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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삼전도의 치욕을 겪다

1595년(선조 28) ~ 1649년(인조 27)

인조 대표 이미지

장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의 제16대 임금으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논공행상 문제로 이괄이 난을 일으켰고, 여진족이 성장하면서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2 출생과 성장

인조의 이름은 이종(李倧)이며,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와 인빈(仁嬪)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定遠君 : 추존왕 元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다.

인조는 동복형제 둘과 이복형제 하나가 있었는데, 동복형제 중 바로 아래 동생이 능원대군 이보(綾原大君 李俌)이며, 막내 동생이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으로서 광해군대 역모 혐의로 자진하였다.

인조는 1595년(선조 28)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가(宮家)가 다 해주에 따라갔을 때 태어난 것이다. 인조에게는 오른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는데, 선조(宣祖)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린 시절에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사랑을 받았고, 그 휘와 소자(小字)도 다 선조가 지어주었는데, 소자를 천윤(天胤), 즉 하늘이 낳은 후사라고 지은 것을 듣고 광해군(光海君)이 언짢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선조가 직접 가르쳤다고도 전하는 등 기록에서는 전반적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음이 강조되어 있다.

조금 큰 후에는 외가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綾陽都正)으로 품계가 올랐다가 얼마 후 군(君)으로 봉해졌다.

비(妃) 한씨(韓氏)는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1594년(선조 27) 7월 1일 정축에 원주(原州) 읍내 사제(私第)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광해군 2)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다가, 1623년에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었다. 1635년(인조 13) 12월 9일(乙酉)에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가 42세였다.

계비 조씨(趙氏)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서, 1624년(인조 2) 11월 7일(丁巳)에 직산(稷山)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를 행하였다. 1688년(숙종 14) 8월 26일(丙寅)에 창경궁(昌慶宮) 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65세였다.

3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는데, 중종이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된 형식이었다면 인조는 자신의 군사력과 인척들을 중심으로 주도적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조는 개인적으로 광해군과 악연이 있었다. 그의 막내 동생인 능창군 전(綾昌君 佺)이 역모 혐의로 국문을 받고 교동에 금고되었다가 자살하였던 것이다.

능창군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기상이 비범하다.”라거나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매우 성하다.” 혹은 “인빈(仁嬪)의 무덤 자리가 매우 좋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전한다. 옥사 이후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은 심한 슬픔 때문에 병을 얻어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항상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그제야 지난밤에 변고가 없음을 알게 되고, 해가 지면 비로소 오늘 편안히 지낸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 지금은 다만 일찍 죽어서 선왕을 저승에서 모시기를 원할 뿐이다.” 하더니 1619년(광해군 11)에 회현방(會賢坊)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이후에도 광해군이 장사지낼 기일을 재촉하여 마음 놓고 무덤 자리를 가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감히 인빈(仁嬪)의 무덤 곁에 장사하지 못하고 임시로 양주(楊州) 장리(場里)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즉위 후 인조는 김포로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하였다.

인조는 친척인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과 반정을 도모하고, 신경진을 통해 김류(金瑬)·이귀(李貴)와 연결되었으며 다시 이들을 통해 김자점(金自點)·이괄(李适) 등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원래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부사에, 신경진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에 있을 때 범 사냥을 명분으로 군사의 이동 경계의 제한을 철폐하여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다행히도 이들의 거사 시도는 김자점 등이 궁중에 청탁을 넣어 해결되었으나 그 이듬해에도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추국청까지 설치되어 관련인들이 모두 잡힐 형국에 처하게 되자 마침내 그날 새벽 1623년 3월 13일 밤에 거사하였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에 모이고, 뒤이어 이서가 이끄는 장단의 군사와 김류가 이르렀다. 인조는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았다.

전체적인 군사 규모는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기타 인물들이 이끈 군사가 6~700명 정도로 1400여 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3경 무렵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宴會)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의관을 쓰고 숨어 있었으나, 안국신이 반정 세력에서 고하여 잡혀 왔다. 폐세자(廢世子) 역시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이러한 와중에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여러 전각에 붙어 불에 탔다.

