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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다섯 번의 영의정, 두 칸 초가에 머물다

1547년(명종 2) ~ 1634년(인조 12)

이원익 대표 이미지

이원익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뛰어난 능력으로 조선을 지탱한 관료

이원익(李元翼)의 호는 오리(梧里), 자는 공려(公勵)이다. 1547년(명종 2) 태어난 이원익은 1634년(인조12)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격동하는 시대를 맞아 조선을 지탱하였다.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조정의 핵심 관료로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굵직한 사건을 연달아 맞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이러한 이원익의 노력이 주춧돌이 되어 조선은 양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설 수 있었다.

2 격동하는 동아시아와 조선

이원익이 살다간 16~17세기 동아시아의 판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오랜 전란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막대해진 군사력의 총 끝을 대륙으로 돌렸다. 명(明)을 치러 갈 것이니 길을 비키라는 요구를 조선은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란을 감지한 조선은 나름의 방비를 하기도 하였으나, 오랜 전란 동안 벼려진 일본의 군사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주로 북방의 기마 민족을 상대하였던 조선의 정예 군대는 조총을 내세운 일본군의 생소한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국왕 선조[조선](宣祖)는 피난길에 올라 의주까지 쫓겼다. 명의 원군 파병과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 그리고 도처에서 이어진 의병과 승군의 활약으로 간신히 침략을 막아내었으나, 그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이 피해는 지난 수 백 년 간 누적된 조선 사회의 모순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화이(華夷) 질서 붕괴의 서곡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상당한 병력을 잃은 명은 북방에서 흥기하는 만주족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부에서는 농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후금(後金 ; 청)을 건국한 만주족은 후방의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조선은 북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었다. 결국 청(淸)은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본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그 질서의 핵심부에 위치했던 조선은 양란이라는 변화의 칼바람을 호되게 맞을 수밖에 없었고, 내부적으로도 인조반정, 이괄의 난과 같은 혼란이 계속되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국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원익은 이를 맡은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하나였다.

3 관료로서 뛰어난 능력을 증명하다

1547년 10월 24일 이원익은 서울 유동 천달방(현재의 동숭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전주 이씨이니, 직계는 아니지만 왕과 같은 가문인 종친이었다. 이원익의 고조부는 태종[조선](太宗)의 아들 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이다. 증조부는 수천군(秀泉君)에 봉해진 이정은(李貞恩)으로 문학으로 명망을 얻었다. 할아버지 이표(李彪)는 청기군(靑杞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이억재(李億載)는 함천군(咸川君)에 봉해졌는데 집안이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음률에 뛰어나 사경(砂磬)을 연주하면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수천군대부터 이어져온 가풍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풍은 이억재의 아들 이원익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기품이 호방하여 낙산 아래 거주할 때에 종종 거문고를 가지고 산에 올라 풍류를 즐겼으며 그 솜씨가 또한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북한산(北漢山), 성거산, 금강산(金剛山), 묘향산(妙香山) 등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한 곳을 홀로 거닐며 즐겼다. 그러나 그가 선대로부터 풍류만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영리하기도 남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번 보면 외울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품행이 반듯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23세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이 있다. 배운 내용을 머릿속에 잘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배운 지식을 실제 상황에서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원익은 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1574년(선조 8) 황해도도사로 나아갔을 때 병적(兵籍) 작성을 맡게 되었다. 당시 이원익은 사무를 간편하게 해서 번거로운 절차를 없앴으니 3년 만에 일이 끝났다고 한다. 또한 죄를 지은 자가 벌을 피하는 일이 없고 죄를 짓지 않은 자가 벌을 받는 일이 없었으므로, 마치 신명(神明)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1587년(선조 20) 4월 이원익이 안주목사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그는 관료로서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당시 안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진영이었으나 여러 차례 재해와 기근을 겪어 곤궁함이 말이 아니었기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명망 있는 문신을 골라서 이곳을 구제하도록 결정하였다. 부임하여 당시 처참한 안주의 실상을 목도한 이원익은 먼저 조곡(糶穀) 1만 석을 평양감영에서 얻어다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경작에 힘쓰도록 권하였다. 또한 군정(軍政)을 개혁하고 잡역을 감면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애썼다. 이원익의 노력에 백성들도 농사일에 힘써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원래의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양잠을 권하여 백성들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애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여러 번 포상을 받고 중앙정계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원익은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 성품 또한 강직하였다. 1583년(선조 16)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도승지였던 박근원(朴謹元)이 박순(朴淳)과 이이(李珥)를 공격하였는데, 왕자의 사부로 있던 하락(河洛)이 상소하여 승정원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승정원에서 자신의 상소를 막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승정원의 계사(啓辭)가 문제가 되었고, 선조는 이를 벌하기 위하여 집필자가 누구인지 승정원에 물었다. 이 때 이원익은 승정원의 계사는 집필자 한 사람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없으므로, 그 죄를 한 사람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집필자가 누구인지 이실직고하지 않았다. 결국 이원익을 포함한 승정원 전체가 파직되었고, 이원익은 이 일로 인해 몇 년간 벼슬살이에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에게까지 피해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승정원의 규율을 끝까지 지킨 그의 강직함은 추후 그가 관료로서 대성하게 된 자질 중에 하나였다.

