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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공자 문묘에 배향되다

1536년(중종 30) ~ 1584년(선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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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이이(李珥)의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또는 우재(愚齋)이다. 그는 중종 31년(1536)년에 태어나 선조 17년(1584)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명종 19년(1564)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내외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벼슬은 이조 및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히며, 국왕을 보좌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경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또한 후대 그의 문인들은 서인(西人) 세력을 형성하여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이는 인조[조선](仁祖)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숙종[조선](肅宗) 때 문묘(文廟)에 종사되었으며,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비롯한 전국의 20여 개 서원에 종향되었다.

2 출신 가문과 학문적 성장

이이의 본관은 경기 덕수(德水)이며, 고조는 이추(李抽)인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고, 증조는 이의석(李宜碩)인데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조부는 이천(李蕆)이고 부친은 이원수(李元秀)로 감찰(監察)을 지냈다. 어머니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신명화(申命和)의 딸인 신사임당(申師任堂)으로서 예(禮)에 익숙하고 시(詩)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이이는 중종 31년(1536)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北坪村)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고, 외할머니와의 관계도 매우 돈독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뛰어나서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을 알았다고 한다. 8세 때 화석정(花石亭)에 올라가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江含萬里風’ 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었다고 한다.

이이는 유독 외가의 가족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외할아버지인 신명화에 대한 행장(行狀)을 남겼고, 외할머니인 이씨 부인에 대해서는 묘지명(墓誌銘)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행장을 남겼다. 그것은 이이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의 행장 내용에도 어머니가 자신의 고향인 강릉을 그리워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이는 16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복을 벗을 즈음에 불경을 읽고 속세를 떠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절에 들어가 열심히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았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난 뒤 불교를 버리고 다시 유학(儒學)에 마음을 쏟기로 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여 성현을 표준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이이가 금강산에 들어가서 불교를 공부할 때의 구체적인 정황은 잘 알 수 없으나, 이이는 금강산의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과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을 놓고 논변을 벌였던 사실을 기록하였다.

명종 12년(1557) 부인을 맞아들였는데,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따님이었다. 다음 해 성주에서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산(陶山)에 들러 퇴계 이황을 만났다. 그 후 서찰을 주고받으며 여러 학설을 논변하였다. 이이는 어릴 때 이름을 알만한 스승에게 배우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유하였고, 퇴계 이황을 만나 교분을 쌓았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이이가 남긴 쇄언(瑣言)이라는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쇄언은 자잘한 말이란 뜻으로, 이이가 이황을 만나 묻고 답한 것이 자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이가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을 때 주고받은 시와 이야기, 그리고 첫 만남 직후에 주고받은 시와 편지의 주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3 관직 생활

이이는 20대에 과거 공부에 힘써,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마친 명종 19년(1564)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를 거치면서 장원을 차지한 것이 아홉 차례에 이르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었다. 처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예조좌랑(禮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이는 과거에 장원 급제할 때 문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도책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자연 현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만물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도리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이는 성리학적 자연관에 따라 여러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임금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정치를 바로 하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진 관료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관직의 풍토를 비판하였는데, 을사사화 때의 위사공신[보익공신](衛社功臣(保翼功臣))을 삭훈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조선](宣祖)가 즉위하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홍문관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사가독서에 뽑혀 독서당에 있으면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이는 손님과 주인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체의 글로서, 성군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세, 당시 조선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당대에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들과 그 해결책 등을 서술하였다.

「동호문답」은 선조 2년 홍문관 교리로 한 달 가량의 사가독서(賜假讀書)를 마친 34세의 율곡이 새 군주 선조에게 과제로 제출한 정치개혁 보고서로서 이이의 현실 인식 및 개혁안을 11개 조항으로 망라하였다. 11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군주의 길을 논하다. 2. 신하의 길을 논하다. 3. 좋은 군주와 좋은 신하가 만나기 어려움에 대해 논하다. 4. 우리나라에서 도학이 행해지지 않음에 대해 논하다. 5. 우리 조정이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함에 대해 논하다. 6. 오늘의 시대 정세를 논하다. 7. 무실(務實)이 수기(修己)의 요체임을 논하다. 8. 간인의 판별이 어진 이를 기용하는 요체임을 논하다. 9. 안민정책을 논하다. 10. 교육정책을 논하다. 11. 정명(正名)이 정치의 근본임을 논하다.