이후 반정 세력과 인조는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직접 찾아가, 보새(寶璽)를 바쳤다. 이에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경운궁의 별당에 선조의 허위를 배설하고 그곳에서 인조를 즉위시켰다.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 대한 교서에서 왕대비가 지적한 광해군의 폐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과 동생,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인륜을 해쳤다는 점, 둘째 지나친 토목공사와 인사의 파행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셋째 명의 요청에도 파병을 주저하고 심하(深河) 전투에서 투항하는 등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오랑캐와 금수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즉위 후 인조는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를 축출하고 계축옥사와 폐모론에 가담한 자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永昌大君), 임해군 진(臨海君珒),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또한 광해군대 실각해 있었던 이원익(李元翼),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등의 남인과 이정구(李廷龜), 서성(徐渻), 오윤겸(吳允謙) 등의 서인들을 등용하였다.

그런데 반정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을 내응한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한데 비해, 반정에 직접적인 공이 있었던 이괄을 2등에 녹공하였다.

이어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괄은 그의 외아들 이전(李栴)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즙(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어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서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의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심대림(沈大臨) 등이 그의 군중(軍中)에 머물던 아들 이전을 붙잡기 위해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1624년(인조 2) 1월 24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세가 자못 강하고 빠르게 진격하여 서울이 점령되기에 이르자, 2월 8일 밤 인조는 공주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괄은 서울에 들어와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까지 하였으나,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격파당하고 도망치던 중 경안역(慶安驛) 근처에서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괄 등의 머리가 공주에 이른 후 인조는 문사와 무사를 친시(親試)하여 홍습(洪霫) 등 5인에게 급제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4 두 차례 호란을 겪다

즉위 과정, 직후의 반란 등 파란만장하게 재위 기간을 시작한 인조에게는 이보다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방에서 성장하던 후금이 두 차례에 걸쳐 침략한 것이었다.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양 호란에 대해서 통설적인 서술에서는 인조와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라는 서술을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조 정권의 친명 정책은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지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배금 정책을 취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은 다면적 목적을 위해 호란을 일으켰다.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키며 추구한 가장 큰 목표는 모문룡 제거였다. 이를 통해 후환을 없애고, 더불어 양곡을 얻어내며 교역을 통해 여타 물자를 획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옮겨갔다. 당시 후금군은 언제든지 서울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화친으로 전쟁을 끝냈다.

정묘호란을 통해 후금은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였으며, 조선을 명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에서 떨어뜨리게 되었다. 또한 무역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명과 교역이 단절되어 맞이하고 있었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오랑캐와의 화친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였다는 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반정의 명분 자체를 거스르는 문제였다. 또한 이후 무역 문제는 또다른 문제들을 연이어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정묘호란의 화친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조선-명의 관계가 해체되지 않은 속에서 오래 갈 수는 없었다. 명과 후금의 대결에서 대부분 후금이 승승장구하며 후금의 위세는 날로 높아졌다. 결정적으로 1636년 홍타이지는 차하르 릭단 칸의 옥새를 얻은 것을 계기로 칭제건원을 선언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자신의 추대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선은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이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가 도착한 뒤였다. 13일 평양, 14일 개성을 지났다는 치계가 이르자 급히 강화를 수비하도록 하고,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효종(孝宗),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인조도 그날 밤 남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겨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결국 1월 19일 청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조선은 홍타이지를 ‘천자’로 부르고 제후국이 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으나 직접 나가지 않고 성 위에서 멀리서 배례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청에서는 인조의 출성을 계속 요구하였다. 인조가 출성을 거부하자 1월 22일 강화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24일 이 사실을 통고하고 출성하라고 하였다. 결국 27일 인조는 출성 요구를 받아들였고, 30일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 당도하여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청에서는 이후 소현세자와 일군의 신하들을 인질로 끌고 갔으며,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인조가 입조해야 한다거나 왕위를 교체하겠다는 의향을 은근히 흘려 인조를 압박하였다.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직접 행한 자괴감에 더하여 이러한 정치적 압박은 인조대 내내 큰 위기였다.