4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

사람의 능력은 위기를 당했을 때에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이원익의 능력은 조선이 미증유의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에 더욱 빛났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선조는 이원익의 능력과 인덕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원익이 안주목사로 재임하였을 때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그를 평안도로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파천(播遷)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이원익은 선조의 기대에 십분 부응하였다. 그는 체찰사에 이어 순찰사로 임명되어 각 고을에서 군대를 징발하고 그 군량을 보급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등 평안도 방비에 힘썼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평양성을 내주긴 하였으나, 결국 명의 원병과 합세하여 다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또한 그는 명군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는 등 명군과의 협력에 큰 공을 세웠다. 공을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죽거나 다친 병사들에게 은전(恩典)을 내릴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민심과 군심을 어루만지는 데에도 힘썼다. 이러한 그의 공로로 인해 임기가 다했음에도 민심 이반을 피하기 위해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했을 정도였다.

결국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업무 방식을 소상히 기록하여 인계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에서 그의 공은 조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인정받아 이후 평양과 안주 두 곳에 사당이 생길 정도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원익은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의 전반적인 전황을 책임졌다. 그는 각 요지를 방어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라 보고 각 곳의 산성을 수복하는 데에 수축하는 데에 힘썼다.

이원익은 위기에 처해있던 이순신(李舜臣)을 옹호하기도 했다. 1596년 10월 이원익에게 적의 동태와 방비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선조는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다. 공을 세운 후 태만해지지는 않았는지 군사들을 잘 지휘할 자질이 있는지 등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 이원익은 이순신을 두둔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순신은 원균(元均)으로 교체되었고 원균은 일본에 대패하고 만다.

결국 화의가 성립되고 일본군이 물러가자 이원익은 전쟁 동안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5 혼란한 정국에 선 원칙주의자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이원익은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정부를 이끄는 수반이 된 이원익은 전후 수습에 힘써 1608년(광해 즉위) 5월에는 선혜청을 설치하여 공물(貢物) 대신 쌀을 받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대공수미법은 이후 조선 최고의 개혁 중 하나로 평가받는 대동법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광해군의 정책 모두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는 광해군의 패륜 행위에 강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즉위 직후 광해군이 형 임해군(臨海君)을 역모죄로 몰아 처형하였을 때, 이원익은 역모죄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해군의 억울함을 간청하였다. 친족을 중하게 여겨 자애로움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총 23차례나 사직을 청하였고 마침내 광해군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였다. 이어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을 때에도, 영창대군의 친모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출하려 했을 때에도 이원익은 이를 극력 비판하였다. 인륜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해군에게 글을 올려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불효할 수 없는 것이라며 광해군에게 패륜을 저지르지 말 것을 강력히 충고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원익의 충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 보냈다. 이후 이원익은 고향으로 방면되어 여주 강가에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후, 인조[조선](仁祖)는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하며 조정에 불러들였다. 당시 광해군 대에 정권을 잡았던 이들을 처벌할 때 이원익은 지나친 처벌은 옳지 않은 처사라 주장하며 가볍게 처벌하고자 하였다. 광해군에게 자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익은 폐주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에도 자신의 직임을 걸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폐위되었더라도 자신이 임금으로 섬겼던 만큼,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신 또한 조정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조는 그의 말을 따라 광해군을 처형하지 않도록 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친아버지를 원종[조선](元宗)으로 추숭하려 하였을 때에도 이원익은 반대를 표명하였다. 인조가 이미 왕위를 계승하여 종통을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낳아준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종통의 대의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논의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한 그의 강직함은 당대에도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계속되는 난리에도 이원익은 국가를 이끄는 원로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고령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향하였으며, 다시 강화도로 돌아와 왕을 모셨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훈련도감에 임명되었으나, 이원익은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계속하여 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인목왕후의 승하 당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잠시 입경하였을 뿐이었다.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금천(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의 후한 은혜를 받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87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렸으나, 그 대부분을 국가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지냈다. 유능함과 강직함을 겸비한 그는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조야(朝野)가 모두 의지한 명재상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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