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이지란

이지란[李之蘭]

조선 건국을 도운 여진 귀화인

1331년(충혜왕 1) ~ 1402년(태종 2)

이지란 대표 이미지

청해이씨 종중 이지란 초상

e뮤지엄(경기도박물관)

1 개요

이지란(李之蘭)은 여진(女眞) 사람으로서, 성은 퉁[佟]이고, 이름은 투란티무르[豆蘭帖木兒]이다. 각종 사료에는 이두란(李豆蘭)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자는 식형(式馨)이다.

그는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이고,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이지란은 아버지의 천호 관직을 이어받은 상황에서 고려에 공민왕 때 귀화하였다. 이후 주로 함경도 북청(北靑) 지역에서 거주하였고, 이씨 성과 청해(靑海, 北靑) 본관을 하사받아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부인은 곡산(谷山) 강씨 가문 강보대(康普戴)의 딸이고, 아들은 이화상(李和尙), 이화영(李和英), 이화미(李和美), 이화수(李和秀)이다.

2 고려 향화를 선택하다

이지란이 향화(向化, 귀화)를 택한 때는 한창 활동할 시기인 41세 때였다. 1371년(공민왕 20)에 여진 천호(千戶) 이지란은 휘하의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향화 의사를 밝힌 후에 100호(戶)를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무장으로 활동하였고, 주로 이성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380년(우왕 6)에 전라도 운봉(雲峰, 남원)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를 황산(荒山, 黃山)에서 크게 무찔렀고, 1383년(우왕 9)에는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를 침략한 요동(遼東), 심양(瀋陽)의 초적을 몰아냈고, 곧이어 와서 노략질하던 여진 쿠바투[胡拔都]도 물리쳤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에는 위화도회군에도 기여하였다.

고려 말 이성계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이지란은 매우 든든한 존재였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에 협력하면서 동북면(東北面, 함경남도)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이지란을 휘하에 두게 되면서 그 일대에 거주하던 다른 여진족들까지도 회유, 복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여진 정책의 방향은 조선 태조대까지도 지속되었다.

1402년(태종 2)에 이지란은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장례를 본토의 풍속에 따라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태종도 이를 수용해 주었다. 그가 고려에 귀화한지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진족이라는 정체성을 지니며 살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

고려 말 전장에서의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약은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지란은 이성계의 휘하에 있었고, 두 사람은 고려 말의 여러 전장에서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었다. 이들 모두 활을 잘 쓰는 무장이었고, 협공하여 승리를 이끌어내고는 했다.

1380년(우왕 6)의 황산대첩에서 이지란은 이성계의 후방에서 공격하는 왜의 적장을 방어하여 이성계를 살렸고, 젊고 용맹한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이성계와 협공하여 죽였다. 특히,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고, 이지란이 그의 얼굴을 쏘아 죽임으로써 왜적의 기세가 꺾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383년(우왕 9) 쿠바투의 침략 때에는 이성계가 어머니의 상중이었던 이지란을 불러 종군하도록 하였다. 비록 이지란은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패전하였지만, 이성계가 격전을 벌이며 물리쳤다. 그리고 1385년(우왕 11)에 왜선 150척이 함주(咸州) 등의 함경도 지역을 침략했을 때에는 이지란, 조영규(趙英珪) 등이 적을 유인하는 전략을 쓰면서 승리를 잡았다.

1392년(공양왕 4)에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죽이려고 하자, 이지란은 이성계가 모르는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성계에 대한 남다른 충성과 신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성계 세력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일시적인 정치적 수세에서 벗어나 다시 정국을 장악하게 되자, 이지란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이지란은 이성계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는 세력의 일원이 되었고,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

한편, 이지란과 이성계는 모두 곡산 강씨 가문과 혼인을 맺고 있었다. 이지란의 부인 곡산 강씨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조카이다. 이지란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는 이성계와의 첫 만남에 대해 매우 신비롭게 서술하고 있다. 이성계의 어머니 꿈에 노인이 찾아와서 아들을 보좌해 줄 사람이 강가에서 활쏘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고, 때마침 그곳에서 이지란이 활을 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이성계가 기이하게 여겨서 형제의 의리를 맺고, 자기 아내의 조카와 혼인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개연성이 부족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지란과 이성계의 신실한 관계로 인해 혼인까지 이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왕실이 된 이성계가문과의 혼인관계는 이어졌다.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은 자신의 딸을 태조의 셋째 아들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손자 반남정(潘南正) 이례(李禮)와 혼인시켰다.

4 정치적 삶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이지란은 62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의 신도비(神道碑)에는 그가 조선 건국 이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대부분 북청에서 생활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이지란이 몇몇 주요 현안에 참여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1393년(태조 2)에 이지란은 태조, 남은(南誾), 김사형(金士衡) 등과 함께 새 수도 후보지였던 계룡산의 지세를 살펴보았고, 경상도의 왜구를 방어하거나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갑주(甲州), 공주(孔州)에 성을 쌓는 일을 총괄하였다.

이지란의 정치적 행보는 태종의 집권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이방원을 도왔고, 그 공훈을 인정받아 정사공신, 좌명공신에 연이어 책봉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 삼공신(개국, 정사, 좌명)에 모두 책봉된 사람은 이지란과 이화(李和), 조박(趙璞), 조온(趙溫), 조영무(趙英茂) 등 다섯 명에 불과하다. 여기에 고려 말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운 회군공신(回軍功臣)까지 포함하면, 이지란 그리고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이화 두 사람 뿐이다. 이상과 같은 각종 공신 책봉은 이지란이 고려 말의 위화도회군에서부터 조선 건국, 왕자의 난에 이르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에서 아주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지란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별다른 정치적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의 신하였다. 1402년(태종 2) 그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태조사후에는 종묘의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지란의 묘소는 그가 살던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다고 한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