파했다.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 부른다.

한산도 대첩의 전황을 살펴보면, 출진 이후 당포에 멀던 중 목동 김천손이 와서 일본군선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에 견내량으로 향하자 70여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있었다. 이순신은 이곳이 판옥선과 같은 큰 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육지가 가까워 일본군이 상륙하기 쉬운 점을 고려하고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로 했다. 일본수군은 유인책에 넘어가 조선수군을 추격하였다. 한산도 앞바다에 도달하자 조선함대는 선회하여 학익진을 펼치고 일본함대에 돌격했다. 일본함대는 포위전에 말려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참패했다.

한산도 대첩 후 이순신은 안골포로 전진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합류하려던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의 전선을 공격하였다.

한산도 승리 후 잠시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은 일본군이 수송과 보급의 중심기지로 이용하고 있는 부산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억기와 원균이 합류한 조선수군은 논의 끝에 출진하여 9월1일 부산근방 절영도(影島)에 이르렀다. 여기서 적선 몇 척을 격퇴한 후 부산의 상황을 정탐하게 하였다. 부산에는 대규모 선박이 정박 중이었으며, 육지도 요새화를 진행한 상태였다. 이순신은 동료 장수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선택하였다. 우부장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적선을 불사르자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했다. 조선수군의 위세에 일본수군은 바다로 나오지 못했고 일본군은 육지에서 공격을 시도할 뿐이었다. 조선수군은 바다에서 공격을 계속하여 100여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했다. 날이 저물자 이순신은 퇴각을 명하였다. 이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이 전사했다.

이순신은 8월24일 네 번째 출전을 시작했다. 동쪽으로 향하며 일본군선을 수색하면서 하나씩 격파했다. 절영도에 도착하여 작은 배를 보내 부산포를 정탐하자 470여척의 배가 정박 중인 것을 확인하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 해전은 작은 함대로 대규모 주둔 세력과 맞섰으며 일본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정운 외에 전사 6명, 부상 25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과정에서 군함이 파손되고 군량도 소모되어 9월2일에 해산 후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하였으며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았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4 강화교섭기의 활동과 억울한 파면

명과 일본이 강화교섭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더 이상의 전투가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였고 장수와 병사들은 해이해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병사들의 군기를 유지하면서 전선과 무기의 개보수에 힘썼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기도 하고 지친 병사들이 도망치기도 했다. 당시 이순신의 어려운 상황은 그의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군정이 해이해지고 예리한 기세가 꺾였으며 전염병이 크게 돌고 있습니다. 진영에 있는 군사들이 태반이나 전염병에 걸려 사망자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양식이 부족하여 연일 굶게 되고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군사 수는 날마다 줄어드는데 보충할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거느린 수군만 헤아려 봐도 총 6,200여명이었는데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수와 2, 3월부터 현재까지 병사자가 600명에 이릅니다. 죽은 이들은 모두 건강하고 활도 잘 쏘고 배도 잘 부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남은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2, 3홉 밖에 먹지 못해 배고프고 궁색한 것이 극에 이르러 활 당기고 노를 젓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몇 년 동안 진행된 강화교섭은 명과 일본이 서로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서 끝내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명령했고 1597년 1월부터 일본군들이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그의 부하 요시라 등은 경쟁자 가토 기요마사를 없애기 위해 기요마사의 도해날짜를 조선에 알려주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요시라로서는 성공하면 경쟁자를 없앨 수 있고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은 없는 시도였다. 조선조정은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실행에 옮겨보기로 하였고 이순신에게 요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주저했다. 정보를 확신할 수 없었고 불확실한 정보만을 믿고 대규모의 일본군이 상륙하는 부산지역까지 출진한다는 것은 모험과 같았다. 조정의 재촉에 마지못해 출진하였으나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상륙한 후였고 조정은 이를 빌미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조선에 도착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측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렸다. 이순신은 신중한 판단 하에 출진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론이 들끓었고 원균이 대체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원균은 자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전라병마절도사로 재임하고 있던 원균은 가토 기요마사 요격에 대한 논의를 전해 듣고 자신이라면 함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위협을 가해 가토 기요마사가 건너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결국 파면되어 한양으로 소환되는 처지에 놓였다.

선전관을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되, 원균과 교대한 후에 잡아오되 만약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가혹한 심문을 받았고, 아울러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이 실각한 이와 같은 과정을 일본군의 교묘한 반간계(이간계)로 판단하기도 했다.

요시라가 조선에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예정 사실을 이순신에게 알려주었으나 이순신이 의심하여 출진하지 않았다며 조선을 희롱했다. 조정은 이순신을 원균으로 교체하고 이순신을 국문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 조경남(趙慶男)은 이를 두고 ‘요시라가 우리를 속였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으니 통탄할 일’이라고 하였다.

5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이어받은 원균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대패했고 이순신이 키워온 조선수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조정은 다시금 이순신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당시 조선 수군에는 남은 군사 120인이었고, 병선이 고작 12척이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이 미약하여 적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이순신에게 육지에서 싸우라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자신이 임진년 이래 5, 6년간 적이 전라, 충청 지역으로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수군으로 길을 막았기 때문이며, 지금 전선이 아직 12척 남아 있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또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게 된 이순신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8월 15일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연해의 지형과 바다의 성격에 익숙했고 전세를 유리하게 돌릴만한 탁월한 전략, 전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거짓말 같은 전과를 올렸다.

1597년 9월16일 오전, 적선이 출진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적선을 기다렸다. 적선은 이순신의 대장선을 포위하여 접전이 벌어졌다. 나머지 조선군선은 겁을 내어 뒤에 처져있었다. 이순신이 독전하자 함께 돌진하였다 조류가 조선군에 유리하게 바뀌었고 31척의 적선을 파괴했다. 날이 저물 무렵 일본함대가 퇴각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制海權)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를 거쳐 고금도로 주둔지를 옮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졌다. 해안 일부지역만을 점거한 채 명나라의 대군과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일본군은 각자 대치하던 명군과 강화교섭을 시작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철수명령이 떨어지면서 강화교섭은 철수교섭으로 바뀌었다. 순천왜성(順天倭城)에 주둔 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퇴각하려는 고니시 유키나가 측의 움직임을 해상에서 저지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고 구원군이 바다를 통해 순천으로 향했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탈출을 돕는 일본군 수군에 공격을 가했다. 싸움을 기피하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설득하였다. 전투 중 위기에 처한 진린을 구하기도 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던 중 조명연합수군의 함선과 적선이 뒤엉켜 혼란한 상황이었다. 진린이 적선에 포위되자 이순신이 이를 보고 구해주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이순신이 탄환에 맞고 말았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린은 배 위에서 쓰러질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다. 그러나 뱃머리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탄환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순신이 전투를 독려하다가 유탄에 맞았다. 이순신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하고는 죽음을 맞았다. 조카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명령에 따라 싸움을 독려하여 군중에서는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후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 통곡소리가 가득했다.

6 이순신에 대한 현창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여수 여수 충민사(麗水忠愍祠), 충무의 통영[충무] 충렬사(忠武忠烈祠) 남해의 남해 충렬사(南海忠烈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에 현충사를 사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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