그 뒤 이이는 홍문관 교리, 직제학, 대제학 및 사간원 대사간, 호조·이조·형조·병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율곡전서』에는 율곡이 평생에 걸쳐 임금에게 올린 59건의 소차(疏箚)가 실려 있다. 그의 상소는 당대의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임금의 수양과 백성을 위무를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조 7년의 「만언봉사(萬言封事)」, 선조 11년의 「응지논사소(應旨論事疏)」, 선조 15년의 「진시폐소(陳時弊疏)」, 그리고 선조 16년의 「진시사소(陳時事疏)」와 같은 상소들은 모두 분량과 내용에서 대단히 충실한 글이다. 그는 당시를 창업과 수성에 이어 나라의 면모를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경장(更張)의 시기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당시의 안보 정세를 우려하면서 국방 개혁을 강조하였다. 그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이이가 국방 개혁에 대해 당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식견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만언봉사」는 선조 7년 임금의 구언을 계기로 올린 상소로서 이이의 관직 생활 초기를 대표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상소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통찰하고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만언봉사의 내용은 당시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진단에 대책으로 나뉜다. 그는 먼저 자신의 시대는 변통을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실질에 힘쓰지 않아 근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현실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안으로 임금의 수양과 관련된 네 가지 대책을 내놓았고, 밖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다섯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이는 또한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는데, 선조 4년 청주목사가 되었으며, 선조 7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그는 민생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서원향약과 해주향약을 직접 만들어 시행하기도 하였으며, 공납(貢納)의 폐단에 대해서도 공안(貢案)의 개정, 수미법 시행 등 여러 가지 해결책을 구상하고 제시하였다.

향약(鄕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공동체 자치의 전통이 주자(朱子)가 정리한 여씨향약의 영향을 받아 체계화된 것으로, 조선시대 향촌 사대부의 지방 지배 및 풍속 교정의 방편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이는 서원향약을 비롯한 네 종류의 향약을 제정하였는데, 서원향약은 이이가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서원향약은 양반뿐만 아니라 모든 신분의 주민을 참여시키는 계 조직을 향약에 연계시켰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이는 또한 스스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경험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제반 사항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붙인 일기를 남겼는데, 그것이 『경연일기(經筵日記)』이다. 그는 『경연일기』에 당시 조정에서 마주친 여러 상황과 자신이 만난 여러 인물들에 대한 평가, 그밖에 여러 가지 제도의 시행과 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을 기술하였다. 『경연일기』는 율곡의 경세 사상 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경연일기』는 이이의 문집인 『율곡전서』에 상·중·하 3책으로 되어 있고, 조선시대의 야사집인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석담일기』라는 제목으로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명종 20년(1565)에서부터 선조 14년(1581)까지 이이가 조정에 출사하여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술과 평가가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이이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당면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이이가 관료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정국은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분열되어 가고 있었다. 이이는 이것을 붕당의 조짐으로 보고 어떻게 해서든 조정하여 봉합하고자 하였으나 반대파들은 이러한 이이의 노력을 한 쪽만을 편드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국왕인 선조는 이이를 요직에 등용하고 개혁책을 내는 것을 장려하였지만, 실제 그의 방안을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이는 이러한 선조의 태도에 실망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기도 하였지만, 끝내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관직에 다시 나오곤 했다.

결국 이이는 병조판서로 재직 중에 과로로 병을 얻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임명되어 관북(關北) 지방으로 가게 된 서익(徐益)이 임금의 명을 받고 변방의 일을 물으러 오자 이이는 병세를 염려하여 만남을 만류하는 자제들의 청을 물리치고 6조항의 방략을 불러주었는데, 구술을 마친 이이는 호흡이 끊어졌다가 결국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이의 죽음에 대한 이 기록은 『선조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에 보인다. 『선조실록』은 광해군(光海君) 때 북인들을 중심으로 편찬된 것으로 서인들을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집권한 서인들은 실록 수정 사업을 발의하여 수정실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정실록이 나왔다고 해서 이전에 편찬한 실록을 파기하지는 않았고 함께 보관하였다.

4 학문과 저술

이이의 학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성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경세학이다. 이이가 살았던 16세기는 중국의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는데, 이이는 이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퇴계 이황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이는 자신의 성리학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제시하였다. 이는 존재로서는 이기가 하나이지만 개념이나 가치로 본다면 둘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치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이황이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벌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내용을 친우인 우계 성혼과 편지로 토론하였는데, 이이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여 자연과 인간의 모든 현상은 기가 작용하면 이가 조정하는 기발이승의 한 길 밖에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이이는 이와 기의 차이를 뚜렷이 구분하였는데, 이는 시공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가지고 기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이통기국’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이이는 자신의 학문적 기준을 성리학에 두고 있었지만,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어릴 때 불서를 섭렵한 경험도 있었고, 양명학(陽明學)과 도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평가하였다.