5 내정 개혁과 군대 강화

인조대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광해군대 경기도에 실시되었다가 중단된 대동법(大同法)을 재개한 것이었다.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납물을 전결에 기초하여 세금으로 받는 제도로서,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하고 쌀을 징수한 것이었다.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京納物 : 지방에서 서울로 바치는 공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인조 즉위와 함께 1623년(인조 1) 경기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그리고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었으며, 이들 지역은 효종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실시되었다.

또한, 1634년(인조 12)~1635년(인조 13) 삼남(三南)에 양전(量田)을 실시함으로써 전결수를 증가시켜 세원을 확대하였다.

미파악 상태였던 전결을 파악함으로써 세수를 증가시킨 대신 전체적인 세율을 감하하기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세종 때 제정된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근본 취지로 하는 영정법(永定法)을 마련한 것이다. 세종대 제정된 전분6등법과 연등9분법은 전체적으로 그 판정과 운영이 복잡하였고 세율이 높은 편이었다. 이에 15세기 말부터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따라 쌀 4∼6두(斗)를 고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영정법은 이러한 관례를 법제화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그 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9등급의 새로운 수세액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삼남 지역의 농지 대부분이 하중·하하전으로 평가되면서 전세는 전체적으로 4∼6두를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세금 부담을 경감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는 무산되었으나, 군역(軍役)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세금 제도를 개선하였다.

인조대에는 군사력의 강화시키기 위한 조처들이 행해졌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에는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御營廳)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는 항상 청의 의심과 감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6 소현세자의 사망과 강빈의 옥사

1644년(인조 22)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죽은 이 해에, 심양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 일행이 12월 15일 심양을 출발하여 1월 20일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1년 남짓 지난 1645년(인조 23) 4월 26일(무인)에 소현세자가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사망하였다. 소현세자는 자질이 영민하였으나 심양에서 10여 년 생활하는 사이에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체로 귀국 후 친청적인 자세를 취했고 이로 인해 독살을 당한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이후 새로이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아들 대신 동생인 봉림대군을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의심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그 뒤 세자빈이었던 강빈(姜嬪)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소생인 원손(元孫)이 폐위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로 책봉되며 강빈은 입지가 좁아졌다. 또한 인조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여기에 다시 후궁 조씨와 김자점의 참언이 인조에게 작용, 결국 강빈은 궁중에서 발각되었다는 인조저주 사건과 왕의 음식에 독약이 들어갔다는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1646년 3월에 사사되었다.

강빈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와 네 형제도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으며, 소생인 세 아들도 제주에 유배되어 그 와중에 두 아들은 죽었다. 강빈의 옥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이후에도 그녀의 신원이 여러 차례 건의되었다. 결국 1717년(숙종 43)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발의로 신원되고 민회빈(愍懷嬪)으로 봉해졌다. 또한 그 아버지 강석기를 비롯, 홍무적(洪茂績) 등 관련해서 화를 입었던 사람들 모두 복관, 증직되었다.

7 훙서와 후손

인조는 1649년(인조 27) 5월 8일(병인)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의 동침에서 승하하였다.

나이는 55세, 왕위에 있은지 27년이던 해였다. 이해 9월 20일에 인열왕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으니, 능호은 장릉(長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시호는 헌문 열무 명숙 순효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묘호는 인조(仁祖)다.

후손으로는 6남 1녀를 두었는데, 인열왕후 사이에서 4남을 낳았으며, 후궁에게서 2남 1녀를 낳았다. 후사는 둘째 효종이며, 첫째는 소현세자, 셋째는 인평대군인데 양자로 능창대군(綾昌大君)의 뒤를 이었다. 넷째 용성대군(龍城大君)은 일찍 죽었다. 이외에 귀인(貴人) 조씨(趙氏)가 낳은 숭선군(崇善君) 징(澂)과 낙선군 이숙(樂善君 李潚) 숙(潚), 효명옹주(孝明翁主)가 있는데, 낙선군은 양자로 의창군(義昌君)의 뒤를 이었다. 이들은 효종대 김자점의 옥사로 조씨는 사사되고 일가가 적몰되었는데, 숭선군과 낙선군은 후에 복호되었으나 효명옹주는 복호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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