이이는 선조 5년(1572)년 우계 성혼으로부터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설과 인심도심설 등에 관해 의문 나는 점을 질문 받고, 이 주제에 대해 그와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하였다. 지금 율곡의 문집에는 그가 성혼에게 이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 보낸 편지가 9통 정도 남아 있고, 성혼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도 5통이 부록되어 전한다. 이러한 편지를 통해 율곡의 사단칠정설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편지에 해당하는 것이 『율곡전서』 9권에 수록되어 있는 ‘성호원(成浩原)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이이 학문의 또 다른 특징은 경세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관직 생활 기간에 끊임없이 글을 올려 여러 개혁 정책을 제안하였다. 여러 개혁 상소와 동호문답 등의 저술을 통해 그는 동서분당의 해소, 공납 제도 개혁, 서얼 허통과 공사노비속량 등 신분제 개혁, 교육 제도 및 군사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성군이 되기 위해 임금이 갖추어야 하는 학문인 이른바 성학, 곧 제왕학에 관심을 보였다.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자신의 성학을 체계화하였다. 『성학집요』는 『대학』을 기본으로 하여 목차를 구성한 다음 여러 경전과 사서 가운데 긴요한 말씀을 모아 편찬한 것이었다.

이이는 『성학집요』 서문에서 이 책이 중국 송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모범으로 하였으며, 대학연의가 너무 내용이 많은 것을 경계하여 보다 간략하고 요령 있게 정리하려 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1편의 통설을 시작으로 2편 수기편은 총 13장, 3편 정가편은 총 8장, 4편 위정편은 10장으로 구성하였으며 마지막 5편은 성현도통편을 배치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가 비록 임금의 학문을 위해 편찬한 것이지만, 학문의 실상은 상하가 통하는 것이라 하여 보편적이라는 것도 지적하였다.

이이는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이는 선조의 명을 받들어 사서의 언해본을 저술해서 한글화 하였고,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격몽요결』은 이이가 해주(海州)에서 어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본문은 입지(立志)·혁구습(革舊習)·지신(持身)·독서(讀書)·사친(事親)·상제(喪制)·제례(祭禮)·거가(居家)·접인(接人)·처세(處世)의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 끝에 사당도(祠堂圖)·시제도(時祭圖)·설찬도(設饌圖)와 출입의(出入儀)·참례의(參禮儀)·천헌의(薦獻儀)·고사의(古事儀)·시제의(時祭儀)·기제의(忌祭儀)·묘제의(墓祭儀)·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어 구체적인 학교 제도의 개혁안도 제시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원향약과 해주향약을 저술하여 지방 사회의 교화와 자치에 대한 방안도 제시하였다. 이처럼 이이는 당시의 지배적 학풍은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정치와 경제,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민생에까지 관심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실학사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쳐 실학의 선구로 평가되기도 한다.

5 영향과 계승

이이의 문인으로는 조선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있다. 김장생의 문인으로는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비롯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장유(張維),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이 있다. 또한 친우인 우계 성혼의 문인들도 율곡의 문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는데 성혼의 학맥은 사위인 팔송(八松) 윤황(尹煌)으로 이어져, 그의 아들인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 손자 명재(明齋)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이후 송시열과 윤증이 반목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되기 전까지 학문적 기풍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이처럼 율곡의 문인들은 퇴계 문인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이루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는 율곡의 성리학을 계승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서인 세력의 주축으로서 이후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하였다.

율곡전서의 문인록에는 김장생, 조헌 등 여든네 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들은 동문계를 만들어 봄가을로 서원에 모였는데, 그 규정은 한결같이 이이가 지은 향약 절목을 따랐다고 한다.

이이의 추숭 사업은 문인들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이루어진 경향이 있는데, 이이는 인조반정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다음 해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또한 숙종 7년에는 문묘에 종사되었다. 하지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복향되었다. 파주의 자운서원 등 전국의 20여 개 서원에 종향되었다.

율곡 이이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굴곡에 따라 추숭의 부침이 잦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이의 문인들과 그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은 이이에게 가해진 비난과 공격에 반발하여 그를 변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는데, 『율곡전서』에는 그러한 내용의 상소들이 따로 모여 있다.

『율곡전서』의 원향록(院享錄)에는 율곡 이이를 모신 전국 스물두 개 서원이 나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소현서원(紹賢書院)은 이이가 황해도 석담(石潭)에 정착하면서 세운 은병정사(銀甁精舍)가 모태가 되어 설립된 서원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소현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자운서원은 이이의 묘가 있는 경기 파주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효종(孝宗) 때 사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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